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김동원
진이,
그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게
나는 그대의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치겠네
노을로 번진 눈물을 치겠네
흔들리는 그 바람의 무늬를 치겠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피어 노는
저 비슬산 꽃의 한 생生 다 떨어지기 전,
진이,
그대는 침향무를 뜯게
나는 엉망진창 술에 취해
대견봉 그 둥근 달빛에 붓을 적셔
그대 치마폭 위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겠네
황진이
율문 형식은 모든 시의 바탕 자질이다. 그 속에서 시는 살아 있고, 살아 있으므로 더욱 완벽한 형식을 꿈꾼다. 이는 시의 본디 성격이 구속과 기율, 그리고 자기통제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모든 시 형식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전형을 지향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대개 정형시의 모습으로 수렴된다. 그런 관점에서 정형시는 시 형식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어느 나라건 오랜 역사를 가진 시는 예외 없이 정형의 틀을 갖추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정형시의 미학에는 그 민족의 기질과 습속은 물론, 그 언어의 호흡과 생리까지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 시문학사의 맥락에서 역사의 엄존성을 담지한 정형 미학의 실현은 시조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시조는 즈믄 해를 이어온 시이자, 이 땅 오늘의 시로 엄연하다. ― 박기섭「시조, 그 낯익고 낯선 풍경의 안과 밖」중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이다. 조선의 남성 위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그녀는 여성의 평등과 차이를 자각한 최초의 기녀였다. 그녀의 시는 사랑의 불길에 타오르는 절규가 들린다. 시편마다 체와體 용用을 무화시킨다. 정격을 치받아 파격이 된다. ‘빔’과 ‘창조’는 그녀 시가 추구한 율려이자 여백이다. 놀라운 비약과 함의로 시의 묘처를 얻었다. 그녀의 행간은 무위하다. 굳은 성리학 체제에 신선한 자유의 시풍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시대를 박차고 뚫고 나온 파천황이다. 하여, 나는 늘 황진이(黃眞伊, 조선 중기 1506~1567년 추정)의, 그 서늘한 비극적 시의 인식을 흠모하였다. 양반놈들의 가면을 벗겨내 치마 속에 휘잡아 들인, 그 희롱과 무희舞姬의 멋을 찬양하였다. 사랑의 불길에 휘감긴 그 열렬함에 매료되었다. 그녀가 6년간 계약 동거한 이사종과의 사랑을 읊은「동짓날 기나긴 밤」은, 조선 시조 미학의 절창이다.
冬至 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불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시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낸다는 언어 감각은 심플하다. ‘버혀’낸다는 그 언어의 재단 방식은 진이만의 독창적 예술이다. 그 긴 시간의 길이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외로움의 통로이다. 그녀 시의 행과 행 사이, 장章과 장章 사이엔 만단정회萬端情懷가 비친다. 그녀는 사물과 몸을 언제나 동일시 한다. 고독한 겨울밤을 봄날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너헛다가”, 임이 오시는 날 “구뷔구뷔” 펴겠다는 그 애틋함은, 왠지 서늘하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임의 부재를 예견한 것처럼, ‘접다’와 ‘펴다’의 반복은 애절하다. 진이의 시어는 바람의 언어다. 관능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가 보인다. 모호하나 잡히고, 외로우나 넘어선, 그 접接의 미학이 깊다. 그녀의 시는 아픈 멍울이 잡힌다. 이별 속에 잠깐 스쳐 간 사대부 놈들은, 모두 페르소나(가면)이다. 진이는 불혹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언대로 개성 어느 길가에 묻혔다. 훗날 임제(조선 1549 ~ 1587)가 평안도 평사(評事; 정6품의 무관)로 부임해 가는 길에, 그녀 무덤에 술잔을 올린다.
靑草 우거진 골에 자ᄂᆞᆫ다 누엇 ᄂᆞᆫ다
紅顔을 어듸 두고 白骨만 무쳣 ᄂᆞᆫ이
盞 잡고 勸ᄒᆞ 리 업스리 그를 슬허 ᄒᆞ노라
임제의 풍류가 없었다면, 조선의 멋은 참 초라할 뻔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는 생의 허무가 짙다. “자ᄂᆞᆫ다 누엇 ᄂᆞᆫ다” 고어의 의문형 어미는 리힐리즘의 극치다. 들풀 속에 묻힌 진이의 백골은 무상하다. “청초”와 “홍안”, “백골”의 색체 이미지는 비현실적이다. 임제는 부임에 도착하자마자 이 시를 지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사건은 성리학 체제의 허실虛失을 여실히 증거 한다.
나는 늘 진이에게 시의 빚을 느꼈다. 때가 되면 멋진 풍류로 그녀와 술상을 마주하고, 한바탕 신명을 풀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봄날 비슬산 대견봉(1,083m) 능선에서 30만 평의 진달래 분홍을 보자마자, 홀연히「황진이」에 접신 된다. 대견봉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그 진달래 꽃빛은, 진이의 치마폭 같았다. 그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고, 나는 그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쳤다. 노을 속에 번진 그 바람의 무늬를 쳤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 피어 노는” 꽃들이 다 떨어질 때까지, 비슬산 보름달 아래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엉망진창 술에 취해” 붓을 들고, 진이의 치마폭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고 싶었다. 시「황진이」는 훗날, 낭송가 이지희의 유니크한 목소리로 예술기획〈진진아트〉에서 영상시로 제작돼 유튜브에 올려졌다. 수천만 개의 꽃잎이 바람에 날려가는 장면은 압권이다. 가야금과 대금 국악에 맞춰, 이지희의 젖은 목소리는 흐드러진다. 꽃길과 능선 사이, 바람과 구름 사이, 황진이와 어우러져 노는 도포 차림의 그 풍류객의 부채춤은 멋지다.
어쩌면 현대시는 시각적 언어 예술을 벗어날 때, 새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시낭송은 청각 예술이다. 시가 시인의 오감을 통해 인간의 생로병사를 언어로 길어 올린 장르라면, 시낭송은 시낭송가의 목소리를 통해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소리 예술이다. 시는 원래 가락에 맞춘 노래여서 시와 낭송은 불가분의 관계다. 한 편의 시로 천 갈래의 시낭송이 가능하다. 각양각색 시낭송가의 목소리는 듣는 관객을 매료시킨다. 낭독(朗소리낼 랑, 讀읽을 독)이란 텍스트에 얽매여 전달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지만, 낭송(朗소리낼 랑, 誦욀 송)은 시 작품을 자기화하여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임무이며, 제2의 시 창작 행위이다. 시가 직관을 통해 영감을 포착한다면, 낭송은 소리 파동을 통해 청자에게 시를 감동 에너지로 전환한다. 즉, 시 속에 들어앉은 시인의 영혼을 불러내어 관객들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시낭송의 본질이다. 시가 문자 매체로 영원성 · 연속성을 띤다면, 시낭송은 음성 매체로 순간성 · 현장성을 띤다. 시의 의미 함축이 때때로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 때, 시낭송은 소리와 감정으로 그 의미를 풀어내어 쉽게 전달한다. 시인이 시 창작자라면, 시낭송가는 시 전파자이다. 시인과 시낭송가는 이란성 쌍둥이 역할로 새로운 시 문화 예술을 발전시킬 동반자다. 시낭송의 궁극적 목적은 시 작품 속 다채롭게 채색된 언어 감정을 관객들에게 직접 전달해, 관객으로 하여금 마음속 엉긴 상처를 현장에서 씻어주는 정화 작용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시가 있어도, 세상에 걸어 나와 사람과 소통하지 않으면 무덤 속 진주에 지나지 않는다. 영상 미학이야말로, 21세기 새로운 시 예술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문화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