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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행곡리(慶南 密陽市 三浪津邑 杏谷里)여여정사(如如精寺)는 금오산(金烏山)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앞으로는 유유히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고 천태산(天泰山)이 좌청룡(左靑龍)으로 오른쪽으로는 백호(白虎)등으로는 구천산(九天山)과 만오산(萬魚산)이 마치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포근히 감싸 안은 듯하다. 여기 저기 솟아오른 봉우리는 새벽 물안개에 싸인 듯한 모습으로 마치 물결 위의 한 송이 연꽃이 떠있는 것과 같이 아름답고 포근한 도량(道場)이다.
여여정사 사찰 터는 금오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금오산 중턱에는 옛날부터 구성지(九聖地)라고 하여 아홉 곳성지(聖地)가 있다고 전한다. 임란(壬亂)이 일어나기 전에 아홉 명의 도인(道人)이 득도(得道)하였다고 하여 구성지라 한다.
또 통점마을 구전에 의하면 몸이 아픈 사람들이 통점(桶岾)에 가서 목욕하고 흘러 내려오는 물을 마시면 고치기 어려운 고질별이 낫는다고 해서 몸이 아프면 통점에 가서 요양(療養)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통점에는 참으로 상서로운 기운이 도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초저녁 무렵, 행촌부락(杏村部落)노인들이 산불이 난 것을 목격하고 산불을 끄기 위해 통점에 올라가 보면 불이 난 곳은 없고 밝은 서기(瑞氣)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절터를 고르고 절을 지을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절터에 심은 나무에 물을 주고 내려오던 신도님들이 산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내려가던 길을 되돌아 황급히 올라갔는데 불길은 보이지 않고 서기만 비치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라보던 모든신도님들이 합장하고 인사를 했다. 이처럼 맑은 영기(靈氣)가 서려있는 곳에 절을 세운다면 청정(淸淨)한 수행의 대가람이 될 것임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일이 도 일어났다.
신도님들이 늘 이곳에서 나무를 가꾸고 물도 주면서 도량을 준비하던 중 정명월 회장님이 갑자기 누가 등을 떠미는 것처럼 빨리 하산 하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늘 삼랑진에서 6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갔는데, 그날은 이상한 예감에 바쁘게 서둘러 한 시간 앞서 내려가는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신도들이 "무엇이 그렇게 급합니까?"하고 묻자 "오늘만은 내 말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모든 신도들이 정명월 보살님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부산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늘 타고 왔던 그 시각의 기차가 탈선하여 아까운 인명이 많이 희생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과 신도님들은 영험(靈驗)이 서린 청정도량(淸淨道場)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절을 짓는 데도 거 깊은 신심(信心)을 갖게 된 것이다.
이곳은 통점부락, 절 골, 혹은 남촌(南村)이라고도 불렸다. 통점은 산의 지세가 물통처럼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어서 통점(桶岾)이라고 부른 것으로 여겨지며, 그리고 점(岾)은 지어진 곳이라고 해서 통점부락이라고 한것으로 짐작이 된다.
절 골은 먼 옛날에 절이 지어져 있다가 임란 때 소실(燒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남촌이라고 한 것은 분지가 되어서 바람을 막고 따뜻한 곳이라 남촌(南村)이라 이름했을 것이다.
이곳 절 골에 처음 왔을 때, 입구에 들어서니 계곡에 흘러 내려가는 맑은 물과 노송(老松)이 줄을 이어 반기는 듯 했다. 곳곳에 대나무 숲이 푸른 산기운을 더하고 은행나무 구 그루가 도량의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청정하고 맑은 기운이 한눈에 절터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일곱 여덟의 초가집에서 안식교인들이 생식을 하면서 기도원을 지을 것이라는 기대에 터까지 닦아놓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원 뒤에는 단군성전을 지어놓고 백공선사와 제자들이라 칭하는 이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도량에 맑은 기운이 있는데다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 절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안식교인과 단군성전이 미리 땅을 매입하고 교회 터를 닦아놓고 기도를 하고 있는 실정이라 절을 창건(創建)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마을에서 이장을 지내던 김경환이라는 안식교인이 스스로 자기 집을 사줄 것을 요청해왔고 통점마을의 집을 매입함으로써 통점부락 절 골에 작은 움막집을 마련할 수 가 있었다.
여여정사가 창건도량(創建道場)으로서 불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89년 범어사 금강암에서 기도를 하던 정여 스님이 관음기도 중에 우연히 꿈속에서 서기가 어린 맑은 도량을 보고는 그곳에 절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같은 꿈을 거듭 꾸고는 우연히 삼랑진 땅고개에 있는 선주원이라는 양로원 위문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꿈 에서 본 도량을 발견하게 되어 마음에 감화를 받고 이곳에 절을 지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대웅전 건립 발원을 하고 터를 닦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도 본 도량을 발견하게 되어 마음에 감화(感化)를 받고 이 곳에 절을 지을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 건립을 잠시 중단하고 물이 터져 나오고 거북과 자라가 쏟아져 나온 곳에 약사전과 용왕단(龍王壇)을 건립하게 된것이다.
법당 뒤편에는 철근골조로 약 108평 규모의 약사전을 건립하고 말사여래불을 모셨는데, 중국과 미얀마에서 조성해서 여여정사로 모시도록 준비한 뒤 대웅전 법당 봉불식과 함께 봉행 하였다. 약사전에는 금정석재에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황정 화강암 약사여래불을 중앙에 모셨는데 크기는 경주 석굴암부처님 규모이다. 경주 석굴암 부처님은 신도님들이 친견하고 싶어도 문화재이기 때문에 실제로 친견하지 못하고 밖에서만 참배해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아타가움을 덜기 위해 신도님들의 염원을 담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크기로 약사여래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좌우에는 거북석상 위에 감로병을 들고 계시는 관세음보살님 세분을 모셨다.
그리고 그 동안 여여정사에 인연이 있어 미리 모셨던 16나한과 마애삼존불상을 입구에 모셨다. 그리고 지장보살님의 석상을 모시고 물을 상징하여 용왕단을 두게 되었다.
편집 / 여여선원카페 동원(東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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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여정사
댓글 달아주심에 기분 억수로 좋습니다
좋은도량 좋은공기 그자리가 바로 여러분을 맞이합니다 여여정사 많이찾아오세요
꼭 한번 갈려고 합니다..
저도 어쩐지 여여정사 약사여래불이 뗑겼습니다. 무슨 느낌인지는 몰라도 웬지 부처님 모시면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겨서 저는 우리 아이들 부처님 두분을 모셔놓았습니다. 약사여래부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