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초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꽃이다.
지난번 감전 야생화 단지의 구절초를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밀양 삼문동 구절초를 보기 위하여 출동하였다. 대중교통으로 가는 방법은 구포역에서 무궁화호를 24분 타고 밀양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면 10분 만에 도착한다, 도착지는 밀양청소년수련관 또는 밀양문화체육회관.
구절초를 주제로 전북 정읍에서 대규모 축제도 열리는데 그걸 보러 정읍까지 가는 것은 무리고 부산에서 가까운 밀양에 대규모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구절초 군락지가 있어서 보러간 것이다.
구절초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10월말까지는 괜찮울것 같다.
밀양 구절초 군락지는 '밀양문화체육회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밀양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네비로 ‘밀양문화체육회관’을 검색하면 된다. 문화체육회관 주차장 바로 앞 송림 숲에 위치하고 있다. 주차비 없다.
구절초를 구경한후 근처에 있는 영남루도 구경하였다.
감국
가을이 되면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국화과 식물 중 노랗게 꽃을 피우는 두 녀석이 있는데 산국과 감국이다.
개량종 국화와는 달리 꽃의 크기도 작고, 들이나 강변, 또는 산기슭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기에 그다지 큰 관심들이 없이 보아 넘기는 국화과 꽃들인데 우리 선조들은 이 꽃들을 다양하게 이용을 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국과 감국을 같은 식물로 알고 있기도 하는데 둘은 엄연히 다른 식물이다.
먼저 자생지를 보면 산국은 하루 종일 햇볕이 드는 양지쪽에 자생을 한다.
감국은 오전이나 오후에만 햇볕이 들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늘이 지는 곳
그러니까 반음지에서 자란다.
꽃의 크기도 차이가 나는데 따로 놓고 보면 그 꽃이 그 꽃 같아 보이지만 산국은 감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꽃의 크기가 작다.
감국 꽃의 크기가 50원 짜리 동전 크기만 하다면 간국은 1원짜리 동전 크기만 하다.
또 산국은 꽃을 피우는 대 하나에 가지를 많이 벌리고 가지 끝에 수많은 꽃을 매 달고 감국은 꽃대 하나에 몇 송이 안 달린다.
사진의 꽃은 감국이 틀림 없는 것 같다.
국화
국화
영남루(嶺南樓)
영남루(嶺南樓)는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누각으로 구 객사(舊客舍)의 부속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에 다시 지어진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다.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영남루(嶺南樓)
영남루 편액을 보면 7세 아이가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계묘초하한이현석칠세서(癸卯初夏澣李玄石七歲書)라는 글귀다.
‘1843년 초여름 이현석(李玄石)이 7세 때 쓰다’라는 내용이다.
우측 강좌웅부(江左雄府)
‘낙동강 좌측의 아름다운 고을’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글씨다.
죄측 교남명루(嶠南名樓)
‘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
예전에는 문경새재 이남의 영남지방을 교남이라 불렀다.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글씨다.
밀양아리랑 노래비
영남루 입구에
밀양아리랑 노래비가 있다.
노래도 흘러 나온다는데 이 날은 조용했다..
노래비를 보면서 흥얼흥얼 밀양아리랑을 따라 불러 보았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 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영남루 구경을 마치고 입구에 있는 '박시춘' 생가를 둘러 보았다.
초가집 단칸방 만이 남아 있었다.
1913년 태어난 '박시춘'은 일제 강점기에 조국이 부서짐을 그는 견딜 수가 없어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망국의 설움을 작곡으로 달랬다.
열사는 아니라도 술이 취해서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작곡을 한 것이다.
광복과 6.25 전쟁 등 요동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민초들의 서러움을 안위하기 위해 수 많은 곡을 남겼다.
그가 세상에서 명성을 얻게 된 곡이 1937년 발표된 '애수의 소야곡'이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그는 1936년 창씨개명 등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속에서 사랑으로 조국을 치환하여 노래했다.
해방을 맞은 '박시춘'선생은 국민의 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해 밝은 리듬을 찾아 민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라의 달밤’, ‘비내리는 고모령,’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럭키서울’ 등이 그것이다'.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
사랑의 힘
한 여인이 집 밖으로 나와 정원 앞에 앉아 있는 3명의 노인을 보고 말했다.
"저희 집에 들어 오셔서 차 한잔 하시지요?"
노인들이 대답하길 "우리는 함께 집으로 들어 가지 않는다".
"왜죠?"
"내 이름은 부(富)이고 저 친구의 이름은 성공(成功)이고 또 다른 친구의 이름은 사랑(Love)입니다.
집에 들어 가셔서 남편과 상의하세요.
우리 셋중에 누가 당신의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지를..."
부인은 집에 들어가 그들이 한 말을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그녀의 남편은 매우 즐거워했다.
"우리 부(富)를 초대합시다.
그를 안으로 들게해 우리 집을 부로 가득 채웁시다."
부인은 동의하지 않았다.
"여보! 왜 성공(成功)을 초대하지 않으세요?"
조용했던 가정이 금방 싸움이 날 지경이었다.
며느리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사랑을 초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싸우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잖아요"
부인이 밖으로 나가 세 노인에게 물었다.
"어느 분이 사랑이세요?
저희 집으로 드시지요"
사랑이 일어나 집안으로 걸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두 사람(부와 성공)도 일어나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놀라서 부와 성공에게 물었다.
"저는 단지 사랑 만을 초대했는데요.
두 분은 왜 따라 들어 오시죠?"
두 노인이 같이 대답했다.
"만일 당신이 부 또는 성공을 초대했다면,우리 중 다른 두 사람은 밖에 그냥 있었을거예요.
그러나 당신은 '사랑'을 초대했고 사랑이 가는 어느 곳에나 우리 부와 성공은 그 사랑을 따르지요."
사랑이 있는 곳 ...
어디에도 또한 부와 성공이 있지요.
사랑 없는 부와 성공은 늘 외롭고 슬플 것입니다.
가난하여도 서로가 감싸주고 보듬어 주는 그런 사랑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전해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