제3부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 제1장 우리 민족의 하느님 신앙 1. 하느님 신앙의 발생
하느님 또는 하나님하면 의례히 기독교를 생각하기 쉽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이고, 엄청난 신학적 연구가 그를 중심으로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은 기독교에 한한 것만은 아니다. 여러 민족의 고대사회에 하느님 신앙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종교현상이다. 이집트ㆍ중동ㆍ인도ㆍ중국 극동에 걸친 모든 고대사회에 예외 없이 하느님 신앙이 발견된다. 고대 사회에 이렇게 하느님 신앙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20세기 초,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그 문제 해명에 다각적인 검토를 행하고 있지만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고대에 올라갈수록 인간은 자연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 토착생활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것은 농업과 목축인데, 그것이 당시에는 전적으로 자연조건에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배를 받는다는 위치에 있게 되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주종(主從) 관계가 성립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런 주종관계는, 그것에 인간의 영육관(靈肉觀)이 반영되면 자연의 지배력에도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발생하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존재는 정신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며 의지가 있는 곳도 정신이고 생명성 또한 정신에 있다고 생각될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삶과 죽음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과 분리라는 현상으로 보게 된다. 이런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적인 생각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주종 관계에 반영되면 인간을 지배하는 자연에도 정신이 있다는 생각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력이란 곧 의지(정신)의 작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지배력에 이렇게 정신이 있다고 보게 되면 그러한 자연은 이제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정신적인 신성(神性)을 띠게 된다. 이것을 종교학에서는 자연현상의 신격화라고 부르고, 그렇게 신격화된 자연을 '자연신(自然神)'이라고 한다.
인류의 원시 종교는 모두가 이런 자연신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천계(天界)의 일월성신(日月星辰), 공계(空界)의 풍운뇌우(風雲雷雨), 지계(地界)의 산하맹수(山河猛獸)등이 신격화된 자연신이 원시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연신관(自然神觀)에 다시 인간사회의 지배윤리가 투영되면 어떻게 될까? 인간사회에는 반드시 사회를 이끌어갈 지배자가 있고 지배자는 사회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율법에 따라 다스리게 된다. 법을 어긴 자는 벌하고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준다. 이런 지배원리가 자연신에 반영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곳에도 위계가 설정될 것이고, 그럴 경우 최고신의 위치에 오를 것은 태양신(太陽神)일 것이다. 천(天)ㆍ공(空) ㆍ지(地) 삼계(三界)에서 최상위에 있는 것은 천계(天界)이고 다시 그곳의 천체 중에서 최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태양이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 태양신 숭배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고신의 위치에 오른 태양신은 이제 천(天)ㆍ공(空) ㆍ지(地) 삼계(三界)를 다스리는 지배자요, 주(主. 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뜻을 나타낼 새로운 개념이 필요해진다. 고대 종교에 두루 나타나는 '하늘-임'이라는 개념은 그런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천제(天帝), 인도의 인드라(Indra), 아스라엘 민족의 여호와(Jehovah) 등은 모두 '제천신(諸天神)의 주(主. 임)'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하늘임' 또는 '하느님'ㆍ'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대개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신 관념이 일단 성립하면, 인간은 그를 우러러 열렬한 신앙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풍작을 위해 파종과 추수 때에 하늘에 제사하고, 전쟁의 승패를 하늘에 묻고, 정치 또한 하늘의 뜻을 살펴 행했던 것은 모두가 그런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사회의 모든 길흉이 하느님의 상벌로 헤아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또한 그가 다스리는 세계에서 특히 인간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우러러 따르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인간들이 갈 길을 못 찾고 방황하거나 스스로 하늘의 뜻을 어겨 타락과 멸망의 길을 더듬을 때,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라도 이끌고 구원해 주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생각에서 발생한 것이 소위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Messiah) 신앙이 아닐까 한다. 하느님이 직접 아들을 내려 보내 인간을 구원해 준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 사상도 이스라엘 민족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우리 동이족(東夷族)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朱蒙)은 하늘의 정기(精氣)가 하신(河神)의 딸에 잉태하여 난생(卵生)하고 스스로 '태양의 아들(日子)', '하늘임의 아들(天帝子)'임을 자처하고 있다.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또한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라(光明理世)"는 천명(天命)을 받고 인간세상에 난생하였으며, 가락의 김수로(金首露)도 '유신가방(維新家邦)'하라는 천명을 받고 난생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단군설화에서는 더욱 발달된 형태로 나타난다. 환인(桓因)이 아들 환웅(桓雄)에게 "인간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하라(弘益人間)"는 명을 주니 환웅은 그것(天符印)을 받고 내려와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느님(桓因)이 아들을 내려 보내 인간을 이끌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몽 ㆍ박혁거세ㆍ김수로ㆍ단군 등은 모두 새로운 역사를 참조한 동이족의 메시아라고 불러도 좋다.
하느님 신앙은 이상과 같이 기독교에 한한 것이 아니라 고대 종교에 두루 나타나는 보편적인 종교현상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메시아 사상도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_(())_ 출처 : <고익진 교수의 불교의 체계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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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