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치 않은 사람들의 집합소인 연예계에서 우리는 왕년의 잘 나가던
스타가 종종 좋지 못한 상태로 추락하는 경우를 본다.
스타를 사랑하던 우리들에게 이런 경험은 인생무상과 인기의 허망함,
또는 변화하는 세월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사의 보편적 가치
관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과거 그를 사랑했던 애정의 깊이만큼이나 팬들에게도 그
비애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타의 자질을 떠나 실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봄비]라는 곡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국내 [소울] 창법의 대부
박인수는 바로 그런 동질의 슬픔을 전달하는 비운의 뮤지션이다.
이북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 중에 어머니와 함께 피난 내려와 살다,
일곱 살 때 전북 정읍역 부근에서 길을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서울 돈암동의 고아원을 거쳐 춘천 부근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생활을 전전하게 되었고 영어엔 익숙해졌지만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진
못했다.
고아처럼 지내는 그를 한 군인이 춘천의 어느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켜
주었지만 나이가 많아 1, 2학년은 건너뛰고 바로 3학년으로 입학한 것이
잘못 이였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3학년이 된 그는 제대로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결국 아직까지도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영어를 괜찮게 했던 그는 12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3년여 동안
살기도 했으며 가수가 된 이 후에도 팝송을 카피하는 데는 남다른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미국에서 놀림과 양부모의 잦은 싸움 등으로 3년만에 국내로 들어온 그는
다시 미8군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기약 없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그의 콧노래를 유심히 들었던 한 미군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며 가수 이상으로 유명해지자, 직업적인
가수로 미8군 무대에 서, 5∼6개의 클럽에 불려 다니며 '달러박스'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자 신중현이 그를 찾아왔다.
신중현의 그룹 블루즈 테트(Blooz Tet)에서 싱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는 1970년 5월 발표된 신중현이 이끄는 그룹 퀘션스(Questions)의 역사
적인 앨범 [퀘션스-유니버샬.KLH15]에서 [봄비]를 부르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앨범에는 현재 인기 MC로 높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임성훈이 참여
했으며 임희숙, 송만수 등이 싱어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박인수는 이 음반
에서 [여보세요], 지금 들어도 신중현의 위대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기다리겠소(그 사람)]를 비롯해 [봄비]를 불렀다.
특히 덩키스(Donkeys)에서 노래를 불렀던 이정화의 곡을 리메이크한
[봄비]의 메가급 히트는 신중현 음악에 대한 일본의 높은 평가와 관심을
불러왔으며 그를 데려가기 위한 메이저 레코드사의 제의를 빗발치게 했다.
그룹과는 별개로 박인수는 과다한 밤무대 섭외를 견뎌내며 우울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목소리를 만천하에 알렸다.
한때 6개월 정도 피닉스라는 그룹에 몸담아 윤항기의 키 브라더스와 경합을
벌이며 [하드록] 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1976년까지 가수로서 전성기를
누리다 대마초 파동을 겪으며 활동에 제약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음악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밤무대와 지방 무대를 떠도는 생활을 해야 했으며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10여 년 후 그를 좋아하던 엄인호, 김현식을 비롯한 일군의 음악적
동반자들을 만나면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현식에게 소울
창법의 영향력을 강하게 미쳤던 그는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블루스 음악을
시도했던 신촌블루스의 1집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에 발매된 이 앨범에는 한영애가 불러 히트시킨 [그대 없는 거리]
와 정서용의 [아쉬움]이 들어 있으며 박인수는 히트된 이후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곡 [봄비]와 [나그네의 옛 이야기]를 불렀다.
그리고 다음해에 자신의 절창 실력을 유감없이 뽐낸 베스트 음반
[뭐라고 한마디해야 할텐데]를 프로듀서 김준의 도움으로 발표한다.
특히 초반 3곡인, 과거 자신과 인기 경쟁을 벌이던 연석원의 곡 [뭐라고
해야할텐데]와 [겨울 소나타], 그리고 퀘션스 시절 불렀던 [기다리겠소]
의 중후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는 우리를 경이로 몰고 간다.
하지만 앨범 발표 후 완벽한 활동에 대한 의욕은 갑자기 가사를 잊어
버리는 등 올라선 무대에서 제대로 노래를 소화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그 빛을 상실했으며 '90년 말부터는 완전히 활동을 정지한 채 서울 근교
에서 떠돌이처럼 지내야 했다.
그리고 다음해엔 급기야 저혈당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95년에는 대마초 사건으로 다시 70년대의 악몽을 재현했다.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던 그는 가수 출신인 윤항기 목사가 운영하던
선교원과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가 운영하는 카페 등에서 잠시 기거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주민등록조차 말소된 채 정봉인 목사가 인도하는 일산의
[행복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가 죽었다]라는 소문 아닌 소문을 듣고 있던 선,후배들은 뒤늦게
알려진 그의 소식에 2002년 7월 [리멤버 박인수 사랑의 콘서트]를 열고
과거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가수의 불행을 안타까워했다.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위원장 김광진)의 주최로 열린 이 콘서트에는
남궁옥분, 박강성, 박미경, 박상민, 박완규, 박진영, 최성수, 유열, 유익종,
윤시내, 이기찬, 이문세, 임희숙, 한영애 등의 후배들과 최희준, 남진,
채은옥, 개그맨 이홍렬 등이 참여해 팬들의 높은 호응을 얻어냈다.
또한 그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펄 시스터즈 자매는
300만원을 내놓는 등, 인원 초과로 참여할 수 없던 많은 선·후배 동료들도
대 선배의 쾌환을 빌며 각종 봉사로 자리를 빛냈다.
주최측은 이 날을 [박인수 데이], [소울 데이]로 지정해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후배 이경우는 손쉽게 사라져버린
그의 베스트 음반을 오아시스와 협의해 CD로 발매해냈다.
서울 백병원의 후원으로 그의 몸 안에서 꿈틀대던 췌장암과 가사를 자주
잊어버리게 만든 병인 저혈당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박인수는 현재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과거에 자신을 대변하던 [황색 소울의 귀재], [영혼을
노래하는 전설적인 가수], [불운의 천재 가수]란 호칭을 다시 잡기 위해
강한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고 한다. 큼큼~
▒▒▒ 봄 비 ▒▒▒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리네
▒ 박인수(백병종) 1947년生
첫댓글 애절하죠?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네~~~ 천당과 지옥 모든것을 다 경험해 봤구먼. 노래가락도 본인의 인생을 노래하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