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저희
할머니께서는 단추가 없어지면 화장대 제일 아래칸에서 양철통을 찾으셨습니다. 양철통 속에는 온갖 종류의 단추들이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
저기서 모으신 단추를 담아두셨다가 요긴할 때 쓰셨던 것이지요. 비단 단추뿐만 아니라 색색의 리본 조각이며 포장지 같은 것들을 버리지 않고
어딘가에 잘 보관해두셨다가 필요한 순간에 딱 맞게 꺼내시곤 하셨습니다. 물건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충고와
함께요.
요즈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스스로 병원에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가족들이 보다못해
도움을 요청하려 외래에 방문하시곤 합니다. 우리는 이런 증상을 수집, 저장(hoarding)이라고 부르는데 작년 개편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 5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5, DSM-5)에서는
수집광(hoarding disorder)이라는 독립된 질환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일 때 우리는 수집광의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하잘것없는 물건들을 버리는 것을 지속적으로 대단히 어려워하고, 어떤 물건을 버릴 것인지 결정 내리는 것을
못합니다. 둘째로 이렇게 모아둔 물건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산더미를 이루어 집안의 실제적인 생활공간을 침해하고 이로 인하여 집안에서 일상적인
생활이 방해 받게 됩니다. 이런 분들의 집안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하여 제대로 걸어 다닐 수도 없거나 다리 한번 쭉 펴고 눕지도 못할 정도에
이르러 간혹 뉴스나 TV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합니다. 즉 물건의 실제적인 효용성이 있건 없건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고, 산더미를 만들어 놓는
특징이 중심인 질환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 본인들은 이를 정리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정리를 하려고 해도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곤 합니다.
DSM-5 이전까지는 수집광은 독립된
질환이 아니라 저장강박이라 불리면서 강박장애의 일종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수집광 환자들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증상은 강박장애와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강박장애 환자들은 침습적이고 불쾌한 불안이나 두려움을 경험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반면, 수집광 환자들은
물건을 모으면서 편안하거나 심지어 희열을 경험한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강박장애 환자들은 자신들의 증상에 대해서 ‘이상하다’,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반면 수집광 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상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박장애 환자와 수집광 환자들의 뇌 영상
연구에서도 전두엽 부위의 뇌 활성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하여 수집광은 강박장애와 다른 질환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환자분들은 스스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로 ‘낭비를 막기 위하여’ 또는 ‘모아둔 물건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지 몰라서’ 라고 대답하시곤 합니다. 물건들이 모아져 있는 상태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모은다는 대답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점은 어떠한 동기로 물건을 모으건 간에 이 물건들은 올바로 정리되거나 보관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수집가(collector)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수집가들이 모으는 물품은 취향에 따라 사소한 것들이기도 하여
남들은 그 가치를 모를 때도 있지만, 이러한 물품들이 소중하게 보관되고 정리되기 때문에 질환이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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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들의 증상이 처음 시작되는 시기는
10대나 20대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에는 별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증상이 심하더라도 스스로 치료를 찾으시는 경우가 적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환자 주변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환자 대신 물건들을 처분하거나 집을
대신 정리해 주기도 하지만, 점차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혼자 거주하는 수집광 환자에 대해서 치료 팀을 연결해주는
태스크포스팀이 지역별로 마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약 50%의 수집광 환자들에서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가 동반되기도 하는데, 이런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수집광 증세 자체에 대해서 치료를 요청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모아두는 물건들이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는 인지적 오류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집광 환자의 치료에는 이러한 인지적 오류를 스스로 깨닫고, 행동을 변화시키는 인지행동치료가 필요합니다.
치료의 앞부분에는 물건을 모으지 않아도, 또 모아둔 물건을 버리더라도 환자들이 걱정하는 큰 손해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과정으로
시작됩니다. 실생활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치료자와 함께 연습하는 과정도 효과적인데, 여기에는 물건의 중요성에 따라 분류하여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도 포함됩니다. 수집광의 약물치료는 강박장애와 비슷한 치료로 이루어지지만, 치료 효과는 강박장애의 경우에 비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수집광이란 단순히 물건을
모아두고 버리기 어려워할 뿐만 아니라 이를 정리하지 못하여 일상생활에 지장을 크게 받는 정신질환이며,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한
질환입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ostfiles12.naver.net%2F20150102_155%2Fchsnuh_1420173424353t1Tf0_PNG%2F20141231_172058.png%3Ftype%3Dw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