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녕(朔寧)은 경기도 연천군(漣川郡)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일부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삭읍(朔邑)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는 동주(東州:鐵原)에 속했으며, 1106년(예종 1)에 승령현(僧嶺縣) 감무(監務)를 겸하여 삭령으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414년(태종 14)에 안협현(安峽縣)을 합쳐서 다시 안삭군(安朔郡)이 되었다. 1416년 안협현을 다시 설치하여 삭령현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삭령군(朔寧郡)이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이 폐지되어 내문면(內文面), 인목면(寅目面), 마장면(馬場面)은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에 속하고, 나머지는 연천군(漣川郡)에 병합되었다.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始祖)로 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낭장(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경전 부사(慶殿副使)를 역임했던 최연(崔 )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낭장(郎將)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윤문(潤文)은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윤문의 셋째 아들 사유(士柔)가 태종(太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春秋?記事官)을 역임한 후 장흥고사(長興庫使)를 거쳐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항(恒)은 삭녕 최씨 가문을 명문의 반석(盤石)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世祖)를 도와 문물제도(文物制度)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고,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訓 民正音解例)], [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 등을 찬진했다. 역사(歷史), 언어(言語), 문장(文章)에 능통하여 당대의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또한 항(恒)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올랐고, 형조(刑曹), 공조판서(工曹判書),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근면 성실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품으로 40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한 번도 탄핵을 받거나 외직(外職)으로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광해군(光海君) 때 어우당(於于堂) 류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항(恒)이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 할 무렵 세종(世宗)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 한 마리의 큰 용(龍)이 성균관 서편 잣나무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나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윽고 과거(科擧)를 보고 장원급제한 사람을 찾아보니 다름아닌 바로 그 선비였으며 훗날 명신(名臣)이며 대학자(大學者)가 된 태허정(太虛亭) 최 항(崔 恒)이었다. 그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영린(永潾)과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영호(永灝)는 항(恒)의 아들로 가문을 더욱더 빛냈다. 항(恒)의 증손이자 전첨을 지낸 수진(秀珍)의 아들인 흥원(興原)은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어 1568년(선조 원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장령(掌令), 정언(正言), 집의(執義), 사간(司諫),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여 영의정(領議政)에 기용되었다.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죽은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2 등에 추록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영(穎)의 아들 상중(尙重)은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서쳐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00년(선조 33) 헌납, 지평(持平)을 거쳐 1602년(선조 35)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대사헌(大司憲)에 가증(加贈)되었다.
변( )의 아들 동립(東立)은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어 임진왜란 때 능참봉(陵參奉)으로 임금을 의주(義州)로 호종하고 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1595년(선조 28) 봉교(奉敎)를 거쳐 1597년(선조 30)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599년(선조 32)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뒤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고 부임하여 이도(吏道)를 바로 잡았다. 그의 동생 동식(東式)은 당대의 문관(文官)이며 의병장인 우성전(禹性傳)의 문인(文人)으로,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가 관개(灌漑) 사업을 크게 일으켰고, 1612년(광해군 4) 보덕(輔德)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상중(尙重)의 아들인 연은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 장령(掌令),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고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연의 동생 온( )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다가 1653년(효종 4)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행(荇)의 손자이며 휘지(徽之)의 아들인 계옹(啓翁)과 시옹(是翁) 형제는 삭녕 최씨(朔寧崔氏)가문을 문(文)의 가문으로 더욱 빛냈다.
계옹(啓翁)은 지평(持平)으로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 온 후에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지냈고 그의 동생 시옹(是翁)은 윤 증(尹 拯)의 문하생으로 지평(持平)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실학파(實學派)의 거두(巨頭)이며 한국 사상사(韓國思想史)에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한기(漢綺)는 항(恒)의 14세손이다.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였고, 1872년(고종 9)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의 시종(侍從)이 되자,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했고,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했다. 성리학의 배타적이고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이론을 전개한 점에 있어서 한국 사상사(韓國思想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또한 삭녕 최씨(朔寧崔氏) 가문을 덕망있는 가문으로 이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남한에 총 9,027가구, 37,8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
[출처] 삭녕최씨 시조 고려 최천로 평장사=>최항,최한기등 대학자 배출|작성자 개벽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