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역정
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 행복은 잠깐 정확히 11년 8개월 만에 모든 것
을 잃고 말았다.
아버지도 재산도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도,
갑자기 변해버린 극과 극의 생활, 나는 견딜 수 없을 만
큼 혼란 스러웠다.
37세에 홀로 되신 시름에 찬 어머니의 모습,
장례를 치루고 나니 쌀 두되, 보리 쌀 두되가 전부이고,
살아야 할 집 마져도 비워주고 이사를 가야만 할 형편,
그런데 아직 까지도 현실을 알지못하고 있는 형제 들,
어머니가 개가 하시게 되면 우리는 모두 고아나 다름없
는 현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었다.
그리고 행복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듯 나는 어머니의 눈 빛과 표정만 보
며 행동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어머니가 우리를 두고 떠나실까 봐,
이 넓고넓은 세상 부모없는 고아가 될까 봐,
그나마도 행복의 끝 자락에서 마지막 남은 그 끈 마져
끊어져서 놓치게 될까 봐.
어머니에게 칭찬 받을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빨래, 집 청소, 밥 짓는 일, 그리고 말 씀씀이 부터 행동
까지 고쳤다.
나에겐 너무나 힘든 과정 이었다.
그러던 국민학교 6학년 개학 한지 며칠 안되는 어느 날,
나는 칠판의 글씨를 볼 수 없을 만큼 시력을 잃었다.
물론 쓰러지고 난 뒤 였다.
깨어나 보니 눈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적, 육체적, 과로에 얼마나 굶었는지, 밥이라는 것
은 아득히 아주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산위에 올라가서 찔레 나무 순과,
칡순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그래도 배가 고프면 소나
무 껍질과 솔 잎으로 허기진 몸과 마음을 달랬다.
그 와중에 다가온 병마에 나는 하루 하루 무너지기 시
작했다.
너무나 아팠다.죽고 싶도록 아팠다.
그러나 나를 살려 줄 사람도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하늘을 보며 울었다.
눈이퉁퉁 붓도록 울었다.
목이 쉬도록 소리치며 울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좋고 밥을 굶어도 고아가 되어도
좋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를 살려 달라고 울고 또
울며 매달렸다.
그 때 배고픈 것이 한이 되었는데도 나는 그 후에도 내
가 굶으면 굶었지 남의 문전에서 동냥 그릇을 들고 있는
거렁뱅이 들을 지나 치지 못하고 도시락을 비워주고 점
심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물 한그릇 마시고 창고에
가서 염불을 하면서 염불 삼매에 빠지곤 했었다.
배 고픈 사람은 나 하나면 족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배다른 형의 폭력 친척들의 외면....
나는 국민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다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출근 할 때마다 팔뚝에다 한문을 3자
씩 써 가지고 가서 쉬는 시간이 되면 나무 막대기로 땅
바닥에다 글을 쓰면서 한문을 외웠고 학교서 배운 한글
도 잊어 버릴까봐 그렇게 연습하여 학습하다가 혹시 새
볼펜이나 깨끗한 종이라도 생기면 그것은 보물 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직하며 종이가 새까맣게 더 쓸곳이 없어
야 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에 간다는 목사님 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 하면서 그 해답
을 얻지 못하고 교회를 그만 둔 뒤 친구를 따라서 천주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일주일 후면 영세를 받는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던 어
느 날,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게 되고 기운을 차려서 일어
나 보니 영세를 받아야 할 날짜가 훌쩍 지나 버렸다.
나는 조용히 혼자서 며칠 동안을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 후 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염불
과 행선으로 24시간을 보내다 시피 했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염불. 잠을 잘 때도 잠들기 전
에는 염불을 계속 하고 힘이 들 땐 혼자서 명상을 했다.
그렇게 2년을 했을 때 이상한 세계를 접하기 시작 했다.
18살인그때 부터 부처님의 원력으로 세상 사람들이 상
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기행을 하면서 어머니의 간곡
한 부탁으로 26살에 결혼과 함께 사회 생활을 병행하며
지냈다.
3차원 세계를 보고, 하늘에 가득 찬 시를 보며 시를 짓고,
병든사람을 치료하고, 앞일을 예지하는 가운데, 나의 일
생을 예지하는 꿈 속의 현몽 후 27살 어느날,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 미륵 부처님에게 꿈 속에서 수
계를 받게 되고, 29살 여름 관세음 보살님에게 일주일 동
안 칠천 배 기도 후 관세음 보살님을 친견하여 복지에 대
한 당부의 말씀을 들은 후 31살 때 꿈 속에서 처음으로
~그리운 친구~ 라는곡을 받게되었다.
그 후 부터 생시에 현실적으로 어떠한 일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상황이 화두가 되어 작사, 작곡이라는 게시를 받
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곡들을 부르기 시작했고, 음악에 대해
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나는 악보를 그리지 못하
여 애태우며 지내 던 7년 후 어느날,
직장에서 점심 시간에 우연히 무아지경에서 악보를 그
리게 되고 그 것을 경북대학교 김화조 교수님과, 성악 작
곡가 이안삼 교수님, 음대 출신 통도사 시명스님께 악보
를 보이고 인가를 받은 뒤, 그 때부터 자유롭게 악보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45세 되든 해 출가를 하기 위하여 아내 모르게 여기 저
기 알아 보았지만 나는 출가를 할 수 있는 자격 미달 자
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규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학벌이
없어도 안되고 또 한 나이가 많아도 안된다.
정말 한심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와 아이들의 도움으로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한국불교 금강선원에서 나의 출가를 허
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출가한 지금 까지 곡을 만
들어 심향1,2,3,집을 트로트 부터 디스코, 룸바, 스윙, 민
요, 왈츠, 고고, 슬로우 록, 등 모든 장르의 곡으로 계몽적
인 대중가요와 찬불가를 제작 발표했고 한국음악 저작권
협회 등록과 KBS, MBC, SBS, 교통방송, 불교방송, 가톨
릭 평화방송 원음방송 등에 심의를 거쳐 접수 하였으며,
지금은 청소년 들이 좋아 할 랩과 디스코 발라드를 편곡
하여 4집 녹음을 끝내고 마지막 마스터 링 작업중에 있다.
나의 꿈은 복지 사찰과 불교 포교의 대중화다.
정말 가슴아픈 일이지만 나는 모 사찰의 부전 생활을 할
때 KBS 1 TV 저녁 9시뉴스에 나에 대하여 뉴스가 나간적
이 있다.
그일로 해서 나는 그 절에서 내침을 받게 되었지만 몇몇
도반외에는그 누구도 내가 음악을 하는것을 이해 해 주는
스님은 없었다.
심지어는 연세드신 많은 불자님들도 그랬었다.
우리 불교는 그만 큼 보수적이고 대중적이지를 못하다.
아무리 그러한 일이 반복된다고 해도 앞으로 우리 불교
를 위해서 또 열린 포교의 장을 열기 위해서라도 나는 절
대로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부터 나는 강북구 미아동에 13평짜리 조그만 토
굴을 마련하여 부처님을 모시고 그 누구의 관습도 받지
않고 비록 초라 하지만 음향장치를 마련하여 자유롭게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모이시는 종로 종묘국악정과. 대
중들이 많이 다니는 곳, 인사동 야외무대,
그리고 지하철공연, 교도소, 양로원, 산사음악회등 나를
부르는 곳이면 큰 행사 작은 행사 가리지 않고 순서대로
다니면서 열린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모든 방송국과 많은 언론보도의 도움으로
많은 불자님들이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으므로 더욱
더 힘이 난다.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은 앞으로도 음반작업은 계속 할 것
이며 복지 사찰건립이 빨리 이루어 졌으면 한다.
관세음 보살님과의 약속데로 1사찰 1복지실현의 첫발을
내 딛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자님과 뜻 있는 분들의 많은 동
참이 필요하다.
직업은 막노동 도로포장 건축등, 식당종업원, 연탄공장
막노동과 배달, 해태제과 대리점과 연탄공장, 한국오동
상자 공업사경리, 치과기공 잠깐, 공장생활, 목수, 포교
활동, 자동차 정비공장, 금속도장 2급 자격증 소지
울 밑에핀 봉선화가 그립습니다. 작사,작곡,노래, 능인
첫댓글 많은 불자님들의 동참을 발원 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