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소리가 그립다(1202)
유 병 덕
그해 가을은 귀뚜라미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니 풀벌레세상이 되어버렸었다. 그 무렵 나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대하지 않은 나방까지 전구주변을 오락가락하며 나의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던 날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아버님은 며칠 전 부대에 사고가 있었다고 걱정하며 잠도 주무시지 않고 줄 담배를 피웠다. 그날도 부대에서 돌아 오시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말씀이 없으셔서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어른들 일이라 여쭈어 볼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가슴을 쓸어않으며 신음하며 주저앉으신다. 나는 놀라서
“아버지,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대답을 못하신다. 어린나이에 겁이 덜컹 났다. 어머님은 서울 외갓집에 일보러 가고 집에 안계시다. 나는 겁이 더럭 났다. 동네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양조장집으로 뛰었다.
“아저씨, 아저씨 저희 아버님께서 아프셔요, 무척 힘들어하셔요, 어떻게 해야죠? 도와 주셔요.”
그 아저씨는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막걸리를 실어 나르던 삼발이차에 나를 타라고 하더니 우리 집으로 급히 왔다. 아저씨는 아버님께 다급히 묻는다.
“대장님! 어디가 아프세요, 어떻게 아프세요?”
하지만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신음만 하셨다. 그 아저씨는 삼발이차에 아버지를 태워 읍내병원으로 달렸다. 시골병원이라 의사 한 분뿐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아버님 곁에 앉아 청진기를 가슴에 댔다.
“숨을 깊게 들이쉬어요, 더 깊게, 내쉬고, 다시 한 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셔요.”
몇 차례 반복하더니 혼잣말로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하더니 나에게 묻는다.
“집안에 어른들은 안계시나?”
나는 의사 선생님을 바라보며 멍한 채로 눈만 껌벅였다. 그 의사선생님은 그런 내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 넘기시기 어렵겠는데,”
나는 깜짝 놀라 의사선생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날 밤이 아버님과 마지막이었다.
나는 경황이 없었다. 무얼 먼저 해야 할지, 급히 집으로 와서 서랍을 열고 급히 뒤적이어 왕래하였던 사람들에게 부고를 드렸다. 그리고 시집간 누님이나 외가 집 등 대여섯 군데 전보를 보냈다. 사흘 후 친척과 아버님 친구 분들을 포함하여 어림잡아 200여 분 남짓 모여 장례를 치렀다.
선친은 생전에 서울, 의정부, 춘천, 양구 등지에 많은 곳을 거피면서 한평생을 군인생활을 하신분이다. 아버지는 가끔 서울 등지의 친구 분이나 군부대 많은 분들도 찾아와 정담을 나누곤 했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분주하게 드나들던 발길이 뚝 끊겼다. 옛말에 “초상 치른 집 같다.” 는 말이 실감났다. 산골짜기 집에 귀뚜라미만이 끼르륵끼르륵 울어댈 뿐이다. 나는 그날 밤 전구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불나방들이 보기 싫어 전등불을 꺼 버렸었다.
그 이튿날 낯선 지프차 한 대가 마당으로 미끌어지듯이 들어왔다. 나가보니 그동안 가끔 찾아왔던 헌병대장이었다. 그는 라면상자와 과자봉지를 차에서 주섬주섬 내려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이거 필요할 때 먹어. 밥 굶지 말구, 아드님 되시지?”
하고 물어 왔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슬프게 대답했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다정히 옆에 앉았다.
“내가 돌아가신 자네 아버님께 신세를 많이 졌지. 전쟁 후 38 이북지역이 수복되면서 서로 알게 되었는데 어려울 때마다 찾아와서 부탁하면 당신께서 내일처럼 해결 해주시곤 했지. 참 고마운 분이었어. 그런데 최근, 부대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무척 힘들어 하셨어. 직책상 도의적 문제였지.”
선친은 참 훌륭한 분이셨다. 당시 수복지역의 철책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모사단장과 의견을 달리 했었다고 한다. 그는 철거한 철조망을 페기처분하자고 했고, 아버지는 재활용하자고 한 것이다. 이유는 그 당시 전국에 산업 붐이 일어나는데 건설자제가 부족하니 못을 만들어 산업자재로 공급하자는 것이다.
“자네 아버지의 그 생각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얻어 공병대원들을 동원하여 못을 생산했지. 그 것을 서울 공사현장으로 보내 재활용했지, 당시 헌병대에서는 그 물자를 실은 수송차를 선도하였는데 나도 서울에 몇 번 다여 온 적이 있었지. 판매한 수익금으로 사병들 회식을 시켜주기도 했어.”
그 결과 아버지는 국방부로부터 좋은 사례로 선정되어 상도 받으셨다고 했다. 산업자재로 활용하고 사병들 사기앙양도 시켜 일거양득인 된 셈이지, 매우 현명하다고 높이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 외아들 하나 있다고 자랑을 하셨는데, 아드님도 선친처럼 사회를 위해 좋은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 돕는 좋은 일을 하면 어떨까? 잘할 수 있을 거야, 너무 상심하지 말고 힘내,”
그분의 위로와 격려의 말은 평소 선친의 말로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 집은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우리에게 어무나 클 수박에 없었다. 그 후 나는 출가한 춘천에 누님 댁에 며칠 머물면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을 알게 됐다. 그에게 공무원이 되는 길을 물어보니 답을 얻을 수 없다. 서울로 왔다.
그후 나는 종로경찰서 뒤 모 고시원에 둥지를 틀고 인근 공무원 수험학원을 다니며 청강했다. 시험 날자가 공고될 때마다 무조건 응시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 결과 어려운 행정고시(재경분야)등 많은 고배를 마셨으나 하급 법원직, 군무원, 영림직, 행정직 등에 합격하여 조금씩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후에도 더 큰 뜻을 이루어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리며 여러 시험에 도전해 보았으나 결국 실패한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 아침에 건강이 좋지 않으시던 어머님까지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눈앞이 캄캄했다. 더 높은 뜻을 이루려던 공부를 여기서 멈추고 나는 차선책으로 선친을 뜻을 가슴에 새기며 충남도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나의 공직생활의 대부분은 도청에서 보냈다. 오랜 기간 예산부서에서 근무하며 소외된 곳, 그늘진 곳 그리고 사회적 약자 편에서 조금의 힘이나마 보탠다는 사명감으로 성실하게 근무했다. 특히, 아동보육시설, 부랑인 보호시설, 노숙자쉼터, 아동학대 보호시설, 노인요양시설, 나환자촌지원사업 등 현장을 찾아 애로와 불편사항을 풀어 주는데 힘을 썼다.
그러한 노력으로 나는 충청남도 국장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담당국장을 맡으면서 복지시설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 처우개선, 6.25참전용사 등 보훈가족의 처우개선과 보훈회관건립, 노인일자리와 노인복지회관건립, 다문화가정의 지원, 부모들이 힘들어 하는 발달장애 가정지원이나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위한 공공시설개선 등에 관심을 갖고 힘썼다.
그렇게 세월이 참 망ㅎ이도 흘러갔다. 어느 날 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퇴직공무원워크숍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부산 해운대 모 리조트이다. 어느 새 정년을 앞둔 나이가 된 것이다. 나는 이른 아침 일어나서 아내에게 다녀온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집을 나섰다. 가방을 둘러메고 예매한 KTX 열차시간을 맞추어 대전 역으로 뛰었다. 차에 몸을 싣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부산역이다.
고속열차가 빠르다지만 그동안 공직생활을 한 세원이 더 빠르게 느껴진다. 열차에 몸을 싣고 창밖을 보려하니 다 왔다고 내리란다. 퇴직을 앞둔 중앙과 지방의 공직자와 정년을 맞는 학교장 등이 한자리에 모여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종국에는 공직이 끝나 감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창밖으로 바라본 해운대 가을바다는 평화로웠다. 지난날 선친을 모시고 병원에 갔을 때 의사선생님께서 숨을 깊게 들여 마시고 다시 내쉬어 보라는 말처럼 심호흡을 하며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동안 어려운 이웃에게, 힘들어하는 동료에게 힘내라고 건넨 따듯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조금 더 잘해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불현듯 “있을 때 잘해,”
라는 말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그래도 함께 일한 동료들이 있어 행복했다. 오늘따라 아버님이 세상을 떠났던 날 밤의 귀뚜라미 소리가 그립기만 하다. 불나방들도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