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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yLoveChina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북한 감리교회사
윤춘병 감독 (감리교사학회장)
제1부 - 초기 북한감리교회사
1. 들어가는 말
1) 북한지역의 경계선 문제
오늘 남북한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1945년 세계 제2차 전쟁이 종결된 당시에는 3․8선이 그 경계선이 되어 있었고 6․25전쟁이 지나간 후에는 휴전선이 남북한의 경계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북한감리교회사라면 휴전선 이북에 설립되어 있던 감리교회와 감리교회 소속 기관들의 활동상황이 된다.
북한지역 감리교회 선교사업은 6개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주․평양․영변 등지는 미감리교회 선교사들이 개성․ 철원․ 원산 등지에는 남감리교회 선교사들이 각각 주재, 선교사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조선감리회를 창립한 후에는 이전 남북감리교회 지역을 3부연회로 분할 조직했는데 전자 미감리교회 지역이던 해주․평양 영변은 서부연회로, 후자 개성은 중부연회로, 철원․원산 등은 동부연회 소속으로 각각 분할 두 연회에 속해 있었다. 오늘 이 글에서 취급하는 것은 북한지역 선교에 역사적 상황과 이 지역 교회의 특수성을 규명함으로 앞으로 북한선교사업 재건에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데 일조(一助)코자 한다.
2) 개신교회의 한국 선교과정
"한국 선교가 역사적으로 문이 열린 것은 미국 감리교회에 역사적인 백주년과 같은 해가 된다. 미국 감리교회 조직은 1784년에 이루어졌고 한국 감리교회 선교의 문이 열린 것은 1884년이기 때문이다.… "
위의 말은 1884년 내한하여 고종으로부터 의료와 교육사업의 윤허를 얻은 맥클레이(R.S. Maclay)의 말이다. 일본 감리교 선교 관리자였던 맥클레이는 친구 가우처(J.F. Goucher)와 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권고로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왕으로부터 의료와 교육 사업에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미감리교회 맥클레이에 의해 한국 왕으로부터 선교사의 공식 입국을 허락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 장로회에서는 언더우드와 헤론을 먼저 조선 선교사로 보냈고 감리교회에서는 장로회보다 3개월 늦게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을 보냈는데 이들은 일본에서 만나 1885년 4월부터 그 해 여름 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물론 스크랜튼과 헤론 등 감장선교사 4가족이 서울에 들어와 정착했다. 이로써 1800년 동안 열고자 했으나 열지 못했던 선교사 입국의 문이 공식으로 열린 것이다. 이 문을 감리교 맥클레이 박사가 열었던 것이다.
2. 남북 감리교회의 북한선교
1) 미감리교회 북한선교 - 평양을 중심으로한 평안도 선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고종으로부터 허락 받은 교육과 의료사업으로 한국 민중이 요구하는 일에 묵묵히 봉사하면서 조심스럽게 복음전도를 모색해 나갔다. 먼저 아펜젤러는 정부에서 요구하는 배재학당의 교육을 통해 개종자를 얻는 데 주력했다.
1887년 7월 24일과 10월 2일에 배재학당의 학생 박상증과 한용경에게 각각 세례를 주었고 같은 해 10월에 만주 로스 목사의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최성균 부부, 장점화 등 학습인과 세례인 7명을 얻어 정동제일교회의 전신인 베델교회를 창립했다. 다음 주일에는 학습인 이었던 최성균 부인에게 세례를 주어 여성 세례인을 배출시켰고, 같은 날 그는 여성 세례인까지 참석시킨 자리에서 스크랜튼박사와 같이 성찬식을 거행했다. 한국 개신교회로서는 최초의 성찬식이었다. 같은 달 아펜젤러는 최성균과 장점화를 의주와 평양에 권서로 파송하여 교회설립에 주력케 했다.
그보다 앞서 한국 세관에 근무했던 헌트와 같이 1887년 여름에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평양을 방문한 아펜젤러는 1888년 언더우드와 같이 두번째로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렀을 때 박상모(朴相模), 송상하(宋相夏), 장진방(張鎭邦), 이의석(李義錫), 김상옥(金相玉), 이응인(李應寅) 등 세례 학습인 16명을 얻어 시내 교동에 기와집 1동을 구입한 후 의주감리교회를 창립했다. 1887년 10월 서울에서 첫 베델교회를 창립한 아펜젤러는 1888년 의주에서 두번째로 감리교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북한지역이 감리교회에 제 2선교지임을 암시해 주는 예시라 하겠다.
1889년 스크랜튼이, 1890년에는 헐버트(H.B. Hulbert)와 북장로회의 마펫(S.A. Maffett) 들이, 1892년에는 홀(W.J. Hall) 박사와 존스(G.H. Jones)목사 들이 평양과 의주를 여행하는 중에 북한 선교의 중심지는 의주가 아니라 평양이 적합한 곳임을 인식한 후, 1892년 가을에 모임 선교회에서 홀(W.J. Hall) 박사를 평양 주재 선교사로 파송했고, 홀은 93년에 김창식 전도사를 대동한 후 평양에 부임하여 서문통에 가옥 3동을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후 홀은 의료, 교육, 전도 등 세 사업을 동시에 착수했다. 그는 하루에 50~60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학생 8명을 얻어 영어 등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고 주일이면 은밀히 모이는 예배에도 황정모, 오석형, 리향선, 김낙선, 박관주, 조한수, 김재선, 주겸조, 전룡기, 조영순, 전삼덕 등 남녀 다수가 참석하는 등 평양 선교사업은 의외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새로 된 교회는 엄청난 시련을 두번씩이나 당했다. 하나는 선교사 추방운동으로 나타났다. 장로회 마펫 등 세 선교사들이 한석진 조사와 같이 평양에 내려 동문에 집을 구입하자 평양 관찰사 민병석을 비롯하여 수구세력들은 민중을 선동하여 선교사 추방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감리교 김창식 전도사와 장로회 한석진 조사가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영미공사관의 활동으로 모두 석방이 될 뿐 아니라 민병석은 좌천되고 하급 관리들은 퇴직을 당했다. 이를 지켜 본 평양 민중들에게는 기독교는 힘의 종교로, 선교사는 양대인으로 인식하는 동기가 되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청일전쟁이었다. 성조기와 십자기를 내건 교회는 청일 양군이 모두 보호해 주었으므로 교회로 모였던 시민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교회를 찾아와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더욱 평양의 홀 박사는 전쟁 중에도 환자를 치료해 주다가 전염병에 걸려 순직하므로 평양 시민들은 교회에 대하여 또 한 번의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2) 황해도․평안도, 양도의 선교 중심지 평양
평양은 평안남도의 수도이자 관서지방에 있어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홀 박사가 순직한 후 평양 선교부에는 1896년 노블(W.A. Noble) 목사와 폴웰(E.D. Follwell) 의사가 파송되어 왔다. 폴웰 박사와 순직한 홀의 부인 로세타 홀 의사, 한국 여인으로 미국 볼티모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최초로 의사가 된 에스더 김박(김정동) 등 3인은 홀이 시작한 의료원을 기홀병원(紀忽病院)으로 확장한 후 의료선교를 계속했다. 홀 부인과 박에스더 등 두 여의사는 부인병원을 만들고 여자와 어린이 치료에 주력하는 한편 맹아교육을 실시했는 데 한국에서 맹아학교는 평양이 최초였다.
노블은 김창식 전도사와 함께 전도사업에 주력했다. 청일전쟁에서 민중들의 생명과 재산보호에서 돋보인 활약을 한 평양감리교회는 급성장했다. 1896년 교인 총수 61명이 1897년에는 265명으로, 98년에는 529명으로 증가되어 그 사이 교회당을 두 번 고쳐 건축하는 상황이었다.
북한 교회 설립의 주역은 전도부인들이었다. 노블 부인은 평양으로 부임한 즉시 부인 성경반을 개설하고 교리, 성경, 찬송 들을 중점으로 공부시켜 전도부인을 양성했다. 당시 노블부인의 성경반 출신으로 개척전도에 활약한 사람은 김세디, 김더커스, 노살롬, 김다비다, 이세벨리수산나, 전삼덕 들이었다.
16세기 결혼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후 재차 결혼한 김세디는 다비다와 함께 노블부인의 전도부인으로 평양시와 그 부근 촌락은 15년 동안 하루같이 다니며 전도하고 22처에서 성경공부를 시킨 결과 6개처에 교회를 설립했으며, 전도 인원수는 수천 명에 이르는데 진실한 신자가 된 이는 800명이 넘는다고 고백했다.
우상을 섬기던 대 부인으로 노블부인의 성경반에서 공부한 후 노블 목사의 권서로 전도부인이 된 김더커스는 평양 강서 왁새말, 진남포 등 평양 서부로 다니며 전도하였다. 고향이 강서 왁새말로서 벼슬에서 은퇴한 남편이 첩을 얻자 예수를 믿고 성경을 공부한 전삼덕은 고향 강서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운 후 교사 겸 전도부인이 되어 전도에 힘썼다. 노살롬 전도부인은 먼저 남편을 회개시켜 신학회에서 공부하게 한 후 노블의 파송으로, 남편은 강서울에 설립한 와이오밍 여학교의 교사로 가르치게 하고 노살롬은 전도에 힘써 교회가 설립되면 다시 자리를 옮겨가며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일했다. 함종, 강서, 들바위, 배꼿지선돌, 삼화, 삼흥, 문동, 광량만 등이 노살롬과 그의 남편 김재찬이 일한 곳이다. 김창식 전도사도 삼화에서 수회전도에 힘썻고 홀의 어학교사였던 황정모는 진남포에서 일한 결과 1897년에는 진남포에 비석리교회가 세워졌고 억랑기리교회 신흥교회 들이 그 후 차례로 세워졌다.
평양구역의 발전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노블이 부임하던 1896년에 교인수가 61명이던 것이 1898년에 529명으로 부흥한 평양구역은 1900년에는 두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평양을 중심한 평양북구역과 진남포를 중심한 평양서구역으로 나뉘었다. 두 구역의 교회와 교인수를 알아본다.
북구역 : 평양 696명, 칠산 92명, 봉동룡 102명, 귀염 55명, 요포 15명, 점섬 8명, 청산 61명, 강서 73명, 운산 33명, 합계 1,135명.
서구역(삼화구역) : 삼화 60명, 진남포 74명, 덕동 24명, 별섬 16명, 무주치 32명, 금당리 43명, 경청 39명, 비석고리 27명, 뒤골 46명, 박고개 30명, 선돌 49명, 줄바위 34명, 돌다리 33명, 오골 16명, 태용마 30명, 평매 67명, 돌매 8명, 합계 628명.
① 영변지역에 씨 뿌린 사람들
영변지역의 미감리교회 개척사업은 김창식, 벙커 선교사, 김더커스, 리수산나 전도부인 등 몇 사람의 전도활동으로 시작되었다.
1899년 순행전도사로 파송된 김창식은 평안북도 운산, 덕천, 개천, 양덕, 맹산, 영변, 희천 등지를 순회하며 성서와 교리서를 팔며 전도했다. 미감리교회에서 영변지역에 전도한 것은 김창식이 최초인지도 모른다.
벙커 목사도 그 무렵 운산 미국인 광산에 있으며 전도한 바 있다. 한국 정부 경영의 육영공원 교사로 왔다가 1895년 미 감리교 선교사로 전임하며 배재학당 교사겸 동대문교회 선교담당으로 일하던 벙커 목사 부부는 1898년 평안북도 운산 미국인 광산에서 1년 반 동안 있으면서 이웃 마을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되어 남녀 6백여 명이 모였다는데 이것이 평안북도에서는 1888년에 세워진 의주교회 다음이요, 영변구역에서는 초기에 세워진 교회가 된다.
다음으로 설립된 교회는 운산군에 인접한 북진교회였다. 1893년 평양 초대 선교사였던 홀 박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는 오석형의 형 오석경과 리수산나 부부가 1890년경 노블 감리사의 파송으로 평북 북진에 가옥 1동을 구입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리수산나 부부는 교인들의 남녀 구별을 위해 남자들이 먼저 예배드리고 돌아간 후에 부인들이 예배드리는 이중 예배로 교회를 이끌어가며 키웠다.
1869년 영국에서 출생한 후 1888년에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선교사로 내한한 모리스(C.D.Morris)는 1905년에 주택을 건축하고 영변읍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영변읍교회는 부진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모리스 선교사가 영변에 정착한 이래 읍내에서도 전도활동이 활발해졌다. 입교인 4명, 세례인 9명, 학습인 19명, 원입인 58명 도합 90명으로 교회의 틀이 잡혀져 갔다.
1906년에는 남녀 숭덕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시작했고, 1909년 교사를 신축한 후 숭덕소학교의 연장교육기관으로 숭덕중학교를 설립하고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같은 해 영변에 진료소도 개소했다. 의사는 폴웰이 평양 홀기념병원과 영변을 오가며 겸무했으나, 1909년부터 노튼 의사가 부임하여 진료소를 확충한 후 제중원이라 했다. 노튼 부인은 유치원을 개설하여 영변 어린이 종교교육의 기원을 만들기도 했고 그보다 앞서(1907) 평양에 있던 에스티 양(Miss M. Estey)은 영변여자보통학교와 관계를 맺고 여자 성경반(Bible Class)을 열기도 하여 여자 사역자 양성에 한 몫을 담당했다. 북진지역으로 장로교회가 몇 곳 있어서 장로교회를 접수하여 감리교 단일 지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1925년 12월 7일 영변지방회에서는 모리스 선교사의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영변읍 서부동 모리스 목사 기념 교회당에서 모인 25주년 기념축하 예배에서 모리스 선교사의 공적을 아래와 같이 치하했다.
"1905년에 남북지방 분립함을 인하야 씨는 영변지방을 담임하야 건설에 목적하고 소매를 부르것고 신을 들메고 나선 까닭으로 수년간에 씨를 기념하는 예배당과 남녀 학교와 남녀 선교사 주택을 양옥 3, 4층으로 건축하고 이로부터 이 지방 구역내에 49처 예배당과 장로목사 8명과 신자 3,193명을 산출한 것은 씨의 정신적 노력과 육체적 노력에 누수로 비저노흔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② 황해도지역의 교회개척 상황
당시 평양 구역에서 제일 늦게 전도가 시작된 곳은 황해도지역이다. 물론 1899년 김더커스 전도부인이 평북 영변을 거쳐 황해도, 수안, 신계, 서흥, 봉산, 청주 등지로 수차 순행하여 씨를 뿌린 바 있다. 그 후 평양구역에서 황해도 지역에 전도를 시작한 것은 1902년 5월 제18회 선교회에서 김창식을 신계구역으로 파송하면서 본격적인 교회 설립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사도 바울이라 불리는 이 충직한 형제가 복음 일선에 투입되기는 세번째가 된다. 그는 평양 개척시에 영광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재까지 있던 삼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음사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고, 금년 4월 초 가족을 이끌고 신계로 온 김목사는 즉시 살 집을 구하였다. 구역은 500리에 뻗어 있다.…. 그는 권서들과 같이 부락마다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그가 가는 곳곳이 어디든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속회가 창립된다. 그가 지나간 곳이면 반드시 교인을 키울 일꾼이 필요하게 된다.
신계읍교회에 자리잡은 김창식 목사는 1903년 서흥군 두무골교회를 세웠으며 그후 계속하여 배미창교회, 양덕골교회가 설립되었다. 1906년말 통계로는 9개 교회와 11개 기도처 그리고 91개 마을에서 교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김창식 목사는 1907년 내내 황해도에서 순회전도에 힘썼고 배내일 전도사는 신계읍에서, 오태주는 배미창교회에서 일했다. 1901년도에는 이미 설립된 서흥, 두무골교회를 중심으로 서흥구역이 이루어졌다. 서흥군 능리교회, 방곡리교회, 터골교회, 어룡교회, 솔골교회, 송전교회 등 6개 교회가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서흥, 신계에 교회가 개척되던 1901년 황해도 동부지역은 지방 소속에 변동이 많았다. 1901년 개척 당시에는 조선 북지방에 편입되어 있었고 1905년에는 해주를 중심으로 조직된 황해지방에 속해 있었다. 1908년 조선 연회가 조직된 후 서울지방, 평양지방, 영변지방, 수원지방, 충청북지방, 충청남지방으로 지방을 조정할 때에는 평양지방에 속해 있었다.
3) 해주지역 선교부 설치와 선교사업
황해도에는 본래 감리교회 제물포구역 존스 목사의 지도로 연안 해주지역을 김기번, 이명숙, 복정채, 하춘택 들이 1897년 이전부터 무시로 순회하며 전도했고, 장로교회에서도 같은 지역에 다니며 전도하여 한때 경쟁이 되기도 했으나 장로회측에서 선교사 주재지(Missionary Station)를 재령으로 정하게 되자 감리교회에서는 선교부 설치 장소를 해주로 예정한 후 교회개척을 진행시켜 나갔다.
황해도지역에는 1897년 8월 이명숙이 설립한 세 교회와 1898년에 세운 연안읍교회가 있다. 신자 76명인 남산당교회와 연안읍에서 10마일 떨어진 작은 촌에 나무골교회도 있다. 교인은 세례인 1명을 포함 어린이까지 19명 뿐이다. 그리고 연안읍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 나진포교회가 있다. 교인은 학습인과 원입인 합하여 25명으로 역시 작은 교회다. 넷째로 연안읍교회가 설립되어 예배실을 마련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보다 먼저 해주읍(海州邑)교회가 설립되었다. 해주는 황해도의 수도인 만큼 시골 어느 지역에 교회를 설립함 보다 큰 의의가 있다.
이처럼 황해도 감영이 소재한 수도 해주읍에 교회가 세워진 후 같은 해 해주 근처에 꽃매교회가 세워졌다. 불신자 김응수가 설립한 꽃매교회는 한 마을 전체가 믿어 신앙촌을 형성시켰고, 이웃마을에서도 1~2가정씩 신자가 생겨 1년만에 150여원을 헌금하여 마을에서 제일 큰 집을 구입,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1892년 경에는 입교인 1명, 세례인 17명, 학습인 27명을 세웠으며 성찬식도 거행하는 실적을 올렸다. 교회는 황해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배천, 평산에 이어 1892년 법흥리, 서두버리, 단리미 등에도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신천에는 권사 함베드로가, 서흥에는 권사 고치일이 각각 전도하여 그 해에 교회를 세웠다. 1902년에는 황해구역으로 승격시키고 케이블 선교사를 담당시킨 후 장차 선교사 주재지로 터전을 닦게 하였다. 당시 교세는 설교자 19명, 학습인 455명, 원입인 120명, 아동세례 6명, 장년세례 85명, 1년에 헌급액 205불이었다.
1904년 선교사 크리케트(C. Crichett, 1903년 내한, 1909년 귀국)를 황해지역 전도사업으로 파송하고 해주에 주재시켜 해주 선교부가 설치되었고 1906년 해주 연안구역을 평양지방으로 소속시켰으며 1912년 해주지방으로 독립되었다. 1908년 노튼(A.H. Norton M.D)이 해주로 부임하여 병원을 건축한 후 이를 구세병원이라 불렀다. 그 후 홀(R. Hall; 평양에서 별세한 홀의 자제) 박사가 부임하여, 구세 요양원까지 세우고 문창모와 같이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는 등 결핵환자 치료에 개척자가 되었다.
3. 남감리교회의 북한선교
1) 남감리교회 초기 개성사업
1896년 8월 리드 박사가 가족을 인솔하고 한국 최초 선교사로 부임하여 그 전 해에 구입한 남송현에 입주했다. 그 후 북감리회 스트랜튼 목사는 자신이 담임한 상동교회 김주현(金周鉉 )과 대영성서공회 권서 김흥순(金興順)을 남감리교회로 보내주었고 리드 박사는 그들을 서울 북방 벽제, 고양지역으로 임명하자 그들은 성경을 팔며 전도했다.
이들이 1 년간 전도에 힘쓴 결과 최초 남감리교회의 신앙공동체는 고양(高陽)에서 이루어졌다. 1897년 5월 리드 박사는 고양에서 장년 24명, 유아 3명에게 세례를 주고 남감리교회의 첫 고양교회를 세웠다.
고양교회는 초기 경기북부와 강원일대에 일꾼을 보낸 모교회가 되었다. 파주교회도 고양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조 씨가 고향인 파주에 내려가 세운 교회였고 서울 광희문교회도 고양 교인 두 가족으로 인하여 세운 교회였다. 고양교회 출신의 백사겸은 특이한 전도사였다. 그는 소경 점술인으로 돈을 많이 모아 유족하게 살았으나 마음의 갈등은 이길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예수를 믿고 죄악으로 모은 재산을 전부 남에게 주어 버린 후 전도를 떠났다. 가는 곳마다 교회에서 간증 부흥회를 부탁해왔고,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종으로 거듭나 대환영을 받았다. 그는 리드의 전도사가 되어 30년 동안 철원, 김화, 평강, 서울, 장단, 풍덕, 고양, 파주, 평양까지 다니며 교회를 세웠는데 그 대표적인 교회가 장단, 감암리, 개성 남부교회 들이다. 고양을 중심으로 점화되기 시작한 남감리교회 선교사업은 계속하여 벽제, 문산포, 적성, 연천, 강원도, 김화 등으로 확장되었다. 백사겸 윤승근(尹承根), 이덕수(李德秀) 들이 주역이었다. 그 중에 윤승근에 관한 "남감리회 소사"(南監理會 小史)에서는 그의 순교자적인 선교활동을 기록하여 초기 민중선교의 역사를 남겨주고 있다.
본래 남감리교회는 선교본부를 개성에 설치키로 하고 윤치호와 리드가 개성을 방문한 후 윤치호의 이모부 이건혁을 통해 선교기지와 그 가옥을 돌아본 바 있다. 그 후 개성선교는 1897년 1월 리드 박사 다음으로 입국한 콜리어에 의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1897년 리드 박사는 지방을 순회하며 구역회를 사회했다. 그 해 1월 16일 주일 제1회 서울구역회를 고양읍교회에서 열고 먼저 성찬식을 집례했다. 이 성찬식은 남감리교회가 한국에서 거행한 최초의 성찬식이었다. 다음 날은 문산포교회에서 송도(개성)구역회를 개최했다. 그는 1897년 설립된 포천군 용상골교회에서도 구역회를 하였다. 리드는 먼저 설교한 후 장년 13명, 어린이 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속장과 기타 임원을 임명한 후 당회를 조직했다.
남감리교회에서는 제1회 지방회를 1897년 9월 10일 한국 선교 관리자 리드 박사의 사회로 서울에서 열었다. 그 때 선교지역을 두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경성구역이요, 다른 하나는 송도(連環)구역이다. 경성구역은 리드 박사가, 송도구역은 콜리어 목사가 각각 담당했다. 그 해 11월 15일 개성으로 부임한 콜리어 목사는 이건혁 씨의 협력으로 개성 북부 산지현(山芝峴 )에 있는 삼포막(參圃幕)을 구입, 선교사 주택으로 삼고 인삼 재배인들에게 전도했다. 그 결과 불과 수주 만에 마석제(磨石製) 가옥을 산뜻하게 수리하고 그 한 방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장소가 좁을 정도였다. 그 해 12월 8일 리드 박사 사무실에서 제1회 조선선교연회가 열렸다. 참석인은 리드, 콜리어, 윤치호, 리드 부인 그리고 세번째로 입국한 여선교사 캠벨 부인 등 5인이었고 서기는 콜리어 목사였다.
이 회의에서는 미국 선교본부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청사항을 결의한 바 있다.
① 개성에 설립할 병원 의사 1명
② 개성에 설립할 학교 교사 1명
③ 경성에 주재하며 강원도지역 복음담당 선교사 1명
한편 콜리어 목사는 선교회에서 임명 받은 후 개성으로 간지 불과 1개월이 안되어 학습인 9인을 보고하였고, 원입인(Seeker)도 많았다. 이 교회는 훗날 북부교회로 성장했다. 1899년 리드 박사의 일꾼인 맹인 전도사 백사겸(白士兼)의 전도로 남부교회가 조직되었다. 이로 인해 남북 두 교회는 개성시와 인근지역 복음화 운동의 중심 교회가 되었다.
1898년 5월 15일에는 남감리교 선교사로 전임한 하디(R.A. Hardie M.D)가 개성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여 남성병원의 기초를 놓았다. 같은 해 12월에 내한한 하인즈(Miss F.Hinds)와 1899년에 내한한 케롤(A. Carroll)이 하디의 진료사업을 도우며 완고한 개성 여성들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케롤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한해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바쁜 1년이었습니다. 쉴새 없이 몰려드는 여인들을 만나고 가르치며, 약을 처방해 주고 또 틈틈이 한국어를 배우며 기계처럼 살았습니다. 저나 힌즈에게는 전문 의료 기술이 없읍니다만 주민들은 하디 박사가 개성에 머물던 기간중에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육체를 돌보아 주었던 구제 행위를 잊지 못하고 우리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간단한 치료밖에는 해 주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만 어떤 이들은 다시 와서 고쳐준 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하고 또 보답하는 뜻에서 계속 찾아오는데, 올 때마다 친척이나 친구를 데리고 와서는 복음을 경청하고 영혼의 치료까지 받기도 하였습니다."
2) 원산선교사업
하디가 맥길로부터 이양받은 원산사업은 진료소 한 곳을 비롯하여 12명으로 구성된 신앙공동체와 원산 인근 3개 부락에 조직해 놓은 그룹에 불과했다. 하디가 이 사업을 인계받은 후부터 힘쓴 곳은 원산항의 교회였다.
원산 인근에는 맥길의 전도로 조성된 신앙 그룹 세 곳이 있었다. 하디는 이 세 곳까지 이양받은 후 자주 심방하였다. 한 곳은 원산에서 18마일 떨어진 학익동으로서 이곳에는 세례인 11명을 포함하여 23명의 교인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또 한 곳은 유명한 사찰인 석왕사(釋王寺) 입구의 작은 마을에 자리잡은 사기동(Sa-Ki Tong)이다. 이 마을에는 12명 정도의 관심있는 사람이 있고 그 중의 한 명은 세례받은 준교인이다. 세번째 그룹은 봉눈(Pong Nun)에 있다. 사기동에서 6마일 떨어진 봉눈에는 15명 정도의 학습인이 있는데 그 중에 9~10명은 세례를 받긴 했지만 영적 생활은 기대 이하의 수준 같았다.
1901년 로스(J.B. Ross M.D) 의사가 원산으로 부임하자 전도사업에 주력했다. 그는 철원 지경터(地鏡岱)로 가서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강원도에서는 첫 교회라하여 자주 교회사(敎會史)에 등장하는 교회이다. 그 후 하디는 지경터에서 10리 상거되는 김화읍 학사리 새술막에도 교회를 세웠다. 지경터 김화지역은 벽제 고양에서 김흥순, 김주현에게 전도받은 소경 전도사 백사겸이 송도, 장단, 고량포 등지에서 전도하였고 백사겸의 전도로 개종한 윤승근이 적성, 마전, 연천, 김화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며 복음의 씨를 뿌려놓은 곳이었다.
고양 벽제에서 출생한 윤승근은 기독교에 입교한 날부터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한 전도자였는데 풍설(風雪)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다가 금화 학사리(鶴沙里, 새술막)거리에서 쓰러져 순직한 신앙인이었다.
하디는 1901년 11월 23일 원산시 중앙에 마련한 새 교회당에서 구역회를 조직했다. 이 구역회에는 원산항교회를 비롯하여 학의동, 사기동, 봉눈, 지경터, 새술막교회로 이루어졌다. 남감리교회는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이 있었는데 1901년부터는 원산구역을 포함 세 구역으로 발전했다.
원산에 선교사업을 위해 투입된 케롤(Miss A. Carroll)과 노을즈(Miss M. Knowles)가 1901년 원산으로 임명되었고, 하디 부인과 당시 원산 감리로 있던 윤치호의 부인 마애방(윤부인) 들이 여성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윤치호 부인이 가르쳤으나 나중에는 노을즈 양이 가르쳤다. 그 다음 해에는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학생은 처음부터 15명이 왔다. 매주 목요일 오후에는 성경공부를 했다. 1903년에는 여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후에 루씨 유치원, 루씨 보통학교, 루씨 고등보통학교로 발전했다. 건축비를 보조한 사람이 미국 루씨 컨닝햄(Lucy Cuningham)이어서 교사(校舍)를 신축한 후에 교명을 루씨학교라 했다.
1903년에는 소년매일학교(Boy's Day School)을 하디가 시작했는 데 이 학교가 후에 많은 일꾼을 양성한 광명보통학교로 성장했다. 1906년에는 방을 한 칸 마련하고 반렬반이라는 이름으로 여자성경공부를 시작했는 데 이 학교가 후일 발전하여 보혜성경학원이 되었다. 교장은 쿠퍼(Miss S.K Cooper, 巨布計)목사가 맡아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많은 전도부인을 양성해 냈다.
원산지역의 교세가 1904년부터 급속히 부흥하는 추세를 보여 주고 있다. 아래 도표에서 원산지역 초기 발전상을 보자.
1905년에는 원산과 지경터 두 구역으로 분할하였고 1908년에는 지경터구역이 송도지방으로 편입되는 한편 원산구역, 영동구역, 회양구역, 안변구역으로 확장되면서 원산지방회를 조직하였다. 1901년에는 원산구역, 통천구역, 고성구역, 간성구역, 양양구역을 묶어 원산동지방을 구성하였고 원산 중리, 안변, 용봉, 고미탄, 회양 등 원산 이남에서 강원북부구역을 묶어 원산서지방을 구성했다.
3) 철원 선교 사업
철원읍은 본래 장로교회에서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1901년 하디 선교사가 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며 전도할 때 철원읍을 지나 지경터, 금화, 간성, 양양 등지에 교회를 세웠고, 지방회를 조직할 때 지경터 지방회라 했다. 지경터의 위치는 철원읍에서 6Km(15리) 정도 동남방에 내려가 있는 농촌이었다.
그 후 감․장이 선교지역을 분할할 때 철원읍이 남감리교회 지역으로 편입되어 1909년에야 비로소 남감리교회에서 이화춘 전도인을 파송했다. 그후 이화춘 전도사는 철원읍 장로교인을 인수한 후 항일 민족주의자였던 애국자 조종대(趙鍾大) 씨의 약국 마루에서 30여 명의 교인이 모여 창립예배를 보았다.
1909년도 연회록에 의하면 서울 송도 지방(감리사 저다인) 지경터 구역장 하디, 구역 전도사 이화춘으로 되어 있다. 이화춘 전도사는 지경터 구역장의 임명을 받아 철원읍교회를 창립했는데 이는 곧 철원읍교회는 지경터구역 소속으로 창립되었다는 것이다. 1911년에는 철원, 평강, 김화, 금성 4구역 34개 교회도 지경터 지방을 조직했다. 1917년 철원지방에 파송된 교역자는 철원구역박연서, 평강구역 미파, 김화구역 전재풍, 창도구역 강재희, 금성구역 미파로 되어 있다. 감리사겸 5개 구역 관할 목사는 히치(J.W. Hitch, 許雅各)가 담당했고, 틴슬리 양(Miss H. Tinsley)이 여성사업, 이화춘이 지방순회 전도사업을 맡았다.
1918년에 철원지방은 다시 서울지방에 소속되었다. 그 후 미국해외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미국 선교 본부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 철원지역에 대거 투자했다. 그 때 전곡교회, 안골교회, 연천교회, 철원읍교회 등이 건축되었고 1921년에 비로소 앤더슨 의사(E.W. Anderson M.D 安烈) 부부와 어윈 양(Miss C. Erwin, 魚源), 무스 목사 부부 등 선교사들이 철원에 주재하며 남선교사들은 전도사업에 여성교사들은 여자야학, 유치원, 재봉강습회, 요리강습회 등 여자 계몽사업에 주력, 선교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남감리조선연회에서도 1924년 철원지방을 독립시킨 후 장로사로서 양주삼(梁柱三)이 취임하여 선교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1917년 철원, 철원서, 김화, 금성, 평강 등 6개 구역에서 24년에는 창도, 철원, 철원서, 김화, 금성, 평강, 삭녕, 연천, 영평 등 9개 구역으로 확장시켰다.
4. 한국 선교사업과 관서지역의 특수성
1) 감․장의 선교지 분할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성장률은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폭발적인 성장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 선교에 있어서 남한 교회(감․장․성 등)의 성장률만 해도 일본, 인도, 멕시코 들에 비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관서지역 교회의 성장률을 본다면 그야 말로 폭발적인 성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가리켜 언필칭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정책으로 채택한 네비어스 방법(Nevius Methods)때문 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북한 교회사를 다루고 북한 교회 재건을 논하는 자리라면 선교사상, 관서지역과 관서 민중의 특수성을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지나가야 하리라. 그러면 한국교회 선교사상에 있어서 관서지역의 교회 성장률은 어느 정도 였을까? 표4는 서명원의 「한국 교회사」(대한 기독교서회, 1911)에서 발췌한 한국교회 성장률이다.
호주, 카나다, 북장로회 등 3장로회가 선교정책에 있어서 '네비어스'라는 동일 정책으로 선교사업을 진행했는데 왜 황해․평북․평남 3도에 만이 성장율이 월등이 높고 경기, 함남, 경북지역의 성장률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
그것만이 아니다. 캐나다 장로회는 함남북이라는 넓은 지역을 차지했고 호주장로교회는 부산, 마산, 진주 등 경남 남부지역을 선교지로 한 후 네비어스방법을 도입했는데 왜 나중에 들어와 지역적으로 열악한 강원 북부지역에서 일한 남감리교회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찰해 볼 때 관서 3도의 교회 성장은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있다기 보다 황해․평북․평남 3도에 어떤 특수성에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1) 미감리교회
위 표에 의하면 감․장은 1885년 한 해에 들어와 1929년까지 44 년간을 같은 기간과 같은 지역에서 전도사업을 펴왔는데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채용하지 아니한 감리교의 교세는 네비어스방법을 채택한 장로교의 교세보다 앞서면 앞섰지 뒤떨어지지 않는 상황에 있다. 특히 새문안장로교회보다 1주간 늦게 창립된 정동제일감리교회는 교인수에 있어서 또는 재정면에 있어서 앞서고 있다. 요컨대 기관사업에 주력했던 감리교회가 교회사업에 힘썼던 장로교회보다 앞선 수준에 있다는 것이 도표2의 상황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관서 3도 교회 성장률은 네비어스 선교정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관서 3도가 지닌 어떤 특수성을 발견하고 그 특수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관서 3도의 특수성
서명원은 그의 저서 「한국 교회사」에서 관서 3도민들의 특수성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첫째, 북한인은 남한인 보다 좀 더 개화되어 있었다. 한글은 물론 한문을 배운 이가 많았고 배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인은 대개가 한문은 물론 한글조차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둘째, 남한인은 유교사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새로운 사상에 거부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수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인은 개방적이다.
셋째, 남북한인의 경제적 차이가 심하다. 즉 남한인들은 농노형태의 소작인들이 위세 당당한 양반계층의 지주밑에서 허리를 굽히고 아첨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양반과 지주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민중계층은 좀더 기독교로의 개종이 어려운 상황이다.
반면 관서인들은 대개 자립적 중산층 즉 중소지주 자작농과 상인들이어서 양반이나 지주의 위세에 눌림없이 일종의 자유인에 속한다. 더욱 북한은 전답보다 산이 많은 지대여서 일찍부터 중국 무역에 힘썼고 국내에서도 상업에 종사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아니하고 살아간다. 중소지주, 자작농, 상업인들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오는 서구의 현대문화가 모두 기독교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립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교역자의 생활을 부담하며 유지비를 거출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적극으로 종교활동을 벌인 것이 관서지역의 특수성이라는 것이다.
넷째, 더욱 정치적 상황이 북한인들을 기독교로 들어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 1,400명 중 서북 출신이 1,350명인데 그중에 평안도인이 80%, 함경도인 20%라는 것이 하바드대학 와그너(E. Wagnar) 박사의 주장이다. 그런데 평안도 출신 과거 합격자가 1,000이라해도 쇄도정치하에 있던 한국 정부여서 정치인들이 이끌어 주지 아니하여 벼슬에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관서의 선비들이 장래에 빛을 보자는 데서 현대문화의 모체가 되는 교회로 물밀듯 들어왔다는 것이 관서에 교회 성장률을 높인 원인이라는 것이 이광린 교수가 "개화기 관서지방과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바다.
요컨대 남한인은 농노정도의 생활이어서 자유가 없고 폐쇄적인 반면 북한인은 중상층 자유인이고 경제적 여유가 있고 개방적인 데다 정치적 불평 등에 관한 심리상태가 기독교를 환영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3) 관서 선교에 대한 감리교회의 정책
위에서 보는 대로 관서지역이 선교의 황금어장이라면 왜 감리교회에서는 일찍부터 관서지역에 힘을 쓰지 아니했을까? 물론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1) 감리교는 본래 기관사업에 치중하였고 2)배재, 이화, 문서, 의료 등 이미 시작한 사업에 인적자원을 배치하다 보니 자연 북한으로 보낸 선교사는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장로교회에서는 본래 교회사업에 치중하기 위해 기관사업에 힘쓰지 아니했고 또 처음부터 평양에 마펫, 스왈른, 그레이, 함리 들을 보내 관서지역 선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 후 북장로교회에서는 선교사를 증원시켜 서북지역으로 많은 수를 보냈다. 그러나 감리교회에서는 한국에서 요구하는 대로 선교사의 증원을 충당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로교 4개 교파와 감리교 2개 교파가 선교지를 분할했다. 분할의 원칙은 아래와 같다.
① 이미 교회를 개척한 지역은 개척한 교파에 기득권을 인정해 주며 두 개 교파에서 같이 교회를 개척한 지역은 교회가 많은 교파에 양도한다.
② 선교사의 수 1인당 한국인(선교 대상자)을 같은 수로 할당하는 선에 서 분할했다. 선교사의 수가 많으면 선교 대상자의 수 도 많이 배당 되므로 선교지역도 넓게 차지하게 된다.
③ 서울, 평양, 원산은 공동구역으로 한다.
그러므로 관서지역에도 선교사의 수가 많은 교파와 1907년 이전에 이미 교회를 많이 설립한 교파에게 넓은 지역이 돌아간다.
그러면 선교지를 분할하던 1907년 장․감의 선교사 수는 얼마였을까? 장로교회 4개 교파에 선교사의 수 101명이었고, 감리교회 2개 교파에 선교사는 55명이었다. 도표 6에 선교사 수와 활당된 선교대상자의 수가 잘 나타나 있다.
5. 3․1운동
1919년 3월 1일 명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제창으로 시작된 조선독립운동 시위는 19년을 지나 20년까지 계속된 민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1919년에 독립운동이 발원된 이유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약소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의 붕어 독살설에 대한 민족의 의분에 두고 있으나 결국은 독립염원에 대한 민족적 염원이 그 원인이 된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선택한 것으로서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 기독교인 16명으로 모두 33명이다. 기독교인 16명 중에는 장로교 7명, 감리교 9명이 선발되었는 데 9명 중에 당시 북한 거주자는 해주의 최성모 목사와 평양 신홍식 목사였다.
3월 1일 서울의 시위와 같은 날에 일어난 지방시위는 개성, 평양, 원산, 선천, 안주, 의주, 진남포 등이었고, 그 밖에 전국 각지에서 시작된 시위는 1년을 두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편 3~4월에 시위가 1,214회(연인원 110만명) 있었는 데 그 중에 주도 세력이 분명한 311지역을 보면 기독교가 78지역에서, 천도교인이 66지역에서, 기독․천도 합동으로 벌인 운동이 42지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는 당시 인구의 2%내외가 되는 기독교인이 각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처럼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던만큼 피해도 컸다. 수감인원의 16.2%, 기소인원의 21.4%, 불기소인원의 11.7%, 체포자의 49.3%가 예수교인임이 확인된다. 또는 소각된 교회당 59처, 일부파괴 24처, 기독교학교 교사 3개교가 불탔으며 기독교인의 가옥으로 제암리 수천리 두 마을에서 불탄 가옥만도 70호(?) 가량 된다. 1919년 6월 30일 현재 투옥된 교역자 수가 151명이며 그 중에 사망자가 감리교회만도 근 30명이 된다.
한편 역사가 박은식에 의하면 전국에서 시위 횟수가 1,542회 참가 연인원 205만명으로 잡고 있으나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독립운동사」에는 110만명으로 기독되어 있으며,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들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사망자 중에는 감리교회 박석훈, 유관순을 비롯하여 제암리교회의 사망자 22명은 분명하나 전체 사망자 7,509명 중에 기독교인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체포, 옥고를 치른 사람들도 민족대표 33인중 감리교 9명을 비롯하여 수원의 김지환 등 수없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양지방 감리사 보고에 보면 "본 지방회를 개최하려고 할 때에 조선 목사 한 사람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겠다고 했다. 감옥에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학교 교사, 주일학교 교사 등 합한 수가 160인이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지방에서 160인이 구속되었다면 전국 감리교로 말하면 천 명이 넘을 것이다. 각 지역에서 시위를 주도한 단체와 개인이 교회가 많았던만큼 기독교인의 사망자 수는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추리된다.
6. 조선 감리교회 창립과 서부연회 조직
1) 교회 제도의 조직 - 남북감리회의 제도조직과 발전
1885년에서 1900년까지는 조선 전체를 조선지방으로 삼았고 1901년에는 조선을 3지방으로 분할할 때 북한지역 전체를 조선북지방으로 조직했다. 1905년 남쪽을 경기지방과 경기서지방, 북한을 평양지방과 영변지방으로 나누었고 조선선교회를 조직했으며 1909년에는 남쪽을 서울지방 수원지방, 충청남지방, 충청북지방으로 나누고 북쪽을 평양 영변 등 모두 5개지방으로 완전한 연회를 구성했다.
남감리교회의 연회조직은 다음과 같다. 1896년 선교초기에는 중국선교연회 조선선교지방으로 중국에 소속시켰다가 즉시 외형으로는 중국선교회에 소속시키되, 내용으로는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으로 조선선교회를 독립시킨 후 제1대 관리자 리드 박사가 취임했다. 1914년 선교연회가 조직되고 1918년 조선연회가 조직되어 완전한 연회를 이루었다.
2) 서부연회 조직
1930년 12월 남북감리교회를 합동하여 조선감리교회로 창립총회를 열고 교리 헌법 규칙 등을 제정한 후 제1대 총리사 양주삼 목사를 선택했다. 이로써 조선감리교회는 자치교회로 새 출발했다. 1931년 6월에는 개성북부교회에서 제1회 연회로 모여 조선교회를 중부, 동부, 서부 등 3연회로 나누어 조직했다. 1939년도 연회에 소속된 지방수를 소개한다.
가. 서부연회 : 영변지방, 평양지방, 진남포지방. 해주지방, 사리원지방, 강서지방
나. 동부연회 : 원주지방, 춘천지방, 강릉지방, 원산지방, 철원지방, 경동지방
다. 중부연회 : 평천지방, 개성지방, 경성지방, 경성남지방, 인천지방, 수원지방, 이천지방, 천안지방, 홍성지방, 공주지방
라. 현 서부연회 : (휴전선 이북) 연변지방, 평양지방, 진남포지방, 해주지방, 강서지방, 사리원지방(이상 원 서부), 원산지방, 철원지방(이상 원 동부), 평천지방, 개성지방(이상 원 중부)
위에서 보는 대로 휴전선을 경계로 한 후 남북의 지방수를 계산한다면 북한지역(서부연회) 지방수 10개처 남한지역(동부, 중부연회) 지방수 10개처로서 남북이 반반으로 동 수가 된다. 교회수에 있어서도 남한이 구역수 105처요, 교회수 411처이며 이에 비해 북한(서부연회)은 구역수 119처요, 교회수가 392처가 된다. 다만 서부연회 지역에는 남녀 고등학교 6개교가 있는 데 비해 남한에는 남녀고등학교 4개교 감신과 이화전문이 있고 감리교 본부(총리원)가 있으며 의료기관만도 북에 4개처(원산 구세 해주구세요양원 개성남성 평양기독병원)와 연합 1개처가 있는 반면 남에는 2개처 (동대문부인병원 세브란스)와 연합 1개처가 있을 뿐이다.
3) 일정말년의 서부연회
일정말년 감리교회가 당했던 수난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종래에 지녔던 구미 교회의 사상과 제도와 규칙을 전면 폐지하고 순 일본감리교회의 제도를 도입한 것이요.
둘째, 감리교회 개혁을 반대하는 교역자와 평신도는 모두 제거된 것이며,
셋째, 일제의 비협력자는 사법처리로 옥고를 치르거나 순직 순교케한 사건 들이다.
여기에서 간단히 기록코자 하는 것은
(1) 연회와 지방회가 해산되고 교구제로 개혁한 점.
종래의 3부 연회와 22개 지방은 폐지되고 도행정구역을 따라 교구로 재조직 되었다. 즉 강원동교구, 강원서교구, 충청교구, 경기남교구, 경기북교구, 경성교구, 황해교구, 평안동교구, 평안서교구 등 10개교구로 편성되었는 데 이에 오는 서부연회에 소속되는 교구는 아래와 같다. 평안동교구, 평안서교구, 황해교구, 강원동․서교구에서 반반 정도 경기북교구의 일부 등이다.
(2) 신학 및 신학교육의 변화
구약폐지 신약에서도 4복음을 정경으로 삼는다. 신학교 교육에도 4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 예수의 생애 복음서주해 등이 있을 뿐 신도사상(神道思想), 국체의 본의 (國體․本義), 유교(儒敎), 불교(佛敎), 일어(日語), 교련(敎鍊) 들을 넣고 있었다. 이에 반해 평양요한학원, 평양고등성경학교, 만주시학교의 교과목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즉 신구약개론, 신구약주해, 조직신학, 교리사 및 교리, 기독교교육, 교회사, 설교학, 목회학, 철학, 종교심리학, 음악 등이다.
(3) 반일 반개혁자들의 수난
반일 성향이 있는 교역자나 평신도는 사법당국에서 처리한다. 설교 사건으로 민족주의 경향으로 수난 당한 교역자들이 있다. 회양교회 담임자 권원호, 영변지방 황국주, 철원지방 강종근 들이 순교하였고 홍현설, 이진구 들이 각각 8 개월, 2년 8 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들이 모두 현 서부연회에 소속된 교역자들이다.
감리교 개혁에 반대편에 섰다가 정춘수 통리로부터 고발되어 형을 받은이와 교직에서 해직, 파면당한 이도 50여 명이 넘는다. 서부연회 출신 교역자로 정일형 송충국 전진규 들이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며 명란조 이윤영 이환신 박세광 배덕영 박영환 홍현설 이정렴 서기훈 등이 구속되었다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