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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덕도 대구축제(왼쪽)와 대구탕. |
- 입이 커 '大口' 먹성 대단해
- 고등어·오징어도 한입에 삼켜
- 신석기 유적서 뼈 다량 출토
- 수천 년간 포획된 것으로 추정
- 서해서는 17세기부터 잡혀
- 조선시대 겨울이면 궁궐 진상
- 군사들 위로하려 배급하기도
구름 걷은 후에 햇볕이 두텁도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은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끝없는 물결이 비단을 편 듯 고요하다.
-윤선도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동사(冬詞) 중-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이 계절에는 그저 뜨끈한 국물이 제격이다. 그중에서도 때론 밥과 함께, 때론 애주가들의 술안주로 우리네 식탁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대구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대구(大口)'다.
남해와 동해가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한 부산은 수산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이에, 부산 사람들은 일찍부터 대구 청어 홍어 농어 광어 고등어 조기 숭어 등과 같은 물고기를 포획하며 살아왔고, 이로 인해 부산의 식탁은 한층 풍요로울 수 있었다. 수천 년 전부터 그래왔 듯이 앞으로도 부산 사람들은 이 물고기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다. 우리는 이 물고기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나마 이름을 아는 정도가 다일 것이다. 왜일까? 혹시 너무나 친숙한 나머지 그만 무심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오랜 세월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동지애'의 마음으로 이들 물고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생각보다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에,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나 보고자 한다. 오늘 만날 첫 번째 주인공은 찬 바다의 기운을 가득 품어 살이 오를 대로 오른 '대구'다.
■입이 큰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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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삼동패총에서 발견된 낚시 바늘(위)과 뼈로 만든 작살 . 부산박물관 제공 |
대구는 대구목 대구과에 속하는 한류성 물고기로, 일본 동북지방 이북의 태평양 연안, 베링해,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 등 북태평양에 널리 서식해 왔으며 한반도 동해와 서해에도 분포한다. 여름에는 수심 800m까지 내려가 생활하며 겨울에는 그보다 얕은 곳으로 이동한다. 예로부터 대구는 '입이 큰 물고기'라고 하여 '대구어(大口魚)', 혹은 머리가 커서 '대두어(大頭魚)'라고 불렸으며 간혹 '화어(
魚 혹은 夻魚)'로 표기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는 '대구어'로, 서유구(徐有榘)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는 '화어'로 표기된 예가 그것이다.
입이 커서인지 대구는 먹성도 남다르다. 청어 고등어 명태 가자미 상어새끼 오징어 문어 새우 등을 통째로 삼켜버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새끼를 잡아먹기도 한다. 이렇게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다 보니 몸집도 크다. 몸길이는 평균 40~110㎝이지만 그 이상인 녀석들도 있다. 또한, 대구는 한 번에 산란하는 양도 만만치 않다. 암컷 한 마리가 한 번에 200만 개 정도를 산란하는데, 그 중 상당수는 소멸되지만 워낙 산란하는 양이 많은 탓에 성어로 성장하는 수가 많다. 게다가 뚜렷한 천적도 없는데다 수명도 30년가량 되기 때문에 개체수가 많은 편에 속한다. 산란기는 12월부터 2월 사이이며 부산 가덕도, 진해, 거제 근해 등 한반도 남해 동부지역이 대표적인 산란지다.
■남쪽 바다의 대표 물고기
한반도 바다에서 언제부터 대구가 포획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의 대표적 신석기시대 유적인 동삼동패총을 비롯해 연대도패총, 송도패총, 욕지도패총에서 도미, 방어, 참치, 농어, 정어리, 돔 상어, 가오리, 숭어 등과 더불어 대구의 뼈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살던 인류의 먹거리였음은 분명하다.
대구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많지 않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오면 여러 사료에서 대구를 발견할 수 있다. 대구는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최초로 확인되며, 1469년(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와 1531년(중종 26)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
尾錄) 등과 같은 개인 일기에서도 대구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렇듯 여러 사료에서 대구가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조선 초기에 비교적 많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15세기와 16세기에 각각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대구는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많이 났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서해에서도 대구가 잡히기 시작했다. 1611년 허균(許筠)이 도문대작(屠門大爵)에서 "대구는 동남서해안에서 모두 생산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다만, 이 무렵 서해에서 대구가 동해나 남해만큼 흔하게 잡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동래부사를 지냈던 이형상(李衡祥)은 1694~1696년에 저술한 강도지(江都志)(강도는 지금의 강화도를 이른다)에서 "대구, 청어 이상 두 종류는 동해에서 생산되는데, 계유년(1693년)부터 많이 잡히고 있다"고 기록했다. 서해에서 대구는 17세기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많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18세기 중엽 간행된 여지도서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15~16세기 대구 산지는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였으나 18세기 중엽에는 이 삼도 외에 황해도와 충청도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남해에서 나는 대구는 동해계이지만 서해의 대구는 이와는 차이가 있다. 산란기가 달라 어획기도 다르며 몸집도 동해계 대구에 비해 작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대구는 북쪽 지방 것이 가장 크고 빛깔이 누렇고 살이 쪄 있다. 동해 것은 빛깔이 붉고 작은데 중국인이 이를 가장 좋아한다. 서해 것은 더욱 작다." 이렇듯 서해에서 나는 대구는 북해나 동해에서 나는 대구에 비해 몸집이 작은데, 그 때문인지 요즘도 서해 대구는 '왜대구'로 불리기도 한다.
동해의 대구는 산란기인 12월부터 2월 사이 산란에 적합한 수온을 찾아 남쪽 바다로 이동한다. 이때가 되면 남쪽 바다는 대구로 넘쳐났고 어부들도 만선의 기쁨을 누렸다. 동해에 명태가 있고 서해에 조기가 있다면, 남해에는 대구가 있었다. 이렇듯 대구는 수천 년 전부터 남쪽 바다를 대표해 온 고마운 물고기였다.
■귀하고 귀하신 몸
대구는 공상(供上)을 통해 궁궐에도 들어갔다. 궁궐에 들어간 대구는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 왕대비전(王大妃殿) 등으로 보내져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 사람들의 찬거리로 사용됐다.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따르면 궁궐의 어물, 육류, 식염 등을 담당한 사재감(司宰監)에서는 매일 대구 두 마리를 대전과 중궁전에 올렸고 세자궁과 세자빈궁에는 사흘마다 대구 네 마리를 공상했다. 왕의 유모인 봉보부인(奉保夫人), 왕자와 왕녀의 유모인 아지(阿只)에게도 각각 사흘마다 대구 한 마리씩이 지급되었다. 그에 반해 상궁, 시녀, 무수리, 방자, 아지 몸종 등 궁궐 일꾼들에게는 대구가 아닌 조기, 청어, 준치 등을 지급했다. 대구가 궁궐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대구는 호궤(犒饋)를 통해 군사들에게도 지급되었다. 호궤는 국방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을 베푸는 것을 말하는데, 사료를 보면 장교 이상에게만 지급된 것으로 나온다. 일반 군졸들에게는 대구에 비해 천하게 여겨졌던 명태가 배급되었다. 명태 입장에서는 서운할 일이지만 호궤의 물목에도 엄연히 위계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달 12일과 13일, 부산 가덕도에서는 제1회 대구 축제가 열렸다. 많은 사람이 갖가지 대구 요리를 맛보고, 더불어 풍어제와 맨손잡기 등 다채로운 행사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새해 1월 한 달간은 대구를 만날 수 없다. 남획으로 개체수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금어기를 둔 탓이다. 무려 한 달간이나 생대구의 맛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그 또한 대구의 포실한 속살을 보다 오랫동안 만나보기 위함이니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귀하신 몸, 생대구면 어떻고 냉동대구면 어떠하겠는가. 오늘 저녁,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뜨끈한 대구탕 한 그릇으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 새해를 힘 있게 열어보자.
부산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