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은 불고기 뷔페였다.
초밥과 소바(そば), 과일 등 음식은 다채로운 편이었다.
불고기를 쌈장이랑 채소를 곁들이는 우리네 식사와 달랐다.
일본식 불고기는 따로 소스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간장맛이 강했지만 달콤한 맛을 내는 무언가가 가미된 맛이었다.
<구마모토(熊本) 성 입구>
구마모토 성은 번주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주 목적으로 지었다.
은행나무 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성내에 심은 은행나무 때문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 때 성내에서 포위당한 일이 있다.
그 당시 굶주렸던 기억이 은행나무를 심게 한 이유였다.
만에 하나 또 다시 전쟁이 농성으로 이어질 경우 은행열매를 식량으로 먹기 위함이었다.
결국 울산성 전투 때 얻은 교훈이 이 성의 별칭이 되었다니
울산문인의 한 사람으로 방문하는 감회가 남달랐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성의 모습>
구마모토 성이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는 것은
천수(天守)각을 떠받치고 있는 석벽 때문이다.
석벽은 언뜻 보기에 흐름이 완만하고 부드럽다.
누구라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나
어떤 무사도 오를 수 없도록 석축을 휘게 만든 것이 가토 기요마사의 건축기법이다.
처음은 부드러워서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지만 8부 쯤에서부터는
수직으로 되어 있어 성을 공격하던 적군들은 모두 굴러떨어지고 만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처럼 뛰어난 기술을 갖게 된 것은
진주성 공략 때 얻은 힌트 덕분이었다고 하니 자부심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가토 기요마사의 초상>
가토 기요마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최측근 무사였다.
그는 치수, 축성, 무역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쌓은 사람이다.
임란 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을 침략했으나
울산성에 갇혀서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기억을 교훈 삼아 구마모토 성내에는 120여개의 우물을 팠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의 모형>
성의 모형은 천수각 안에 만들어 놓았다.
대천수와 소천수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는 모형이다.
정교한 맛은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색상을 나무의 색채대로 남겨 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천수각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성문 앞 광장>
내부는 성의 역사나 번주에 관한 자료들을 보관하는 박물관으로 관람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특히 6층은 전망대로 시내 전경을 사방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계단이 가파르거나 유난히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5월 2일의 날씨가 더운 까닭에 6층까지 오르니 땀이 흘렀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전경이
신록을 두르고 있어 시원해졌다.
<천수각 앞에서 자라는 은행나무>
구마모토 성의 대표적인 은행나무다.
이 나무의 키가 천수각의 지붕을 넘으면 성에 대재앙이 일어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1607년 성이 완공된 지 270년 후인 1877년에 딱 한 번
은행나무가 천수각의 지붕을 넘었다고 한다.
그해 일본의 귀족들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유명한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이었다.
<대천수와 은행나무>
세이난 전쟁 때 천수각과 함께 은행나무도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뿌리만 남았던 은행나무는
그로부터 130여년이 흐르는 동안 저만큼이나 자랐다.
그 키가 언제 또 천수각의 지붕을 넘을지 은근히 기대되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은행나무와 대천수, 소천수>
사진상으로는 은행나무의 키가 천수각을 넘겼다.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은근히 기다리는 심보가 어설픈 사진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진으로라도 그들의 재앙 속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침략 당시 그들의 악행을 실감할 수 없음에도
피해국가의 국민이 갖는 열등감인 것만 같아 민망하기도 하다.
<구마모토 성 축성 400년제 현수막>
엄격히 따지면 구마모토 성 축성 400주년은 지난 해였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기간이 그들의 축제기간과 맞물리게 되었다.
다행히 지혜로운 가이드의 안내로
여행도중에 축제 행렬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다른 나라의 축제 행렬을 만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정해진 일정이 있었으므로 길이 막힐까 염려스러운 마음은 기우(杞憂)가 되었다.
다행이었다.
<해자>
구마모토 성의 규모에 걸맞은 해자였다.
현재는 비가 많이 내리는 철이 아니어서 해자의 대부분은 물이 말라 있었다.
저렇게 넓게 파 놓은 해자를 건너는 동안 성에서는 얼마든지 적군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데다 성벽까지 적의 침투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었다는데
세이난 전쟁으로 성과 은행나무들이 불탔다는 사실에는 의구심이 생긴다.
어쩌면 전투로 인해서 불타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성을 지키던 장군이 성내의 병사들의 결의를 다지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불을 놓아 소실된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아무려나 철옹성 같은 성을 불태운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전투 때문이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함이든 오늘날 후손들에게 강한 자부심으로 남을 것을 알았다면
그토록 무모한 일은 벌이지 않았으리라.
<울산마찌 부근에서 만난 전차>
일본의 전차는 은근히 부러웠다.
옛것은 사소한 것도 함부로 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의식이
과거와 현재를 공존하는 나라로 만든 것 같아서다.
그런 현실은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근원적인 힘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전차가 있었다는데 나에겐 기억조차 없다.
그래서일까. 버스가 다니는 도로 중앙을 달리는 전차는 신기하기만 했다.
<거의 몸통까지 자른 가로수들>
구마모토 성의 은행나무 속설 때문일까.
나무들은 하나 같이 도로변 가옥들의 지붕을 넘는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특이한 점은 가로수였다.
나무들은 하나 같이 윗부분을 모질게 전지당한 채 몸통에만 잎을 틔우고 있었다.
어쩌다 전지를 당하지 않은 나무들은 동그란 모양이었다.
흡사 키가 훌쩍 자란 회양목 같았다.
과거 언젠가는 그 나무들도 몸통을 잘렸음직한 모습들이었다.
예쁘기는 하지만 인간의 감각대로 마구 몸이 잘리는 나무들이 안쓰러웠다.
<기와집이 유난히 많은 울산마찌>
울산마찌는 참 슬픈 이름이다.
울산거리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에 언뜻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이름이 생기게 된 배경이 그늘진 까닭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정유재란 때 울산성에 갇혔다가 탈출하면서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울산성을 지었던 석공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구마모토 성을 짓게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구마모토 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업적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수고한 사람들은 울산성을 지었던 울산의 석공들이었다.
비록 끌려간 것이지만 성을 짓고 난 석공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왜성을 지었으니 왜인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죽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 울산마찌인 것이다.
울산의 민초들이 억울함을 달래며 모여서 살았다는 곳.
울산의 거리여서일까.
기와집이 좀 많았다.
내려서 걸으며 그들의 혼을 느껴보지 못한 아쉬움이 흐릿한 사진으로 남은 듯하다.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만 남은 울산마찌>
역사는 민족성도 희석시키는 모양이다.
울산사람들이 모여 살았기에 붙여졌다는 이름마저
이제는 겨우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정작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저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울산의 문인으로 방문을 한 나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첫댓글 울산마찌....그렇군요. 다음에 일본 가면 꼭.... 멋진 여행기 보고 나니 초밥 먹고 싶어용^^
우리도 울산마찌를 거닐어 보리라는 소망을 가졌죠.그런데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만 남은 슬픈 이름...슬픈 역사만큼이나 아스라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