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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교수 특강
요 근래 나는 서울대학교 박동규 교수를 직, 간접으로 볼 수 있는 몇 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12월 첫날 회사에서 그분을 초빙하여 특강을 들었으며 12월 10일 수요일 KBS 제1TV의 아침마당에서 얼굴을 보았고 그날 늦은 밤 역시 KBS 제1TV의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 양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 보고 들으니 게으름뱅이인 나도 그 양반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시인 박목월의 장남이다.
어떤 사람을 볼 때 늘 우리는 그 사람보다도 그의 가족이나 주변환경 등에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이의 내면보다는 겉모습에 더 눈길이 가고 Gossip에 더 귀기울이는 것 말이다.
박동규(1939. 1. 16~ ) 경북 월성군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졸
동대학원 석, 문학박사
동대학교 교수(1969. 4. 15~ )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추천.
문학 평론가. 토론토 대학 객원교수 역임.
월간 시전문지<심상>의 편집 고문. 해변 시인 학교 운영위원장.
E-mail Address: 3D3Ddkpark@snu.ac.kr">3Ddkpark@snu.ac.kr">3Ddkpark@snu.ac.kr">dkpark@snu.ac.kr
Tel: 02-880-6039
주요논문
한국 현대소설의 '성격'에 관한 소고 (1977)
한국 소설에 나타난 구조적 특성에 관한 연구 (1989)
50년대 이범선 소설의 인간형에 나타난 선의적 삶 연구 (1995)
주요저서
한국 현대소설의 성격 연구 (1981)
한국 전후 문제작품 분석 (1985)
전후 한국소설의 연구 (1996)
한국 현대 소설의 비평적 분석
별을 밟고 오는 영혼
당신이 고독 할 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주요경력
'심상' 발행인
◎특강 : 人生과 未來의 價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일과 삶 : 사회적 존재가치와 본질적 존재가치
일이란 그것을 통하여 서로가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이지 임금이 앞서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쓰지 않아야 할 말이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삶에 대한 자각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일을 통하여 잘 살고 성장하고 행복하다는 자각을 함으로써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한해에 돈을 벌어 어디에 썼느냐는 질문에서 내가 커가는 즐거움과 삶의 인식에 대한 출발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문학, 그것은 인간의 삶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대 입학하여 철학개론이라는 강의를 수강신청 하였는데 담당교수는 지금 국무총리(고 건)의 아버지인 고형곤(高亨坤-철학자) 박사였다. 매우 존경할 철학자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고형곤 이라는 철학자에 대해 조금 알고 넘어가도 누가 뭐라지 않으리라 믿는다.
廳松 高亨坤( 1906 ~ ) 한국의 철학자.
호는 청송(廳松). 전라북도 옥구(沃溝) 출신. 1933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철학박사 학위(서울대학교)를 받았다. 1938∼1944년에는 연희전문 철학과 교수, 1947∼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51∼1981년 학술원 회원으로 있으면서, 1955년 교환교수로 미국에 갔다가 돌아와 1959년에는 전북대학교 총장에 취임하고 한국철학회장직도 맡았다.
1963년 6대 국회의원(민중당)에 당선되어 잠시 정치에 관여했다가 1970년부터 동국대학교 역경원(譯經院) 심사위원을 지내면서 선(禪)에 대한 연구 등 저술에 전념하였다. 1981∼1988년에는 학술원 원로회원(철학)을 지내고, 학술원의 개편에 따라 1989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학술원 저작상을 받았다.
저서에 《철학개론》 《선(禪)의 존재적 구명》 《해동조계종(海東曹溪宗)의 연원(淵源)》 《선(禪)의 세계》 등과 수필집 《하늘과 땅과 인간》 등이 있다.
아무튼 그 분이 처음 개강하던 날 강의실에 오셔서 31명의 신입생에게 '信號燈 본적 있나? 생각해봐라.'하시고는 그후에 한번도 강의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한 학기를 다 보내고 학기말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종강을 하시며 '많이 생각해 봤나?'하시고는 시험을 친다고 하셨다.
며칠 뒤 기말 시험장에는 2장의 백지가 나눠지고 '신호등에 대하여 생각한 바를 써라'는 과제가 제시되었다. 본인은 그래도 시골이 고향이라 방학에 귀향하면 할머니께서 역참에 나오셔서 기다리는 모습을 그리며 겨우 1장을 채웠는데 그냥 흰 종이로 낸 녀석들도 많았다. 결과는 31명 전원이 F학점이었다.
강의를 같이 들었던 우리는 너나없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교수님께 사정해 보기로 하고 몇 명의 대표위원을 뽑아 2시간 반을 매달린 끝에 9월 1일 재시험을 보는 것으로 양해되었다. (-이 양반이 말하는 중에 '서울대 교수가 되려면 학점이 좋아야하는데 F학점이 있으면 말을 꺼낼 수도 없을 때였다' 라는 표현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입학할 때부터 교수를 꿈꿨던 것 같다.)
고등학교 6년 선배가 조교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5명이 팀을 이뤄 선배에게 만나줄 것을 요청하여 대학로 뒷골목에 있는 싼 과부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선배는 오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혼자서 소주 7병을 먹었는데 학생들은 다섯이서 겨우 두 병을 마셨다. 선배는 또 정종 한 병을 더 시켜 먹고 거의 시체가 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은 조바심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선배는 가려고 하면서 '마! 짜식들아 너그들 신호등 때문에 그라지.' 하면서 '빨간불이 켜지면 서고 파란불이 켜지면 가는 거야.'하며 가버렸다. 그렇다. 신호등이 있고 그것이 뜻하는 바를 인지한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결국 철학시험은 認識과 생각이라는 것을 공부하게 해 줬다는 일화이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의 생활, 삶, 가정으로 돌려보자.
어머니께서 1998년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한달 가까이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는 걸레처럼 헤진 내의를 입으셨다. 곁에 놓아둔 핸드백에는 아들이 미국 코네티컷 대학에 출강했다 돌아오는 길에 JFK공항에서 사다드린 반이 닳은 립스틱이 넣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옷이 이렇게 헤지도록 입고 계신 것을 아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모친은 일제시대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결혼하여 5남매를 두었는데 그분은 자식을 바라보는 것을 보람과 자랑으로 사는 삶을 인식의 체계로 갖고 있다고 본다. 곧 내 삶이 커가는 즐거움을 아는 것이 인식의 출발이다.
나는 아버지인 박목월이 운영하시던 잡지를 인수하여 8년간 무임금으로, 오히려 내 돈을 넣어가며 지켜왔는데 이는 나를 키워준 글쓰는 자리를 없애기 싫었던 것이 그 동기이다. 이 또한 인식의 틀이다.
-전망
요즘 학생 제자들이 취업이 되지 않아 걱정이다. 검사나 의사가 되려고 야단이다. 골고루 성장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편중되어 간다. 개인의 영역에서 아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은 사랑이다. 보람있는 일을 해서 벌어온 돈임을 말할 수 있는 가정이 필요하다. 근래 아이들이 해달라고 하는 모든 것을 해주는 부모는 아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20년동안 젓갈을 파는 장사를 하여 모은 돈을 장학기금으로 기부한 아주머니의 수기를 보았다. 나는 원효로 4가에서 50년을 살았다. 그 겨울의 한강 추위와 바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추위를 이기며 번 돈을 희사한 이유는 '배웠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공부하려는 다른 이라도 도와주어야지.'이다.
자연의 시간적 매듭과 인위적 시간의 삶은 괴리가 있다. 전망을 성취한 기쁨과 그 실패의 좌절이 따른다. 성취해 보고 싶은 가짓수의 다양함이 곧 풍요로움이다.
얼마전 금강산에서 시인회의가 있었는데 내가 단장으로 가게 되었다. 일반적이고 의례적인 이야기는 접어두고 그들과 인터뷰하던 것이 떠오른다. 30여명되는 젊은 그들은 황석영을 비롯하여 좌파성향 등에 대해 물었고 일반화된 말로 대답하였다. 그들의 질문 중 빠지지 않고 나오는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잘 살면 돼!'라고 대답했다. 오히려 내가 김소월의 시 '명사십리'(-금강산에서 40여리 떨어진 곳)에 다녀온 사람이 있는지 물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이는 삶의 선택에 여지를 못 갖는 전망이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입사 후 사람이 달라졌는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순진, 중학교 때의 정직, 고등학교 때의 열정, 그리고 대학교 때의 인간미,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들 詩를 읽지 않은 탓에 삶의 전망성이 숨어버렸다. 抒情詩는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통일성의 법칙이다.
바다를 예로 들어보면 '바다는 넓다.'는 시가 아니다. 일상의 삶의 무게가 실린 순수한 삶의 표현 '나는 바다이어라.'하면 시어가 된다. '나는 들꽃이어라'에서 소박한 내 삶을 느끼는 것이다. 노천명의 詩 사슴에서 '슬픈 짐승이여!'는 도시적 공간의 탄식이다.
최근 나는 분당 새도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꼬마녀석이 '아저씨는 몇 평이세요?'하고 묻습디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전망의 뿌리
어떤 家訓에 '남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있었다. 이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갈등 이는 唯物論의 단초이다. 아버지가 벌어온 100원과 주은 돈 100원은 가치에 있어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정치는 철학적으로 못사는 놈 잘살게 잘사는 놈 더 잘 살게 해야한다. 정치가는 못 가진 자의 편이 되어야하나 모든 것을 票로 환산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성장의 역사 또한 가족의 동질성 찾기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교수가 됩니까?'라는 질문을 무척 많이 듣는다. '나는 엄마에게 칭찬 받고 싶어서 교수가 되었다.'고 대답한다.
1950년 6월 서울이 함락되자 순진한 아버지는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어머니와 12살 된 나, 다섯 살 여동생, 젖먹이 넷째까지 다섯이 남아 원효로 4가에서 그 여름을 지내게 된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어려운 생활을 해나가는 시절이었다. 누군가 세검정에 가면 자두 밭이 있는데 그걸 받아다 팔면 돈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광화문 네거리에 신문지 깔아 놓고 자두장사를 하였다. 그걸 판 돈으로 남대문 시장에서 밤(栗)을 사와 동생에게 주면 오빠 등에 업혀 오도독 오도독 밤을 까먹는 소리가 그렇게 좋았더란다.
이런 서울 살림이 너무 어려워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하고 들로 산으로 힘든 길을 떠나 도착한 곳이 평택의 어떤 어촌이었다. 가마니로 남의 담벼락에 붙여 거적데기 움집을 짓고 바닷가에 나가 새우잡이를 하여 호박잎을 따다 죽을 쒀 먹으며 연명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벼락 주인네가 호박이 안 열린다고 호박잎을 따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살라고 하여 밤새 부둥켜안고 울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아끼던 미싱(재봉틀) 머리를 팔아 쌀 몇 됫박을 사서 짊어지고 외줄기 산길을 따라 귀경길에 올랐다. 외길이라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불구불 따라 가는데 왠 젊은 청년이 자기가 쌀자루를 대신 져준다고 하기에 고마워하며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길은 하나이니 어머니랑 동생들도 오려니 생각하고 그 청년을 부지런히 뒤쫓아갔다. 그런데 갈림길이 나오자 나는 여기서 식구를 기다려야 하니 자루를 내려달라 하였건만 그 청년은 험상궂게 윽박지르며 그냥 가버렸다. 나는 그 청년을 쫓아가면 가족과 헤어지게될 것이 뻔하여 어쩔 수 없이 빼앗기고 말았다.
억울하고 절망하여 얼마나 울었는데 한참 뒤 어머니가 오시더니 '아야, 쌀은 어디 있니?'라고 물어 여차 저차 하여 잃었다고 하였다. 어머니 또한 낙담하여 얼마를 우시다가 나를 감싸안으며 '내 아들이 똑똑하고 영리하여 엄마를 안 버렸네!'하셨다. 우리는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잠자리를 마련하였고 어머니는 어디선가 삶은 고구마를 얻어와서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자식 안 버린 엄마로 만들어주어 고맙다'고 하셨다.
바로 이러한 나의 어머니가 칭찬 받는 자식이 되겠다는 Motive를 나에게 주었고, 나를 교수로 만든 가장 큰 동인이다. 교수가 된 후에도 '엄마 나 잘 했지요.'라고 동의를 구했던 나이다.
-방법
우리는 과거와 달리 많은 문명의 이기를 활용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없어서는 안될 목숨과 같은 것이 되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으면 망한다. 그리고 경쟁력을 강조하는 경영을 하게된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고생하여 번 돈으로 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훌륭한 삶을 구경해야 바른 길을 찾는다. 영화관,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흥미 있는 게 뭔지 지적호기심을 자극해줘야 하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놈은 하고싶어 환장한 놈이다. 꿈을 심어줘야 하는데 실증적인 꿈이어야한다.
나는 수요일 아침 TV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 아침도 못 먹고 나가 울다만 온다. 동료 교수들도 문학선생이 뭐 하러 그곳에 나가느냐는 핀잔을 준다. 나는 사실 문학이라는 곳에서 훌륭한 삶의 세계를 많이 보았으나 그들을 보고 배우러 간다. 그들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세 가지이다.
*원망하지 않아요.
*부담 가지지 말아요.
*엄마라고 한번 불러 보고싶어.
아내는 내가 만든 얼굴로 산다. 마음의 소통이 곧 감각을 통한 정서적 소통으로 이어진다. 나의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여자 장로이셨다. 그는 어디서나 밖을 나가는 이가 있으면 등뒤에 십자가를 그려 주었다. 당신이 병원에 입원해 계셨어도 나에게 등을 대라고 하여 그려주셨다. 그러한 어머니기에 며느리도 여자 장로를 만드셨다.
결혼은 삶의 동지를 얻는 것이다. 공동적 삶의 목표를 성취하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삶의 동반성을 상실한데서 이혼이 만연하게 된다.
직장은 삶의 한 패이다. 의지하고 사는 즐거움, 이 얼마나 크고 귀중한가. 지식은 도구이지 지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다. '커피 한 잔 드세요. 속상한 것 없니?' 얼마나 정다운 말인가. 직장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따뜻한 터전입니다. 저는 36년을 서울대학교 한 곳에서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2004년 2월 정년퇴임을 합니다. 모든 것이 얼마나 귀한 것들인지! 서로들 사랑합시다.
첫댓글 나도 이교수의 글도 읽었고 박목월 시인도 참 존경한다 새삼 더 새롭고 존경스럽다 뿌리가 있다
다시한번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항상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건강하시고 즐거운 성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