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사에서 가끔씩 듣는 이야기 중에 원앙같이 살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원앙처럼 살면 다음해에 가정은 깨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원앙은 1년마다 한번씩 새로운 짝을 찾아 짝짓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앙목각인형을 빨리 치우세요.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탕자 이야기인데 탕자에 집중하다 보니 아버지 쪽에서 깨닫는 부분을 놓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아들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맞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탕자 이야기를 돌 탕 이야기라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식당에 가면 종업원들이 주문을 받은데 ‘뭘 드시겠습니까?’그러면 ‘돌 솥밥요’라고 했을 때 종업원들이 기록하면서 돌 하나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곰탕이면 곰하나 이러지요. 그렇게 혼자말로 중얼거리면 이해하겠는데 주문한 음식이 나왔을 때 손님에게 와서는 ‘돌이죠’‘곰이죠’이런 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너무 돌 탕에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듣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했고 죽으셔야만 했고 부활하셨는가를 알게 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시작은 아들의 요청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먼저 아들이 자기의 몫인 분깃을 달라고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할당된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탕자의 비유에서 알아야할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그 당시의 문화와 삶의 자리를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문화로서는 그리고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이런 요청이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모든 재산의 주권은 아버지께 있습니다. 이 재산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러줄 때는 두 가지 조건이 있을 때입니다. 하나는 병들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때 또 하나는 늙어서 죽음을 맞이할 때입니다. 이를 때 재산을 상속하게 되어있습니다.
죽기 전에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상속을 해 달라는 소리는 ‘아버지께서 지금 죽으십시오. ’하는 소리와 똑 같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버지가 늙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두 아들 모두 장가를 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장년층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재산 상속을 요구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허락을 하십니다. 그 문화와 윤리와 상관없이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고 맙니다. 여기서 아들의 요청과 아버지의 응답 사이에 잔잔한 침묵이 흐릅니다. 이 침묵은 어떻게 아버지가 이럴 수 있을까? 무기력한 아버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초라하고 힘없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없는 전능자가 여기에 계시다’전지 전능한 아버지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무기력할 수 있습니까?
막내라서, 아들고집을 꺾을 힘이 없어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지금 막내인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첫째아들도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21절을 봅시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9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여기서 차이는 무엇입니까? ‘둘째아들은 은혜의 상징이요 첫째아들은 율법적인 상징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아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자이고 첫째아들은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완악함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의 시작은 ‘아버지여’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부르는 행위인데 아버지를 부른다는 말은 아버지를 인정하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여자여 그랬습니다. 어찌 감히 어머니께 여자여 그러느냐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속에 어머니를 인정하고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29절을 보면 ‘아버지께’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고 무시한다는 뜻입니다. 아하수에르왕이 왕비 와스디를 부르는데 왕비가 거절을 합니다. 부르는데 거절하는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왕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큰 아들의 행위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진 행동입니다. 유대법으로는 이런 사람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데리고 와서 돌로 쳐서 응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 앞에 무기력한 아버지를 봅니다. 자식의 말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위엄과 권세는 다 사라지고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버지의 사랑이 없이 율법과 기준만 있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감히 하나님 존전에 나와서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 존전에 나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용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무기력이 아닙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에 있어서는 무기력하게 보일 정도로 오래 참으십니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요 열심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임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셨기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기회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허물과 죄를 심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찬양하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를 얻고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31절을 봅시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이 말씀 아닙니까?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얘’라는 단어에 큰 은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얘’라는 것은 아이야! 아가야! 내 아들아! 그러니까 아주 다정하게 사랑으로 귀한 내 자식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무시하고 관계를 끊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은 아버지의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이런 부름이 있습니다. 죄에서 허덕이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으면서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낙심하고 좌절해 지쳐 있는 우리를 향해 ‘얘야! 내 아들아! ’이 부르심에 혹시 우리가 마음이 굳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우리는 말씀에 떠나있어도 아버지는 자녀삼은 우리의 관계를 절대로 끊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번 봅시다.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장면입니다. 20절 말씀을 볼까요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여기서 추적해야할 단어가 바로 ‘달려가’입니다. 여기서 ‘ 달려가’의 단어 상으로 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으면 달라갔을까? 하는 어감으로 느껴집니다 만은 그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중동은 뛰는 것을 금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는데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날씨가 더운 지방이라 일단 뛰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중동지방의 사람들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투피스를 입고 있다면 뛰기가 쉽겠지만 원피스를 입고 뛴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원피스를 입고 뛰려면 옷을 걷어 올려야하는데 중동지방에서는 속살이 드러나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지금도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배꼽 티도 중동을 뚫지 못했습니다.
뛸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은 땅을 거룩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뛰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의 문화 속에서는 한 아이가 잘못하면 한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문제로 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다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마을 공동체에서 그 아이를 대학까지 보냅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 유대인들이 장사를 하다가 부도가 낫습니다. 그러면 장사가 잘 될 때까지 자금을 대어 줍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은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삶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본문을 본다면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받아 타국으로 떠났다는 이 사건은 탕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네 공동체의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동네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를 욕보였다 하면 끌어내어 돌로 쳐 죽입니다. 지금 탕자는 돌아왔지만 그는 분명히 불효자요 아버지를 모욕한 방탕자였습니다. 아버지에게만 수치를 준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까지 수치를 안기고 떠난 자입니다. 그가 돌아온 것을 동네 청년이나 사람들이 보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가 돌아오면 공동체에서는 그를 끌어다가 돌로 치고 발길로 걷어차고 침을 뱉고 하는 심판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이 싫었습니다. 분명히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알면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돌을 던지고 발길로 걷어차고 침을 뱉고 할 터인데 이것을 안 아버지가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 앉으므로 동네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던지지 못하도록 하기위해서 였습니다. 아버지가 용서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돌을 던지면 아버지가 맞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침 뱉음을 당하고 걷어차이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수모와 모욕과 수치를 아버지가 다 받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을 덮어시기까지 열심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손수 인간의 형체를 가지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과 침과 조소와 수치를 다 맞으시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가 당하시는 것을 못 견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하는 모진 심판을 두 눈 떠 고 볼 수 없어서 당신이 직접 당하신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 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여기서 ‘권한대’라는 헬라어의 의미는 ‘사정하다’‘빌다’ ‘구걸하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큰 아들이 기분 나빠서 잔치에 안 들어가겠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큰 아들을 잔치에 참여 시키려고 빌고 사정하고 구걸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아버지가 무엇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빌고 사정하고 구걸하다 시피 해서 우리를 생명의 잔치에 참여시키기 위해 애쓰시며 기도하신 것을 아십니까?
다른 종교는 사람이 신에게 사정하고 빌고 구걸해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빌고 사정하고 구걸해서 우리를 천국 잔치에 참여 시키려는 그 사랑을 깨달으시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할 의무조차 없으신 분이신데 왜 이렇게 하셔합니까? 그것이 은혜입니다. 두 눈 뜨고 그것은 못 본다는 말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탕자의 비유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빌고 구걸하고 사정하는 모습입니다. 제발 내가 너희의 죄를 지고 심판을 받을 테이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천국잔치에 참여하라는 호소를 십자가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못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평생 잔치에 참여시키기 위한 열심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조롱을 당하고 수치를 당해도 이 일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잔치에 참여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열정을 깨닫고 순종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16절을 보면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주는 자가 없는지라’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세상이 무엇인가 줄 것 같습니다. 명예가 희망인줄 알고 일평생 몸 바쳐 명예를 얻었는데 그 명예가 얼마 안가서 사라지고 보니 주위의 사람들이 다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중소기업의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에 성공을 했습니다. 엄청난 부를 축척했는데 하나 잃어버린 것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건강입니다. 그가 당뇨에다가 합병증까지 얻어서 의사가 하는 말이 살려면 풀죽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요즘 아무리 못 살아도 풀죽은 안 먹습니다. 가진 것 많으면 뭐 합니까? 우리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까? 영혼의 안식을 주지 않습니다. 인생의 결과는 세상의 결과는 허무하고 공허함뿐입니다. ‘아무도 주는 자가 없느니라.’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옷을 입혀라, 주린 배를 채워라, 가락지를 끼워라’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최고이며 최상입니다. ‘발에 신을 신겨라’그랬습니다. 왜 신을 신겨라고 했습니까? 둘째아들은 종이 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아들로 맞아줄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품꾼이라도 받아주기를 바라면서 온 것입니다. 이것을 아버지가 이미 아시고 신을 신겨라고 합니다. 왜 신을 신겨라합니까? 너는 종이 아니다, 너는 노예가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야! 하는 뜻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는 뜻은 너는 네 상속자야!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줄 영광된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며 누리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는 다르단 말입니다. 왜요? 하늘나라에 갈 자로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졸업을 하면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초청장이 와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같이 공부는 하지만 그는 이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미국으로 유학갈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들 부러워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일까요? 여자분들은 가락지라고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살찐 송아지, 이렇게 대답을 하지 않을까 생각이 더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선물은 아들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캐묻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은 용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을 그렇게도 고집을 부립니다.
미국의 서부에서 있었든 일입니다. 어느 청년이 카드놀음을 하다가 그만 흥분을 해서 총으로 상대방을 쏘아 죽었습니다. 경찰에 의해 체포된 그는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인데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를 그냥 죽인다는 것은 너무 인생이 불쌍하다고 해서 탄원서를 주지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이 주지사가 탄원서를 읽어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 한 번 더 기회를 주자’하는 마음을 다지고 사면장을 쓰서 주머니에 넣고 성직자의 복장을 하고 그 청년을 면회하려 갑니다. 청년이 성직자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주지사를 보자마자 ‘꺼져버려, 꺼지란 말이야!’주지사는 조용하고도 침착하게 ‘청년 내 말을 한번 들어보게’그러는데도 아란 곳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꺼져버려 당신네의 도움은 필요 없어 꺼져!’주지사는 아무리 달레보고 같이 말을 붙이려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나 분노가 가라 않았을 때 간수가 그 청년에게 와서는 이렇게 야단을 칩니다. ‘이 사람아 자네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지금 찾아오신 분이 누구신지 아는가? 그 분이 바로 주지사인데 자네를 사면시키려고 온 것 일세’ 이 말을 듣고 땅바닥을 치며 간수에게 다시 한번 주지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만은 주지사의 발걸음을 돌려 놓치 못했습니다. 그가 사형을 당하기 전날에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내가 사형을 당하는 것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는데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셨습니다. 당신들을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하는 이 진리를 외쳐야합니다.
29절에서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누가 가장 싫어했겠습니까? 첫째 아들입니까? 아닙니다. 살찐 송아지입니다. 그러면 큰 아들이 나를 위해 ‘염소새끼라도’잡아 주었습니까? 라고 반문 할 때 염소새끼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큰 아들이 잔치에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자신을 염소새끼로 축소만 하고 있습니다. 자가가 받을 복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에게 나타날 영광이 얼마나 많은데 하찮은 염소새끼와 비교하고 있냔 말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자식인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들입니다. 두고 보아도 아까울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제물로 받쳐 우리를 사랑한 존재입니다.
왜 우리는 부자처럼 하늘나라의 자녀처럼 살지 못합니까? 봄은 우리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오는 것인데 왜 우리가 봄에 겨울처럼 삽니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하늘나라 영광의 복이 있는데 지옥처럼 사느냐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자답게 삽시다. 하나님은 첫째 아들이나 둘째아들 모두를 품고 깨우치며 가르치며 감동을 주시며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내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자녀를 품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감동이 있기에 우리가 장래를 알지 못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를 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시니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큰 아들이 돌아왔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하는 말입니다. 큰 아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지금도 큰 아들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품에 돌아와 앉기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완성시킬 사람들이 우리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주님의 가르쳐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아고 이 비유를 완성시켜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