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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유럽에 속해 있는 연방 국가 스위스의 국토 면적은 4만 1293km2 이며 총인구는 690만 명이다. 스위스의 공식적인 국가명은 라틴어로 콘페더라치오 헬베티카(Confederatio Helvetica)이고 줄여서 CH라 표기한다(스위스의 모든 차량에서 국가 표시 CH를 볼 수 있다). 북쪽은 독일, 서쪽은 프랑스, 남쪽은 이탈리아, 동쪽은 오스트리아·리히텐슈타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베른(Bern)으로 13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 외의 주요 도시로는 취리히, 바젤, 제네바(쥬네브), 로잔 등이 있다. 연방국은 26개의 칸톤(스위스의 주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칸톤은 인구 1만 3500명(아펜젤이너호덴)에서 115만 명(취리히)까지 인구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면적도 37.2km2(바젤)에서 6069.4km2(베른)까지 다양하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몽블랑(이탈리아어로 몬테 비안코:4807m)은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3국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스위스의 대부분은 알프스의 고산지인데(알프스가 국토의 60%) 서쪽과 남쪽은 산맥이고, 북쪽은 평야 지대로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II. 역사 스위스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민족은 게르만족 갈래의 켈트족 가운데 헬베티족으로 B.C. 107년 로마에 대항한 기록과 B.C. 58년 알프스 지역을 지나 프랑스로 진격하는 로마군을 공격한 기록이 있다. 이후 로마에 정복당하여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은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동부 지역은 레에티아(Raetia) 주에, 서쪽은 벨기카(Belgica) 주에 속하였다. 5세기에 론 강 계곡에 부르군트 왕국을 포함해서 서부 스위스의 대부분이 성립되었다. 동쪽으로는 알라만 공국이 위치해 있었고, 동남부의 산악 지대는 그 당시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되고 알라만족은 게르만 색이 강하여 언어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부르군트족과 알라만족(라인 강을 거슬러와 현재의 바젤 근방에 진출하게 되는데, 기존의 헬베티족 가운데서 이들을 피해 산악 지대로 들어간 일파가 레에트족이다)은 게르만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알라만족의 지배 지역에서는 독일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부르군트 제국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였으며,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지역이었다. 산악 지대에서는 레토로망스어(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혼합된 것으로 인구의 1% 정도가 사용함)를 사용하는 레에트족이 살고 있었다. 알라만족과 부르군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고 알프스의 다른 지역에 랑고바르드족이 기초한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어,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카를 대제의 손자가 왕국을 분할할 때 앞에서의 경계선이 다시 통용되었다. 알라만족은 독일 제국에 속했고, 동쪽 지역은 부르군트에, 티치노 주는 이탈리아에 속해 있었다.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왕 콘라트 4세가 죽은 다음 신성 로마 제국은 왕이 없는 대공위 시대(1254~1273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선출될 때까지의 기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의 왕들은 작센의 황제나 호엔슈타우펜 왕국과 같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였고 왕권은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의 결과로 매우 약화되어서 점차 명칭뿐이고 형식적이 되었다. 일부 지역의 독자적인 지배는 점점 영주들의 손에 넘어갔으며――공작, 백작, 주교, 수도원장, 많은 기사와 도시들의 지역 공동체――이런 상황에서 스위스의 주(칸톤)들이 성립되었다. 13세기에 스위스는 다양하고 정치적으로 얼룩진 양탄자와 같았다. 바젤과 콘스탄츠는 자치를 얻은 제국 도시였고 그 외에 몇 개의 자치 공동체, 작은 백작령, 수도원령의 다수가 공동체 내에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황제의 특권을 받았다.――그것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요구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였다. 지역 공동체에서는 일요일마다 병역 복무 능력이 있는 남자들이 광장에 모여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회의를 하였다(이런 민주주의적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웃 영주들의 팽창욕을 막기 위해서 지역 공동체 여러 개가 동맹을 맺었다. 1291년 우리(Uri), 운터발덴, 슈비츠가 연방으로 결성되었다. 이 연방은 합스부르크가와 갈등 관계에 빠지는데, 프리드리히 쉴러의 `빌헬름 텔'이 잘 묘사하고 있다. 이는 1332~1536년 사이에 계속 확장되었고 당시의 영토 경계는 미미한 변화를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고수된다. 당시의 알프스 주 지역 공동체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은 역사적으로 스위스의 형성에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스위스는 그들 스스로 창안해 낸 고유한 공화적 헌법을 통해 이웃 국가들과 구별되었고, 16세기 초의 종교 개혁은 스위스의 특성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종교 개혁은 취리히(츠빙글리)와 제네바(캘빈)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주로 중부 평지 지방에서는 신교(프로테스탄트)를 믿었으며, 산악 지방의 스위스 동맹 주들은 카톨릭을 믿었다. 츠빙글리가 이끄는 신교파와 산악 지방의 카톨릭 동맹 주들은 카펠에서 두 번의 전투를 벌이게 되어 신교 동맹 군대는 패하고 츠빙글리도 전사한다. 그러나 이후 제네바에서 캘빈은 신교 교회를 설립하고 신교가 전 유럽에 퍼지는 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다. 캘빈은 신교의 포교뿐 아니라 정치·경제 문제에도 관여하여 많은 공장을 세우고, 지금까지도 유명한 시계와 섬유 공업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정작 유럽을 강타한 30년 전쟁에서는 중립을 선언하고 전쟁의 피해를 벗어났다. 1648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위스 연방의 정치적 독립과 중립이 유럽의 강국들에 의해 인정되어 스위스는 네덜란드와 함께 독립하게 된다. 필립 루소는 그의 계몽주의적 글을 스위스 공화국 제네바에서 썼다. 이렇듯 스위스 연방은 때때로 교회의 종교 재판이나 보수적인 빈 체제의 비밀 경찰을 피하려는 지도자들에게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와 비슷하게 스위스에서는 중앙 권력이 약하고 주들이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위스도 영향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스위스 동맹을 깨고 헬베티아 공화국을 세워 중앙 집권 제도로 제도를 바꿔, 개별 연방주에 비하여 중앙 권력이 강해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많은 주들이 불신에 찬 태도로 따랐다. 왜냐하면 주들은 크기와 인구뿐만 아니라 언어와 종교, 인구 구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1845년 카톨릭 주의 분리파가 형성되었고, 분리파 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새 헌법이 통과되었고 이 헌법은 교회 정책을 각각의 주에 일임하고 그와 더불어 카톨릭 주의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 다. 스위스는 1847년 이후로 더 이상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래된 중립 정책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앙리 뒤낭(Henri Dunant)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중인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국제 적십자를 기초하였고 제네바에 설립하였다. 1901년 앙리 뒤낭은 첫번째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뒤낭의 생일인 5월 8일을 적십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875년 독일의 우편 장관 슈테판(Heinrich von Stephan)은 만국 우편 연합(UPU)을 설립하였다. 스위스가 중립성을 보장했기 때문에 소재지로 베른이 뽑혔다. 1차 세계 대전에서도 스위스는 중립을 지켰다. 스위스는 다른 민족 국가들보다 당시의 민족주의 해악에 덜 영향을 받았다. 독일어권 스위스인들은 독일, 프랑스어권 스위스인들은 프랑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공화국 전통이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스위스라는 국가 의식을 만들었고 그것은 1차 세계 대전의 어려운 시기 동안 스위스를 지탱시켜 주었다. 연합군의 승리 이후에 유럽의 새로운 형성 과정에서 국제 연맹이 결성되었고 제네바가 그 소재지가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에서도 스위스는 중립을 유지하였다. 독일군 나치 친위대(SS)로부터 도망쳐 피난처를 찾는 피난민들로 스위스의 상황은 매우 격동적이었다. 당시에 “배가 꽉 찼다(Das Boot ist voll)”는 독일어가 유행하였을 정도로 스위스는 많은 피난민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의 독일군은 프랑스 아틀란타 해변의 서쪽에, 우크라이나 동쪽에, 아프리카 남쪽에 주둔하여 유럽 요새를 형성하였다. 스위스는 하나의 섬이었고, 계속적인 존립은 히틀러의 호의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스위스는 외교 정책에서 독일에 자극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스위스 정부는 계속 중립 정책을 폈다. 국제 연맹은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 UN(국제 연합)이 등장했는데, 제네바에서 그 소재기를 이양받았다. 스위스는 EC(유럽 공동체),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UN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스 군인들은 2차 세계 대전의 말기에 종종 국제 평화군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III. 정치 스위스는 1848년부터 의회주의적 연방 국가를 이루었다. 의회(연방 의회)는 입법 의회(200명의 의원)와, 주 의회(46명의 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입법 의회의 의원들은 4년마다 주 단위 선거에서 선출되며, 주 의회 의원들은 각 주에서 직접 선출된다. 주 의회는 각 주의 의원들이(한 주에 1~2명) 그 주를 대표하게 되며, 소수의 주민을 대표하는 주의 의원들은 주민의 의견 대부분을 수용할 수 있으나, 많은 수의 주민을 대표하는 주의 의원은 주민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여 표출할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각 주는 연방 탈퇴와 각 주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금지하고, 헌법에 규정된 것 외에는 완전한 주권을 행사한다. 또 몇몇 주에서는 란츠게마인데라는 직접 민주 정치가 행해지는데 4월 마지막 주나 5월 첫째 주 일요일날 주민들이 모여 거수로 주지사 등을 선출하고 주 법을 표결하기도 한다. 스위스는 20개의 완전한 주와 6개의 반주(半州:아펜젤이너호덴, 아펜젤아우서호덴, 바젤란트, 바젤슈타트, 니트발덴, 오프발덴)로 되어 있고, 각 주에는 주의 헌법과 주 의회 그리고 주 정부가 있다(아펜젤 주에서는 종교 개혁시 평야 지대에서 신교를, 산악 지방은 카톨릭을 믿어 나뉘고, 바젤 주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혁명 세력이 바젤 시를, 혁명 반대 세력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어 나뉘었다). 스위스는 연방 대통령에 의해 대표되는데 대통령은 매년 12월에 연방 의회에서 새로 선출한다. 정부는 자유 민주당(FDP), 사회 민주당(SDP), 기독교 민주주의 국민당(CUP) 그리고 스위스 인민당(SPP)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밖에 녹색당 등 환경 보호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7명의 장관이 4년마다 각 주에서 선출되어 연방 의회에서 결정되고, 연방 대통령 아래에서 일한다. IV. 경제 1인당 국민 소득(3만 6500달러)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관세율이 세계 최저로 수입 제한이 없고 통화 외환 등에도 제한이 없는 스위스는 원자재와 식량을 수입하고 완성품을 수출하는 선진국형 무역 형태를 띠고 있다. 매혹적인 알프스 경관은 스위스를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의 하나로 만들어 체르마트, 다보스, 쟝크트모리츠 등의 산악 휴양지, 루체른 호, 루가노 호, 마조르 호 등의 호수와 루체른, 인터라켄, 로잔, 로카르노 등의 호반 도시에 전 세계의 관광객이 찾아와 관광 수입으로 무역 수지의 적자를 메우고 스위스 경제를 윤택하게 하고 있다. 19세기 초에 스위스에서는 이미 파리와 영국의 방문객들을 상대로 관광업이 성행하였으며 호텔이 생겨났다. 세계의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호텔 경영학은 스위스 호텔의 뛰어난 명성과 본질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다. 프랑스어권 스위스에서 유래한 요리는 프랑스 요리의 명성에 크게 기여했고, 현재 스위스의 많은 식당들이 높은 평판을 얻고 있다. 농업 또한 중요한 한몫을 차지한다. 스위스 치즈, 그루에레(Gruyere), 아펜첼러(Appenzeller), 에멘탈러(Emmentaler)가 유명하며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 스위스의 식료품 콘체른인 네슬레(Nestle)는 세계적 규모의 회사이고 커피, 초콜릿, 유아식들을 생산하며 생산품 가운데 많은 양이 알프스 우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1인당 초콜릿 소비가 가장 많다. 시계 산업 또한 스위스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Made in Switzerland”라는 상표는 정확도로 명성을 얻었고 스위스의 군용 칼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주머니칼로 인정받고 있다. 또 스위스의 은행은 비밀 엄수로 유명하며, 스위스 프랑은 안정된 통화로 인정받아 외국 자본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하여 세계 금융과 은행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V. 문화와 생활상 1. 언어와 종교 스위스인 가운데서 약 60%는 모국어로 독일어를 사용하며, 약 30%는 프랑스어, 약 8%는 이탈리아어, 3%는 레토로망스어를 말한다. 네 가지 언어 모두가 공용어이다.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44%는 개신교를, 47%는 카톨릭을 믿는다. 2. 예술 중세와 근세 초기에는 예술 애호가에 의해 건축과 회화, 연극, 발레 같은 조형 예술이나 상연 예술이 장려되었고, 예술가들은 영주와 성직자 다음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위스에 위치한 합스부르크로부터 이름이 유래된 합스부르크가는 강력한 영주들이었으며 동시에 스위스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들이었으나 그들이 오스트리아로 옮긴 후 연방 공화제로 바뀐 다음에는 세금을 사용할 때 국민들의 동의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지원이 상대적으로 저조하게 되었다. 한번쯤 스위스 경치를 구경한 사람은, 인상적인 산의 경관 한가운데 아름다운 마을을 기억에 담아두게 된다. 스위스 마을에 관한 그림은 높은 탑을 가진 마을 교회로 많이 나타난다. 또한 튀어나온 지붕, 나무로 된 창덧문, 발코니가 있는 집들은 매력적이다. 청결은 스위스의 미덕에 속하고 독일어권 스위스 마을들은 이런 방식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스위스의 정치적 중심은 취리히, 바젤, 베른, 제네바였으며, 이 곳에서 스위스의 문화 생활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것은 궁중의 사치스러운 예술이 아니라 스위스인의 미덕, 신중, 검소를 높이 평가하는 예술이었다. 독일 제국 수상 아돌프 히틀러는 좌절한 미술가라 할 수 있는데 두 번을 오스트리아 예술 학교에 입학 신청서를 냈으나 거절당했다. 후에 그는 제국 수상으로서 `아리아 예술'을 정의하였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변절된 예술'로 간주하여 박물관에서 떼어내게 하였다. 이렇게 떼어진 작품들은 스위스로 가져 가서 팔렸는데 스위스는 당시 예술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늘날도 그러하다. 스위스의 경매는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 3. 교육 스위스의 교육 수준은 매우 높지만 교육 제도는 주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초등 학교 때부터 네 개의 공용어를 위한 어학 교육에는 모든 주들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젤, 제네바, 베른, 로잔, 취리히 등 7개의 주립 대학과 연방 공과 대학, 상과 대학 등이 있는데 약 30%를 외국인 학생이 차지한다. 1459년에 세워진 바젤 대학은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강의하였다. 19세기 후반기는 미술사가인 야곱 부르크하르트(Jakob Burckhardt)가 강의하였다. 그는 민족주의와 그 결과들――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발아한 범슬라브주의 등――을 커다란 위험으로, 동시에 문화적 하강에 대한 조짐으로 보았는데 1차 세계 대전에서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대학으로는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이 있다. 그 곳에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학위를 받았다. 4. 문학 스위스는 1차와 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고수하였다. 이 중립은 모든 국가에 의해 인정되었다. 특히 과거 위기에 흔들리고 불안정한 바이마르 공화국과 인연을 끊고 싶어하는 독일 지식인들, 이탈리아의 파쇼나 독일의 나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지식인들은 스위스를 야만인들에 의해 점령된 유럽 대륙의 한가운데 있는 유일한 구조된 섬으로 보았다. 스위스를 그들의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작가들 가운데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헤르만 헤세 등이 있다. 스위스도 중요한 작가들을 배출했는데, 『푸른 하인리히』의 저자 G. 켈러, 『하이디』로 유명한 J. 슈피리, 『올림포스의 봄』을 쓴 슈피텔러 등이 있다. 5. 언론 매체 신문은 120여 종이 발간되는데 발행 부수는 많지 않으나 기사의 공평성은 정평이 났으며 특히,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방송은 상업 방송은 없으나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방송하는 3개의 국립 방송국이 있다. 또한 스위스의 출판은 역사가 오래 됐으며 학술, 미술, 과학 서적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6. 스포츠 스위스에서는 당연히 알프스의 겨울 스포츠가 지배적이다. 프레니 슈나이더(Vreni Schneider)와 피르민 추브리겐(Pirmin Zurbriggen)은 국제 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하였다. 봅슬레이와 마찬가지로 스키에서 스위스는 스포츠 강국으로 인정된다. 철인 경기, 사이클, 테니스에서 종종 좋은 성적을 낸다. 홍해에서 열리는 보트 경기에는 유럽 최상의 선수들이 참가한다. 7. 음식 스위스 방문객들은 반드시 한 번은 퐁뒤(Fondue) 프로마지를 맛보아야 한다. 이 것은 포도주와 치즈를 불에 녹이면서 포크에 꽂은 빵을 찍어 샐러드와 함께 먹는 요리이다. 이 밖에 올리브유를 끓인 냄비에 쇠고기를 포크에 꽂은 채 넣고 튀기면서 곁들인 소스와 함께 먹는 퐁뒤 부르기뇽도 있다. 또 치즈를 녹여 삶은 감자에 쳐서 먹는 라라크레트도 한 번은 먹어 봐야 한다. 퐁뒤 냄비 또는 라슬레트 후라이팬은 스위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선물들이다. 8. 국민성 현대 국가는 정치적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언어적·문화적 공동체로서 이해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모범이다. 19세기 이탈리아·독일·폴란드 등에서 언어와 문화 공동체로서 국가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소리가 커져 갔다. 이러한 과정은 19세기와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스위스는 당시의 이러한 파괴적인 민족주의의 파도에 바위처럼 버티었다. 4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연합한 스위스 국가――그들은 700년이 넘는 공동의 공화국 전통과 수백 년 동안의 중립 외교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스위스의 은행은 비밀 엄수로 유명하다. 비밀 엄수는 신뢰성에 속한다. 사람들이 공식 석상에서 돈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스위스식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공연히 드러내지 않는다. 스위스인은 겸손하고, 신중하고 수수하다. 화려한 것은 스위스식이 아니다. 스위스 회사의 제품들은 화려함보다는 높은 질로 명성이 높다. 스위스는 작은 나라이고, 도시들은 대개 중소 도시이다. 스위스인의 생활 양식은 대도시의 분주함에 그렇게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Langsam aber genau)'라는 표현을 스위스의 어디서나 자주 들을 수 있다. 이 표현은 정확하기 위한 여유를 강조하는 스위스인들의 국민성을 일면에 나타내 주는 것으로 이는 스위스에서 사용되는 독일어의 속도가 독일인보다 느리고 정확하게 발음되어진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스위스 독일어는 고지 독일어나 다른 독일 방언들보다 분명하게 그리고 천천히 말해진다. 스위스인의 각 언어 집단들은 언어에 따라 서로 차이가 난다. 독일식 스위스 문화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가깝다. 세 나라를 포함하는 독일어 문학과 독일어 연극이 있다. 많은 텔레비전 제작물들은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방송국의 공동 제작물이다. 8000만 독일인, 800만 오스트리아인, 700만 스위스인들이 독일어를 사용한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에서는 독일과 할리우드에서 온 영화들이 텔레비전에서 지배적이다. 연예인 에밀 슈타인베르거(Emil Steinberger) 같은 사람들에 의한 스위스 제작물들이 전 독일어 사용권 지역에 방영됐는데 `스위스인 만들기(Schweizermacher)'에서 그는 외국인의 참정권 신청서를 고치는 관리의 보조원으로 연기하였다. 영화는 신랄한 방식으로 관료주의의 무력함을 보여 주었고 이는 영국 유머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프랑스어를 말하는 스위스인들은 프랑스인들과,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인들은 이탈리아인들에 부응해서 연계되어 있음을 느낀다. 기차로 독일에서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여행을 해 본 사람은 분명한 문화적 경계를 눈치채게 된다. 스위스는 알프스 지역을 통해 연결되어 있지만 발리스 같은 산골짜기는 매우 고립되어 있고, 론 강 계곡을 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 베른하르트(St. Bernhard:2459m), 그림젤(Grimsel:2165m), 프르카(Furka:2431m) 같은 협곡을 넘어서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스위스의 여러 산골에서는 다양한 방언들이 발전하였다. 이 방언들 가운데 다수가 독일어이긴 하지만, 독일에서 온 방문객들도 이해하는 데 무척 힘이 든다. 스위스인들은 “merci vielmals”라고 말하면서 감사를 표하는데, “merci”는 프랑스어이고 “vielmals”는 독일어이다. “merci vielmals”는 스위스식 독일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