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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차 시배지, 불일폭포, 최치원
[ 쌍계사 & 불일폭포 ] 지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10년(1632년) 벽암이 중건.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비, 보물 제380호 부도 문화제.
대공탑비 비문은 진성여왕 때 최치원 글씨(4대 금석문 중 으뜸)
적묵당(보물 제458호), 대웅전(보물 제500호), 5층석탑,
칠불아자방, 마애여래좌상, 일주문, 팔상전 등의 문화재
쌍계사는 불무장등, 삼신봉 산행의 들머리 기점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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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쌍계사 일정 유두류록.............
남명은 단순히 산수 경치만 보고 즐긴 것은 아니다.
선인들 자취를 답사해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았던 듯.
남명은 악양에 들러 고려의 충신 한유한 은둔지도 유람.
연산군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정여창 유적지도 찾았다.
4월 16일 정오 도탄에 배를 정박, 정여창의 옛 집터를 방문
그 날 남명 일행은 쌍계사 석문에 도착해 최치원 필치에 감탄.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한 길 남짓 열려 있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 쌍계(雙磎)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손수 써 놓았다. 글자의 획을 사슴 정강이만큼 크고 깊게 새겨 놓았다. 지금까지 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두 바위는 지금도 쌍계사 일주문 직전에 그대로 있다.
주변은 온갖 상점들이 들어서 옛 정취를 느끼기 불가능.
진감선사 혜소가 절을 세울 때는 옥천사 정강왕 때 쌍계사.
쌍계사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 남명이 유두류록에 남긴 기록.
“서쪽으로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며 저 백리 밖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신응사가 있는 의신동의 물줄기이고, 동쪽으로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 까마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줄기이다.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있기 때문에 쌍계라고 부른 것이다.”
“절문 밖 수십보 지점에 높이가 10자나 되는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서있는데, 최지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진감선사 대공탑비 -
887년(진성여왕 원년)에 건립된 이 비석은 지금도 있다.
남명이 보았을 당시에도 700년 세월이 흐른 이후의 비석.
이 절의 승려 혜통, 신욱 등등이 차 과일 산나물 음식 대접
그날밤 남명은 구토와 설사로 저녁도 못 먹고 누워 지내었다.
이희안이 간호하면서 곁에서 같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김홍이 와서 병이 좀 어떠냐고 문안.
이때 전라도 어란달도에 왜놈의 배가 침입했단 소식.
하여 산행을 중단하고 아침먹고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한낮쯤 호남의 역리가 갖고온 종사관 편지
아침에 보고한 왜선은 조운선(漕運船)이라는 것이다.
비가 하루종일 그치지 않고 내렸고 사방에 검은 구름
인간세상과 몇겹 구름과 물이 가로 막혔는지 모를 지경.
이날 저녁 자형 이공량과 이정도 배탈 나고 몸이 아팠다.
18일 날이 밝자 불일암에 오르고 불일폭포도 구경하고자 했으나
어제 내린 비로 길이 젖어 갈 수가 없었고, 신응사로 가려고 해도
시냇물이 불어 건너 갈 수가 없어 쌍계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호남순변사 남치근(南致勤)이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그는 을묘왜변 당시 왜구를 크게 물리친 공이 있었고,
나중에 임꺽정을 재령에서 잡아 목 벤 사람이다.
'남명의 자형' 이공량의 아들이 이준민
남치근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부하의 아버지가 전라도 접경으로 산행을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음식을 보낸 것이다.
19일 아침밥을 일찍 먹고 청학동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청학동은 도교의 이상향으로서 바로 무릉도원을 말한다.
그곳에 푸른 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청학동이라고 한다.
북쪽으로 다람쥐 바위에 다달아 나무를 부여잡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걸었다. 이때 우석은
장고를 치고, 천수는 피리를 불면서 두 기생을 데리고
선두가 되어 올라갔다. 남명과 여러 친구들은 새끼에
고기 엮은 듯 한 줄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해서 올라갔고,
물품을 책임진 강국년과 음식을 지고오는 종들은 뒤따랐다.
길가 큰 바위에 사람들이 이름새겨 놓은 것을 본 남명
대장부 이름은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고 개탄.
훌륭하게 살았으면 여러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질 것인데도
다람쥐나 삵괭이 사는 숲속 바위에 이름 새기기는 어리석음.
산이 험준해 열 걸음 걷고 앉아 쉬고, 열 걸음 걷고 앉아 쉬고
또 주변경치가 너무 좋아 열 걸음 옮길 때 아홉 번은 둘러보았다.
이렇게 시엄시엄 걸어서 점심 때 불일암에 당도하여 밥을 먹었다.
쌍계사에서 배탈 나서 기다리던 이공량과 이정
등산로 초입의 팔영루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 이공량 이정과 절 뒤채 동쪽 방장실에서 잤다.
20일 아침을 먹고 신응사를 찾아갔다.
신응사는 쌍계사에서 10리쯤 떨어진 곳.
신응사 주지 옥륜과 중 윤의가 맞이하였다.
중들이 술과 과일을 대접했고 남명은 시 한수.
"시냇물 절벽에 부딪쳐 흐르고, 산에는 봄빛 짙구나.
겸손과 자랑 심하지 않아. 그대를 바라보고 앉았노라."
남명이 유람하며 묵었던 신응사는 지금 없어졌다.
남명은 비 때문에 신응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23일 절에서 대접하는 아침을 먹고 산을 넘었다.
남명은 신응사의 경치가 지리산 최고라 생각했다.
시내 따라 7리를 오니 쌍계사 중들이 전송하기 위해
물건너와 기다리고 있었으며, 쌍계사 입구로 내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닭을 삶고 소주를 가지고와 남명을 전송.
시내가 있었는데 악양 아전들이 대를 엮어 임시다리 설치.
시내 건너 10리를 내려오니 청룡이 술과 고기를 갖고와 전송.
청룡의 아내는 요리 솜씨가 대단히 좋아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
거기서 배타고 배에서 점심먹고 악양현으로 내려가 악양현의 조창
(강가에 배로 싣고갈 세미를 보관하는 창고) 곁의 숙소에서 잠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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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유두류록은 지리산의 옛 모습을 알려준다.
쌍계사에서 십리 떨어진 신응사는 지금 사라진 사찰.
쌍계사는 신라 말 고운 최치원 선생의 흔적이 많은 곳.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학자이고 자는 고운이다.
12살에 당나라 유학하여 18세(874년)에 과거급제
879년 황 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은 당대의 명문.
884년에 귀국하여 여러 고을의 태수를 지내고,
10 여 조의 정치개혁안을 상소하여 시행케 했다.
그 후 세상의 어지러움을 비관. 해인사에서 은거.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쌍계사를 자주 온 듯.
당나라까지 이름을 떨친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
아울러, 우리나라 한문학의 시조로 일컬어 진다
최치원이 청학동을 찾아나선 시기는 신라 말기.
굶주린 백성들이 초적이 되어 사찰을 약탈한 시기.
특히, 최치원이 여생을 보낸 해인사는 부유한 사찰.
14 암자와 75 말사를 거느린 국내 3 대 사찰 중 하나.
최치원은 쌍계사에 찾아와 청학동을 찾아나섰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해 해인사에서 은둔한 최치원.
그는 이상향을 찾아 청학동으로 잠적하려 한 듯 싶다.
하여, 쌍계사 불일폭포 청학동 일대의 최치원의 발자취.
신라 말기엔 사찰까지 혼탁한 사회적으로 문란했던 시기.
차 시배지.
쌍계사 앞 주변에는 온통., 전통 찻집들의 거리.
화개장터에서부터 시작된 혼례길이 끝나는 지점.
연인들이 이곳에서 차마시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차 시배지'로 알려진...쌍계사 일대.'
차(茶)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 기록은 신라 흥덕왕.
829년 당나라 사신인 '대렴'이 차 씨를 가지고 귀국.
이를 지리산에 심게 했는데 선덕여왕 때부터 흥했다.
고대중국 삼황오제 태평성대시절
삼황 = 복희, 신농, 황제를 지칭함.
오제 = 요, 순, 우, 탕, 문무를 지칭.
차는 중국 고대사 그리고 한의학에 자주 등장.
고대중국 황제 신농씨 동이족이란 학설도 있다.
약초를 찾으려 온갖 풀을 다 먹어보았다는 신농씨.
하루 100 가지 풀을 씹어 맛본 중.. 72 가지는 독초.
그 독에 중독되었을 때 녹차를 씹어 그 독을 해소했다
어느날 신농씨가 조그만 시냇가에서 물을 끓이는데
머리 위 나뭇잎이 끓는 물 속에 떨어져 그윽한 향기
마셔보니 맛이 일품이라 널리 알려진 것이 차의 유래.
차가 대한 첫기록은 중국역사 기록 삼국지.
관우 유비 장비의 삼국지가 아닌.. '삼국지'.
기원전 1115년 주공단 '이아석목편(爾雅釋木篇)'
242 - 283년 "오나라에서 차를 따고 삶는다" 는 내용.
중국 한(漢)민족이 처음 차를 알게된 시기는 135 - 109년
본격적인 차 문화는 유비가 촉나라를 세운 이후로 간주한다.
차나무 재배에 적당한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
중국 한민족은 차를 빠르게 생활 속에 끌어들였다.
두통약, 배탈약, 송나라 귀족과 왕실의 음료로 이용.
참선하는 구도자로부터 명나라 민중이 즐겨 마시는 차.
중국차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주변국가에 전파.
몽고,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어기를 비롯 유럽.
청나라 때 유럽 해상권을 장악한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가 청나라로부터 수입해간 차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홍차의 유래'.
영국은 홍차문화 발생지이자 으뜸 소비국.
19세기 초에 동인도회사는 또한 아샘차를 발견
인도를 세계 최대의 차 생산국으로 부상시켰다
동인도회사가 사탕수수를 팔기 위해 차를 수입
쓰고 떫은 홍차 맛 때문에 설탕이 필요했던 것.
홍차를 많이 팔수록 설탕이 많이 팔린다는 속셈.
홍차는 중국차 잎이 장기간 항해 도중 발효
(녹차를 20도~ 24도 6시간 두면 홍차의 성질)
영국 상선에서 우연히 발견된 맛이 홍차의 유래.
한반도 최초의 차는 인도로부터의 전래설 기록.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들여옴.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차 시배지에는 두가지 설.
하동 쌍계사 지역 또는 구례 화엄사 지역이 반반.
현재로서는 화개차가 지방 기념물 61호로 지정되어 있고
쌍계사 입구에 차 시배를 기념하는 김대렴공차시배추모비
1981년 '한국다인회'에서 매년 5월 25일을 '차의 날'로 확정
불일폭포.
지리산 제 6 경 - 불일폭포.
쌍계사에서 한 시간 도보거리
한폭의 동향화처럼 절벽에 둘러쌓여 물보라를 날리는 2단 폭포
쌍계사 금당 옆으로 난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야영장과 불일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국내 2대 폭포이자 지리산 10경 중 하나.
지리산 백학봉과 청학봉 사이에서 떨어지는 오색무지개 불일폭포.
수량이 많을 때에는 높이 60m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사방 1km.
쌍계사 → 불일폭포 → 외삼신봉 →청학동( 11km : 7 ~ 8시간 소요)
불일폭포 들머리는 쌍계사 대웅전 왼쪽, 계단길에서 1시간 거리.
최치원이 학을 타고 놀았다는 환학대와 불일폭포 휴게소 지나 폭포.
쌍계사에서 40 분 거리인 이곳 지나, 북쪽 협곡으로 10분 후 불일폭포
청학봉과 백학봉이 마주선 협곡에서 낙차 60m의 지리산 최대폭포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했을 때, 희종대사가 내린 시호가 '불일'이다.
남쪽 방향에 수량이 풍부해 늘 영롱한 무지개가 어린다는 불일폭포
그 왼쪽 산중턱 불일암은 1983년에 불에 탄 이후 절 터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상불재- 청학동, 또는 상불재-외삼신봉-청학동 산행 코스.
불일암 터를 돌아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조금 경사가 가파르다.
조릿대 군락 가운데로 난 길을 1시간30분 남짓 오르면 상불재 삼거리
여기서, 곧바로 '삼성궁'이나 '청학동 도인촌'으로 넘어갈 수도 있으며,
북쪽 내삼신봉을 거쳐 외삼신봉 대지리 주릉을 거쳐 청학동 도인촌 하산.
삼불재 삼거리에서 외삼신봉 방향으로 30분 쯤 올라가면 쇠통바위.
그 가운데 큰 구멍이 뚫린 모양이 자물쇠와 흡사하다 하여 붙은 이름.
쇠통바위에 뚫린 구멍으로 바위 위로 오르면 청학동이 한눈에 바라뵌다.
쇠통바위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길 왼쪽에 '종정굴'이란 바위굴,
곧 내삼신봉(1,355m) 정상에 올라서면, 정상은 넓고 평평한 바위이다.
내삼신봉 북쪽에 솟은 외삼신봉(1,284m)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이 장관.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황금능선으로 이어진 지리산 전망대.
외삼신봉 정상에서 청학동으로 이어진 하산 등산로는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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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 쌀바위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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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의 명소' 불일폭포 아래에 있는 용소에 관한 전설이다.
아득한 옛날 불일폭포가 생기기 전 용소에 이무기가 살었다.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날만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이무기.
그 용소 옆 불일암 암자에서는 한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뇌성이 치고 벼락이 나무를 때리며 무서운 폭풍.
산이 갈라지고, 이무기가 용이 되어 푸른 빛을 발하며 하늘로 승천.
천지를 진동하던 천둥이 멎은 후 스님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용소 옆에 바위산은 두 개로 갈라졌고, 곱게 흐르던 물줄기는 사라졌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절벽이 생겨 폭포가 그 아래로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스님이 절벽을 내려가 보니 절벽 밑에 새로 물길이 생겼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절벽에는 큰 구멍이 두 개너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놀라웁게도 쌀이 마구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님은 부처님의 자비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쌀을 암자로 옮겼다.
그 다음날 스님은 다시 그 절벽의 뚫어진 구멍으로 가보았다.
그 구멍 아래에는 쌀이 가득했고 아직도 계속 쌀이 흘러나왔다.
스님은 이 쌀을 모아 화개장터에 나가 그곳 아주머니에게 팔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아주머니는 스님이 답답해 보이는 듯 말을 건넸다.
"스님! 쌀을 이렇게 조금씩 가져올 것이 아니라 한번에 가져오세요.
그렇게 하면 수고도 덜고 허구한 날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될텐데요."
암자로 돌아온 스님은 밤새도록 곰곰이 생각하다가 욕심이 생겼다.
'저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더 넓게 뚫는다면 더 많은 쌀이 나올 것이고,
그럼 장터 아주머니의 말대로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데..'
스님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폭포로 달려가 전보다 크게 구멍을 뚫었다.
스님은 다음날부터 세배의 쌀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흡족했다.
다음날, 스님은 큰 자루를 메고 절벽으로 내려가 그 쌀구멍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그 곳엔 세 배로 많은 쌀이 나와있기는 커녕 단 한톨의 쌀도 없었다.
스님의 지나친 욕심이 그만 쌀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사람들은 쌀이 나오던 바위를 용추 쌀바위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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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설은 스님이 불사를 위한 물욕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무기가 승천할 망정, 물욕에 눈이 어두운 스님은 성불이 어렵다는 뜻.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최치원 영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계원필경〉, 최치원 지음, 장서각 소장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고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 출신.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 황룡사와 매탄사 남쪽에 있던 그의 집터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 하며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 최고 관등인 아찬을 받은 점을 보면 6두품.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에 예부시랑
배찬이 주시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로 임명되어〈중산복궤집〉 5권을 집필.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입산해 박학굉사과에 응시 준비
회남절도사 고변에게 도움을 청해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으로 서기 책임을 맡았고
880년 그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 임명.
이때 군무에 종사하며 집필한〈계원필경 桂苑筆耕〉20권
특히 881년에 집필한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이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
문장가로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 한계와 국정 문란으로
자신의 소신을 펴볼 수 없었다.
당시 신라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
집권 지배체제가 흔들리며 지방세력의 반발
889년(진성왕 3) 재정 궁핍으로 주군(州郡)에 조세 독촉
이것이 농민 봉기로 이어져 신라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
891년 양길과 궁예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
다음해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로 임명
흉년이 들고 각지에 도적이 들끓어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집권체제가 해이해지고 골품제의 누적된 모순을 지적.
여러 문제점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
그의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897년 진성왕 양위
이때 진성왕 '양위표'를 작성하고
새 왕 효공왕의 '사사위표'를 찬술.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뜻을 힘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 등이 있다.
함양과 옥구, 부산 해운대에 그와 관련된 전승이 있다.
만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 및 정현사와 도우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집필.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의 글인듯 추정된다.
그는 유학자로 자처했지만 불교에도 깊은 이해
왕명에 의해 선사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그는 선종뿐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
고려시대에 들어와 1020년(현종 11) 내사령에 추증되고
성묘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에 추봉(追封)
이조시대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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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시무 10조>
1. 새 궁궐로 옮길 것.
2. 관리의 수를 줄이고 녹봉을 적당히 할 것.
3.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빼앗은 토지는 돌려줄 것
4. 선량한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적당히 할 것.
5. 공물 진상을 금하고 안찰사의 임무를 명확히 할 것.
6.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고리대업을 금할 것
7. 탐관오리를 징벌하되 잘한자는 상을 줄 것.
8. 관리의 사치를 금할 것.
9. 비보 사찰 이외에는 모두 없애고 함부로 절을 세우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하고 바른말 하는 관리를 등용할 것
최치원의 명문(名文)으로 잘 알려진 `토황소격문'.
당나라 유학시절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문장.
황소가 이 격문을 보고 놀라 걸상에서 떨어졌다는 일화
`토황소격문'에 대한 당시 반응은 충격적이었고
최치원은 25세에 당나라 명문장가 반열에 올랐다.
6두품 최치원은 신분에 의해 오를 수 있는 관직이 제한
하여, 신라사회의 폐쇄성을 극복하려 당나라로 조기유학.
12세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조기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명문장가가 된 최치원
20대 후반 개혁을 꿈꾸며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 신라.
그는 사회 개혁안들을 올리며 신라 회생을 위해 노력
그의 개혁안은 훗날 고려의 통치이념으로서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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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한탄>
신라 말 등장한 호화주택을 금입택(金入宅)이라 했다.
금입택이란 화려하게 금박을 입힌 주택을 말하는 것.
권력자인 진골(眞骨) 김씨(金氏)들의 35 호화 주택
그러나 서민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경덕왕 때 향덕은 흉년이 들어 부친이 굶자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부친에게 바쳤을 정도.
흥덕왕 때 손순은 어머니 밥을 빼앗는 아들을
땅에 파묻어 버리려고 했을 정도로 기근이 심각.
자식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권력자들 사이의 싸움과 반란도 수없이 일어났다.
혜공왕 때에는 각간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라가 무척 어지러웠고 권력자 사치가 극성을 부렸다.
이 무렵 국적을 포기하는 서민들이 늘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로 조기유학을 떠났다.
당나라에서 과거를 치르고 관리가 되었다.
헌덕왕 때 당나라 절동에서 구걸하는 신라인이 170명
굶주린 신라유민 300여 명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신라 해적선 20척이 일본 소영도에 상륙해 왜인들과 전투
일본은 깜짝 놀라 신라가 쳐들어왔다며 야단법석.
그당시 신라 정치를 한탄하는 최치원의 글을 보자.
"여우가 미인으로 둔갑하고(狐能化美女),
살쾡이가 선비노릇을 한다(狸亦作書生).
누가 알았으랴, 짐승의 무리들이(誰知異類物),
사람의 탈을 쓰고 세상을 속일 줄이야(幻惑同人形)."
당시 신라 권력자들은 서남해안 섬을 목장으로 꾸미기도 했다.
섬에서 활을 쏘며 사냥을 하는 등 유흥을 즐겼던 당시 권력층
윤리도 도덕도 땅에 떨어졌고
무능한 자가 나라일을 맡고 있자,
최치원은 당시 부패된 불교를 배타.
나라를 운영하는데 유교 접목을 시도
그나마 자신의 입장을 들어준 왕이 물러나고
왕권 교체가 되고 우매한 왕이 탄생되고 나서
더욱 신라가 부패하자 산속으로 들어간 최치원,
최치원의 뜻은 결국 이조시대에 가서야 펴지게 되지만,
이조 말기는 신라 말기와 흡사한 양상으로 무너져간다
지리산 쌍계사 일대에는 최치원의 남긴 자취가 많다.
특히, 함양 상림은 함양태수 최치원이 인공조림한 곳.
1천100년 전 함양의 위천 범람을 막기 위한 치수사업
6만3천평 숲에 116종류 나무 2 만그루가 있는 곳
꿀밤나무가 많아 다람쥐들이 어린이 눈길을 끈다.
당시 대관림 중간이 훼손돼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고
마을이 형성된 하림은 흔적만 있고 숲은 상림만 남았다.
상림에는 뱀이나 개미, 해충이 없다고 한다.
홀어머니가 산책을 나갔다가 뱀에 놀란 이후
최치원이 주문을 외운 후부터 사라졌다는 전설
상림에는 백성을 사랑한 선생의 마음과 함께
지극한 효성이 깃들여 있고 볼거리들도 많다.
보라색 연꽃이 수려한 자태를 드러내는가 하면
각종 수초들이 물 속에 잔뿌리를 내린 채 떠 있다.
활엽수림 상림은 12월초까지 낙엽 경관이 멋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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