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일제 36년 총정리 4/4
한일합방 후 1왕가(王家), 2공가(公家) 창설, 황족 대우 받아
글 배진영
정리 송산
⊙ 이왕가는 천황가 다음 가는 부자
⊙ 순종, 고종이 죽은 후 상복 입고 홍릉에 전화 걸어 ‘전화문상(問喪)’
⊙ 영친왕, “이토 공은 참으로 나를 성실히 보살펴주었다”
⊙ 덕혜옹주의 남편은 애꾸라거나 일본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 때문에 정신병 걸렸다는 얘기는 사실과 달라
⊙ 중국 망명 시도했던 의친왕과 규정 어기고 조선 여자와 결혼한 이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일제에 순응
덕혜옹주 - 영화와 현실의 차이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 소학교 시절부터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영화로 새삼 주목받게 된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 는 고종의 고명딸이다. 고종의 자녀들 가운데 성인이 된 사람은 순종,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 네 사람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과 복녕당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때 고종은 환갑이었다. 고종은 1914년에는 광화당 이씨와의 사이에서, 1915년에는 보현당 정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망국 후 노년의 나이에도 이렇게 왕성하게 자녀들을 생산한 것을 두고, 고종이 망국 후에 그만큼 안온한 현실을 즐기고 있었다는 증거로 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덕혜옹주’라고 하지만, 나라가 망한 후였기 때문에 그에게 공식적인 ‘옹주’ 호칭이 부여되지는 않았다. 그는 어려서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21년 소학교에 진학하면서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덕혜를 애지중지했던 고종은 그를 위해 1916년 4월 덕수궁 즉조당에 유치원을 짓게 했다.
하지만 망국의 군주는 자기 딸을 황적(皇籍)에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제는 고종이 딸을 얻은 사실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했다.
어느 날 데라우치가 고종에게 의례적인 알현을 하러 왔을 때, 고종은 슬그머니 데라우치를 유치원으로 안내했다. 무골(武骨)인 데라우치가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고종은 “이 아이가 바로 내가 말년에 은거하면서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는 내 딸”이라고 말했다.
데라우치는 덕수궁을 나선 후 “오늘은 내가 당했다”고 씁쓸해하면서도, 덕혜를 황적에 올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히노데소학교 시절, 덕혜는 일본 옷을 입고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영친왕 이은이 일본 황녀와 결혼하게 된 것을 본 고종은 덕혜는 조선 남자와 짝지어 주려 했다. 그는 시종 김황진과 의논했고, 그는 조카 김장한(金章漢)을 추천했다.
김장한의 동생이 후일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해 발 벗고 노력한 언론인 김을한이다. 영화 〈덕혜옹주〉에 등장하는 김장한은 김장한과 김을한, 그리고 일본 육사 출신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을 합성한 인물이라고 한다.
소 백작의 사랑노래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백작 소 다케유키는 쓰시마도주의 후예였다.
고종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덕혜옹주는 결국 19세가 되던 1931년 5월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소 백작은 조선에 신속(臣屬)했던 쓰시마 도주(島主)의 후예였다.
김명길은 《낙선재주변》에서 “결혼 후 소 백작은 혼자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머리가 툭 튀어나오고 살빛이 꺼무튀튀하니 상스러워 품위를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적었다. 소 백작이 나이 든 애꾸라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소 다케유키는 사시(斜視)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다. 도쿄제대 영문과를 나온 그는 시인이자 화가였고, 후일 대학교수로 영문학을 가르쳤다. 동료 교수나 제자, 지인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고 한다.
나이 든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덕혜옹주가 일본인과의 원치 않는 결혼, 결혼 후 남편의 학대 때문에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는 얘기가 꽤 있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방자의 회고에 의하면,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던 1930년경부터 덕혜옹주는 이미 불면증과 함께 몽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는 조발성치매(早發性癡呆)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때 이미 그는 일제하에서 억압받는 조선 민중들을 격려하거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는커녕, 자기 한 사람의 인생을 제대로 끌고나가기도 어려운 처지가 된 것이다.
이듬해 덕혜옹주의 증세가 다소 나아졌고, 결혼식도 치렀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사진을 보면, 소 백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소 백작 말살 사건’이라고 할까?
결혼 후 5개월쯤 지난 1931년 10월, 소 백작 부부가 쓰시마섬을 방문했다. 이때 덕혜옹주는 끊임없이 소리를 내어 웃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병적인 거동을 보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병이 재발한 것이다.
혼마 야스코(本馬恭子)는 《덕혜희(德惠姬)》에서 일찍 부모를 잃었고 도쿄 상류사회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소 다케유키가 덕혜의 병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결혼했고, “처음으로 덕혜의 증상을 보았을 때,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병든 아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당황해 하면서도, 소 다케유키는 아내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는 ‘사마시라-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손뼉치며 “마사에!” “마사에!”라고 외쳐
한국에서는 소 다케유키가 아내가 발병하자 바로 정신병원에 그를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혼마 야스코에 의하면, 덕혜옹주가 병원에 입원한 것은 1946년경이었다고 한다.
이때는 소 다케유키도 패전 후 화족제도의 폐지와 중과세(重課稅) 등으로 저택을 처분하는 등 어려울 때였다. 두 사람은 1955년 이혼했다. 두 사람의 딸 마사에는 그해 학교 선생과 결혼했지만, 이듬해 가출, 실종됐다. 그는 신경쇠약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으로 들어간 지 16년 후인 1962년 1월 1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배려로 귀국했다. 비행기가 도착하자 유모 변복동은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창덕궁의 상궁들, 운현궁의 친척들, 진명여고 동창들이 그를 맞이했지만,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서울대 병원에서 요양을 하다가 순종비 윤대비가 사망한 후인 1968년 낙선재로 들어갔다. 말년에 그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손뼉을 치며 “마사에!” “마사에!”라고 외치며 슬픈 표정을 짓곤 했다고 한다(김명길, 《낙선재주변》).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고단했던 이 세상을 떠났다.
운현궁의 상속자들 - 이희, 이준용, 이우
의친왕 이강 공 외에 또 하나의 공가가 있었다.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희(본명 이재면)의 가문이다.
동생이 국왕이 되면서 이재면은 도승지, 병조판서, 금위대장, 이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훈련대장 등 요직을 역임했고, 1894년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1910년 8월 22일 합병조약 체결을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을 때 황족 대표로 참석, 나라를 넘기는 데 동의했다. 나라가 망한 후에는 일제에 의해 이희 공에 봉해졌으며, 천황이 내려주는 은사 공채 83만원을 받았다.
1912년 9월 이희가 죽자 그 아들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이 뒤를 이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가장 총애했던 손자였다. 구한말 여러 차례 고종을 폐위하고 그를 옹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10년간 일본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구한말 내부협판, 주일공사, 육군 참장(參將·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반일적이었던 그는 오랜 일본 망명생활 동안 순치되었는지, 순종 즉위 후 귀국해서는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총재가 되어 조선에 일본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궁 건립을 추진했다. 이때 그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단군과 함께 한일 공동의 시조로 묘사하는 상량문을 작성했다. 합방과 함께 16만8000엔의 은사금을 받았다. 공가를 계승하면서 이름을 이준(李埈)으로 바꾸었다.
박영효 손녀와 결혼 강행한 이우
이우는 일본 궁내성 규정을 무시하고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 와의 결혼을 강행했다.
1917년 이준용이 아들이 없이 죽자 의친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李鍝·1912~ 1945)가 양자로 들어가 공가를 계승했다. 그는 아버지 의친왕을 빼닮은 미남자였다. 2003년 인터넷에서 ‘얼짱신드롬’이 일어났을 때, ‘원조(元祖) 얼짱’으로 꼽히기도 했다.
1922년 이우는 일본의 황족·귀족교육기관인 학습원에 입학했고, 육군유년학교를 나와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 1933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으며, 1938년에는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에 입학, 1941년 졸업했다.
이처럼 겉으로는 순탄한 출세 코스를 밟았지만, 그는 “나는 일본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다”고 말할 정도로 반일의식이 강했다. 그의 가정교사였던 가네코는 “당시 이우 공은 일본의 모든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러한 투철한 반일의식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영친왕 이은이나 덕혜옹주와 달리 일본 황족·화족(귀족)과 결혼하기를 거부하고, 한국 여인과 결혼을 강행한 것이다.
당시 조선 공족의 결혼은 1926년 제정된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에 따라 천황의 칙허를 얻도록 되어 있었다. 이우는 이를 무시하고 박영효(朴泳孝)의 손녀인 박찬주와 약혼을 해버렸다.
이왕직 장관 한창수와 일본 궁내성에서도 반대했지만, 일본 정계 요로에 지인이 많았던 박영효가 나서서 이를 무마시켰다. 결국 1935년 5월 이우는 박찬주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중국 전선에 출정했다가 1945년 6월 조선으로 돌아온 이우는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 옴을 느꼈다. 그는 언론인 김을한 등과 만나 시국에 대해 논의하면서, 일본으로의 전출 명령을 피해보려 노력했다. 일본 군부는 그런 그에게 선심(?)을 썼다.
조선과 가까운 히로시마로 발령을 낸 것이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출근길에 원폭을 맞은 이우는 다음날 새벽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33세, 계급은 육군 중좌였다.
그의 장례는 히로히토 천황이 항복방송을 한 지 5시간 후인 1945년 8월 15일 오후 5시 서울운동장에서 육군장(陸軍葬)으로 엄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