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하고 고즈넉한 모습에 저절로 시조를 떠올리게 하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에 4월의 따스한 봄볕이 찾아들었다.
4월의 문턱, 조석으로 바람이 찬데도 모처럼 햇살이 따사롭다. 그걸 알고 가람선생의 채취가 서린 본채 안방 뒤 안을 감싼 대밭이 바람을 막아주고 구름은 저기서 서성인다. 햇볕이 힘주어 내리쬐는 사이 원수리의 봄은 생글생글 찾아 앞마당까지 왔다.
아담한 터, 고즈넉한 전경, 이정도의 집이라면 가람 선생에게 수려한 시조가 새어나오기 적절한 집이었다. 언젠가는 머물러 있고 싶은 집이 듯, 며느리 윤옥병 님 집 강아지 짖는 소리가 정겹다.
저만치 가람 선생의 동상이 반기지만 오래된 형상이 고적함을 더하는 듯했다.
우리말을 아끼고 문학을 사랑했던 가람. 익산 여산면 원수리 현대문학 발상지 생가는 고아한 인품을 묻어난 문자학이 풍기는 가람마을의 4월의 봄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나무 나무 서로가 염려스러운 세월
입구에서 창창한 탱자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어린 시절 집마다 담장 역할을 하던 탱자나무가 저리 홀로 있는 것은 드문 일 아닌가. 전북기념물 112호로 지정된 이 나무와 관련 기록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병기 선생의 고조부가 연산 병암리에서 여산면 삼수골로 이사하여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하고, 조부인 조흥에 의해 생가가 건립되었다고(1884년) 함으로 탱자나무 수령은 약 160~220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둘레가 60cm 총 높이는 5.2m이고, 지상 1.6m높이에서 6개의 가지로 나누어지고 다시 작은 가지가 동서쪽, 남북 쪽으로 뻗어진 원추형으로 수관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나무가 오가는 사람들을 다 참견하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기둥이 세월을 걸어오며 얼마나 지겨웠을까. 아마도 저 가시들을 무기삼아 버텨내고 여직 살고 있는 비결일 것이다. 한켠에서는 배롱나무가 겨울을 이겨냄을 안도하듯 홀가분하게 가지만 드리우고 서있는 건너에 산수유나무는 홀로 노랗게 웃으며 연못을 내려 보고있다.
누구나 머물고 싶은 집 수우재(守愚齊)
바로 곁에 아담한 모정이 정겹다. 한여름 부채질하며 정담을 나누며 시조를 읊을 가람선생이 상기된다. 사랑채로 가려진 집안이 답답할 때면 훤하게 뵈는 문수산을 보며 감미로운 시조를 읊조렸나보다.
그 모정에서 눈여길 것이 부족했던지 장방형으로 조선한 아담스런 연못엔 흔한 물고기도 없다. 곁에 심어두었던 배롱나무가 연못이 늙어감이 염려스러운지 가지마다 힘차게 뻗어 하늘을 바치고 있었다.
사랑채 입구 지키며 가람의 녹슬지 않는 시어들을 걸어둔 듯 동백나무발목 기세로 보아 수령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집안에 들어서자 조선 말기 선비 집안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는 선생의 옛 집은 소박했다.
사랑채는 아궁이 칸을 두었고 5량 같지만 자세히 보면 3량이었다. 헛기침이라도 하며 문을 열고 선생님이 나설 것 같았다. 그런데 가람선생은 사랑채에 기거를 했단다. 막내며느리 윤옥병 님은 “옛날에는 여자들이 안채에서 기거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넓지 않은 터에 초가지붕을 얹은 안채 사랑채 고방채가 옹기종기 있었고 6대를 이어온 터전이라고 한다. 이곳에 터를 잡은 이조흥은 집을 짓고 당호를 수우재(守愚齊)라 했다. 방 옆에 헛간을 들이고 문간을 텅 비었는데 사는 게 편리하게 했을 뿐 어떤 형식을 따르지 않아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들기에 맞춤한 검소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매혹적이다.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세월을 이기는 것은 없다더니만 겨울이라 그런지 더욱 을씨년스럽고 초라하기까지 한 모습이 애처로웠다.
엉성해진 지붕, 군데군데 기력을 잃어가는 벽들, 방문객들이 방안까지 들어가 기물을 파손해야 속이 시원했을까. 세월 골병 들어가고 있는 생가에도 관심이 아쉽지만 봄은 산자락 타고 내려올 것이다.
마지막 지킴이 며느리 윤옥병 님
집안을 참견하다 나서는 길에 마침 마실같다 돌아오시는 막내며느리 윤옥병 님이 힘겹게 올라온다. 그이는 전라북도 기념물6호로 등재돼있는 가람생가를 홀로 지키며 사시는 고향의 마지막 지킴이다. 적적하지 않으시냐고 묻자 자식들이 틈나는 데로 들러주어 괜찮다고 하신다.
21살에 선생님 막내아들과 결혼했다고 하신다. 결혼 후 선생님과 전주에 있으실 때 같이 살았고 서울에도 같이 있었지만 먼저 내려오셨단다.
“선생님은 서울이고 전주고 하시는 일이 바삐 돌아다니다 보니 식구들과 같이할 겨를이 없던 분 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선생님과의 일화나 성품 자식들에게 어떤 분이었는지 소개해 달라고 해도 수줍게 웃으며 별일 없다고 하시는 것이 천성적으로 말주변이 없으신 촌로이셨다.
“선생님은 3남2녀를 두었는데 둘째딸만 서울에 살아요. 벌써 80이 넘었으니…” 하시며 말끝을 흐리신다. 할머니도 행여 돌아가시면 어쩔까 한다고 하니 애써 미소만 지으신다.
겨울이라 그런지 집이 누추하게 관리가 안 되었다고 하자 해마다 지붕 작업을 하는데 올해는 어떤 일인지 아직까지 않고 있어 그마나 비가 많이 오지 않아 다행이지 걱정이란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즐긴 술(호산춘)
생전에 가람 선생은 자신에게 세 가지 복이 있다 하였는데, 첫째가 ‘술복’이라 했고, 글복과 제자복을 그 다음으로 꼽았다. 그 정도로 술을 좋아하셨다. 난(蘭)도 무척 좋아하셨단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셨어요. 지금같이 쉽게 술을 사다 마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만들다보니 약주였다. “집안에서 쭉 하던 것이라 거들다가 그냥 배웠어요.”
호산춘의 제조기법을 유일하게 전수 받은 이는 가람 선생의 막내며느리 윤옥병 님. 호산춘은 특별한 술이 아니었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제자나 친구들이 많이 찾아와 늘 준비해 놓아야 하는 보통의 음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까닭에 따로 배운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의 일을 거들면서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한다.
여산의 ‘호산춘’은 가람 이병기 선생 즐겨 마신 가문에서 전승되어 온 여산 지방 특산품으로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그냥 약주다. 호산춘은 조선시대 문헌인 '산림경제'에 “여산의 옛 이름이 호산(壺山)이어서 고장의 이름을 따 ‘호산춘’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 동쪽에 옛 이름을 증언하는 호산리가 있다고 한다.
“찹쌀을 주원료로 그냥 손짐작 눈짐작으로 담가서 고방채에 큰항아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두면 자연스레 숙성 발효되어 알맞은 술이었지요.”
그곳에서 석 달 열흘 동안 ‘토속 약주’와 윤 씨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시간과 유서 깊은 터의 땅기운을 제 몸 속으로 끌어들여야 ‘호산춘’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일까.
시집와서 숱하게 호산춘을 만들어 냈지만 정작 윤씨 자신은 술을 못한다.
근래 들어 한번 담글 일이 생기기는 했다. 호산춘을 지역특화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익산시가 윤씨에게 재현을 부탁한 것. 기억을 더듬어 6개월 만에 만들어 낸 윤 씨의 호산춘은 2000년 ‘제1회 익산 민속주 경연대회’에 출품되어 각광을 받았고 이제는 익산의 특산주가됐다.
오롯이 집을 지키는 무덤, 문학을 지키는 후학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좀 흘렀다. 내려오는 길에 초보행이라면 얼핏 생가만 들르고 갈 법도한데 가람선생의 묘가 뒤에 있어 들렀다. 선생의 묘 입구의 무덤 2기 주인을 묻자 둘째 아들과 며느리의 무덤이라고 하신다.
선생님의 묘소는 비석하나만으로도 인품을 보는듯했다. 그 흔한 큰 비석도 아닌 1m 남짓 한 작은 '가람선생묘'라고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익산의 자랑이자 민족시의 자랑으로 문인들에게는 선망이었던 이병기선생을 회고하며 가람생가를 둘러보는 사이 오후그림자가 하루를 서두른다. 한적하고 시들어가는 그의 생가가 문인의 한사람으로 씁쓸함이다. 시조문인들의 숙원인 가람선생의 문학관 건립을 맘속으로 재촉해본다.
최근에는 가람선생을 기리고자 여산 면민과 후학들이 설립한 가람 기념사업회가 여러 방편으로 활성화를 위해 열심이다. 가람 문학회 또한 동인지 편찬활동을 하고 있다. 그 들의 덕에 사람에게 더욱 가까이 가는 가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발길을 돌렸다.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가람이병기는?
국문학자이자 시조(時調) 작가(作家)인 이병기(李秉岐) 선생은 1891년 3월 5일 연안이씨(延安李氏) 아들로 태어났고 호를 가람(嘉藍)이라 하였다. 1913년 한성사범학교에서 주시경선생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었고 졸업 후 전주와 고향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이은상등과 시조의 현대적 혁신과 부활을 위한 신운동(新運動)을 전개하며 고전의 발굴 연구에 힘썼다. 또 청소년의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글과 말을 보존하는데 노력하였고 이로 인하여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에 연루(連累)되어 홍원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45년 광복(光復)이후 전북대학교(全北大學校) 등에서 국문학(國文學)교수하였고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가람문선(嘉藍文選)』,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등의 저서를 남기고 1968년 10월9일 고향 여산면 원수리 생가에서에서 숨을 거두었다. 슬하3남2녀를 두었으며 서울 사는 둘째 딸과 현제 생가를 지키는 막내며느리 윤옥병씨가 생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