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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공신당(功臣堂)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전사청(典祀廳) 종묘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성생위(省牲位)-제물인 소,양,돼지를 검사하던 곳. 찬막단(饌幕壇)-제사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곳. 판위대(版位臺)-어숙실에서 나온 왕과 세자가 정전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곳
종묘 수복방(守僕房) 종묘를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守僕 조선시대 단(壇)·묘(廟)·원(園)·능침(陵寢)·전(殿)에서 청소하는 일을 맡은 사람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
종묘 영녕전(永寧殿) 이 사당에는 조선 태조의 선대 4조 및 종묘의 정전(正殿:太廟)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 역대왕과 그 비(妃)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조선에서는 국왕이 승하하면 종묘 정전에 모시었다가 5세의 원조(遠祖)가 되었을 때 영녕전으로 옮기어 모시게 되어, 영녕전을 천묘(遷廟)한다는 뜻의 조묘(祖廟)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금 이곳에는 태조 선대의 4조(祖)인 목조 ·익조(翼祖) ·탁조(度祖) ·환조(桓祖)를 비롯하여 정종(定宗) ·문종 기타 추존된 왕과 왕비 등 34위의 위패를 16실에 봉안하고 있다.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종묘 제정(祭井)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정전 전사청(典祀廳)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게 특이하다고 한다
종묘 재궁(齋宮)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종묘 묘현례(廟見禮) 혼인을 마친 조선의 세자빈이 시어머니인 왕비와 함께 처음으로 종묘를 참배하는 묘현례(廟見禮)
종묘제례[宗廟祭禮]
문화재청 한국의 무형유산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15.html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에 의해 종묘제례와 함께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의 향사(享祀)는 역대 음력으로 4맹삭(四孟朔) 즉, 1·4·7·10월과 납향일(臘享日) 등 모두 5회에 걸쳐 받들어 왔으나 근년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5월 첫 일요일에 한번 받들고 있다.
진관사(津寬寺)
현종은 권력암투로12살 어린 나이에 궁궐에서 쫓겨났으나 진관스님 덕분에 목숨을 살려낼 수 있었다. 후에 현종이 왕위에 오르고 진관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스님의 이름을 딴 절을 지었고 고려왕실의 각별한 보호를 받아왔다. 진관사 경내에 들어서면 주법당인 대웅전)이 가운데에 있고, 왼쪽에는 스님들의 생활공간이, 오른쪽에는 명부전(冥府殿 :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법당)등 여러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짚풀생활사 박물관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15339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90&lang=kr
창경궁(昌慶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18&lang=kr
창경궁은 1483년 성종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서 창덕궁의 동쪽에 세웠다. 그 기초는 세종이 닦았는데 세종은 즉위하던 해에 고려 남경의 이궁 터인 지금의 창경궁에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성종은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들을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과 문정전, 환경전, 경춘전 등 대부분의 전각이 이때 지어졌다.
창경궁 대온실 1909년에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입니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하에 일본인들이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은 곳입니다
창덕궁(昌德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489&lang=kr
문화재청 한국의 세계유산 창덕궁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04.html
창덕궁은 서울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먼저 종묘가 선정됐고 이어 창덕궁이 등재됐다.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하며,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한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의 당상관 이상이다. 선정전 내부.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어 문무관리들이 옥좌 앞에 두 줄로 앉아서 정사를 논의 했다..
창덕궁 부용정(芙蓉亭) 창덕궁 후원에 조성된 인공 연못과 열 십(十)자 모양의 정자. 조선시대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축하해 주던 장소로 정조가 신하들과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창덕궁 영화당(暎花堂)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되었던 창덕궁의 건물로 숙종 18년에 재건되었다. 영조가 친필로 기록한 현판이 걸려있으며, 건물 앞쪽에는 '춘당대'라는 마당이 있어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치른 곳이다.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창덕궁 낙선재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청계천[淸溪川]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40&lang=kr
광복 이후에는 복개사업이 전개되면서 청계천은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하로 들어가버렸는데 1955년에서 1977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이뤄진 사업이었다. 그 위로는 총 길이 5.6km의 청계 고가도로가 들어섰고 청계천은 산업화의 이면에 묻혀버렸다.
2003년 7월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청계천복원사업 구간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동구 신답철교로 구간으로 5.8km에 이른다. 2005년 10월 1일 2년여의 공사를 마치고 청계천 위에 놓여진 총 2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정조반차도를 비롯한 역사적 자료를 복원한 도심 속 하천으로 개통하였다. 주요 다리로는 모전교·광통교·장통교·버들다리·두물다리 등이 있다.
청계천 복원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 문을 열었다. 건물외관은 청계천의 물길을 상징하는 긴 유리형태로 되어 있다.
청계천의 역사적 여정이 주제별로 전시된 상설 전시실은 복원되기 전의 청계천의 모습부터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진행되었던 복원공사, 청계천 복원 이후의 도시 변화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청계천로(물(物)과 수(水)가 흐르는 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길이 6㎞, 너비 50∼80m. 왕복 8∼10차선 간선도로로서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를 이루는 중심 상업지구에 해당하였다. 종로·을지로·퇴계로와 함께 서울 도심을 동서로 가로질렀으며, 도로명은 청계천을 복개하여 만든 데서 유래하였다.
2006년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의 우수상을 수상한 길이다.
최순우 옛집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11&lang=kr
그의 고택은 2004년부터‘혜곡 최순우 기념관’이 되었다. 한때 성북동에 양옥 바람이 불면서 헐릴 위기에 처한 이 집을 시민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가 2002년 12월 8억원을 모금해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사들여 보수, 복원 작업을 벌였고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됐다. 평생을 우리의 미를 알리는 데 헌신한 그의 업적을 기리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집필된 이곳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함이었다.
춘원당 한방박물관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13743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82&lang=kr
지금은 경희대 한의대 외래교수이기도 한 윤영석 원장이 7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1997년에는 새로이 본관을 신축했고 지난 2008년에는 신관을 짓고 한의학 박물관도 문을 열었다. 우리 전통 한방인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그 역사를 공유하기 위함이다. 병원을 방문한 이들에게는 작은 휴식처가 되고 한의학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우리 한방에 대해서 좀 더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탑골공원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
탑골공원의 정문은 삼일문이다. 문을 지나면 곧장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대한독립 선언을 기념한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보인다. 공원 가운데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이 있고 그 주변으로 유적들이 배치되어 있다. 탑골공원에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2호)과 대원각사비(보물3호) 등이 있다
태강릉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50&lang=kr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태릉에는 12지신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12면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며, 무덤 앞에는 상석과 망주석 등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제작되었다.
태평관[太平館]
풍납토성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35&lang=kr
2000년에는 인근의 다른 공사 현장에서 중국 동전과 토기 등이 또 다량으로 발견됐다. 또한 거대한 규모의 성벽과 제사유적 등이 차례로 확인돼, 한성백제 시대의 토성으로 몽촌토성보다 앞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풍납토성의 발견은 당시가 처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대홍수가 났고 토성의 서벽이 무너지면서 그 내부가 노출됐고 여러 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광복 후에 사적 제11호로 지정됐지만 그 위상의 변화는 없었다. 1966년 서울대학교 고고학과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펼쳐 선사 시대와 삼국 시대 사이의 토성임을 밝힌 정도다. 이 유적이 한성 백제 시대(온조왕 ~ 개로왕)의 이른바 하남위례성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강시민공원길
2006년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의 우수상을 수상한 길이다.
이름 그대로 불교 미술을 전문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시대와 형태를 달리하는 다양한 불교 미술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보물 제1204호인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불화 80여 점, 고려시대의 석삼불존 외 불상 50여 점, 고려시대 공예품 230여 점,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 외 조각품 190여 점 등을 소장하고 있다. 역사 깊은 한국의 불교 문화와 미술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명소다.
한국은행 본관 (화폐금융박물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88&lang=kr
한국은행은 지난 1911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문을 열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직속 금융 기관 역할을 했다. 일본인 다쓰노 긴고가 설계한 이 건물은 1912년에 완공됐다. 지하에는 당시 조선 최대의 금고가 있었다고도 한다. 해방 후에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상당 부분 파손됐다. 1958년 복구되었으며 1981년에는 국가 중요문화제(사적 제280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잡지박물관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22057
초창기, 무단정치시대, 문화정치표방시대, 친일언론강요시대, 해방초기, 새출발시대, 잡지전문화시대, 언론자유화시대, 언론개방 및 정보화시대 등 9기의 시대별로 잡지의 시대적 특성을 살필 수 있으며, 주요 시설로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수장고·강당을 갖추었다.
전시되는 잡지는 정기간행물로서 원칙적으로 한글로 된 것이어야 한다.
한의약박물관 동대문구 용두동
허준박물관 강서구 가양2동 26-5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37&lang=kr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38&lang=kr
헌인릉
호국지장사(화장사 華藏寺) 동작동 국립묘지 내에 있는 사찰
옛날 한강에 사는 한 어부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불상이 나타나 빛을 보게 해달라고 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다음날 어부가 그곳에 가보니 불상이 녹슨 채 있었고 어부는 그 불상을 가져와 깨끗이 닦아 집에 모셔두었다. 그러나 그후로 고기가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계속되자 어부는 불상을 화장사로 옮겼다.
지장사는 670년에 세워진 절이다. 처음에는 화장사라고 불렀다. 1550년에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 씨 묘를 이곳에 두면서 ‘능’이나 ‘원’에 속하여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들던 절인 ‘조포사’역할을 했다. 1984년 현충원에 안장된 호국영령을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홍난파 가옥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95&lang=kr
홍난파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등 주옥 같은 곡으로 유명한 작곡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다. 도쿄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를 지냈으며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냈다. 특히 그가 작곡한 음악은 우리네 고유한 정서를 담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음악협회 등의 친일 단체에 가담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홍제원[弘濟院]
30리마다 설치됐던 원 가운데 홍제원(弘濟院)은 특히 다른 국립여관과는 달리 해가 저물면 여행자들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해주고 병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기도 해 이름이 높았다. 또 중국 사신들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서울∼의주가로(義州街路)에 설치했던 것으로, 원명은 홍제원(洪濟院)이라고 했으며, 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 이 여관은 중국의 사신들이 서울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임시로 묵던 공관(公館)으로서 1895년(고종 32)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다.
의주대로의 첫 역이며, 중국 사신이 입궐 전 옷을 갈아입은 곳이고, 인조반정군이 출발한 역사의 현장이다.
화계사[華溪寺] http://www.hwagyesa.org/
환구단[圜丘祭]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제천의례를 억제함으로써 세조(재위 1455∼1468) 때 환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을 대한제국이라 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천자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다시 설치되었다.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그 뒤 단지 내에는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1899년에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석고(石鼓)의 몸체에 부각된 용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흥인지문[興仁之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494&lang=kr
63빌딩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410&l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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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 관악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불렸다
노량진[鷺梁津]
백로가 노딜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기 위한 진이 설치된데서 유래한 노량진은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京仁線)이 이곳에서 제물포(濟物浦:仁川)까지 개통되었다, 한강교 다리목에 있는 노량진 상수도 수원지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상수도 수원지이다. 그 밖에 노량진역 동쪽 언덕 위에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 참형을 당한 사육신의 무덤인 사육신묘(死六臣墓:지방유형문화재 8)가 있다.
말죽거리(馬粥巨理)
서초는 예부터 전국각지로 떠나는 사람들의 여정이 시작되는 곳이자 서울로 들어오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오늘날 지하철 3호선 양재역이 있는 말죽거리(馬粥巨理)는 제주도에서 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이곳에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조선 초부터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이 타고 온 말에 죽을 끓여 먹이고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유생 금이 등이 쑤어 올린 팥죽을 말 위에서 들고 갔기 때문이라는 설과 병자호란 때 주둔했던 청나라 용골대 부대가 남한산성을 공격한 후 교대로 이곳에서 말죽을 쑤어 먹인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매동초등학교 최초 공립 보통학교
1895년 11월 15일 매동 관립 소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10년 4월 1일 공립 매동 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1947년 9월 1일 서울 매동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96년 3월 1일 서울 매동초등학교로 교명을 개칭하였으며, 2005년 12월 29일 2005교육경영우수학교 표창을 받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32번지에 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651년 11월 10세에 18대 현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659년 5월에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가 된 2년 후 1661년 8월에는 현종과의 사이에 원자인 숙종을 낳았다. 이후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의 3공주를 낳았다.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로 불리기도 한다. 지능이 비상하고 총명하였으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남편 현종이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세자빈,왕비,왕대비 정식 코스를 밟은 유일한 인물)
숙종의 여인 장옥정(훗날 장희빈)을 궐밖으로 내치기도 하였다. 1683년 12월 창경궁에서 42세로 사망하였으며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묘역 숭릉(崇陵)에 현종과 함께 묻혀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 올림픽공원에 자리한 백제의 토성
1982년 7월 22일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약 2.7km, 높이 6~7m. 3세기 초에 축조. 1984·1985년의 2차례 발굴조사 결과, 목책(木柵)구조와 토성방비용 해자(垓子)로 되어 있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수한 토성구조임이 밝혀졌다.
유물은 2기의 합구식(合口式) 옹관을 비롯하여 복원가능한 원통형토기·적갈색연질토기·회백색연질토기·갈색 회유전문도기편(灰釉錢文陶器片)·토제어망추·철기유물 등 500여 점이다. 그중 문살무늬[格子文]·승문(繩文)을 새긴 두드림무늬[打捺文]토기는 백제 건국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통형토기는 일본으로 전파된 기대토용(器臺土俑)의 원형으로 보여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 지리적 위치 및 견고함으로 미루어 보아, 광주풍납리토성·서울삼성동토성 등으로 이루어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된다.
무계정사(武溪精舍) 터
인왕산 자락이다. 골목길로 올라가다 보면 ‘무계정사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무계정사1길 14-1’에 ‘무계정사 터’가 있다. ‘무계정사’란 조선시대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용 李瑢)의 별장이었다. 1447년 봄 어느 날 안평대군은 꿈을 꾼다. 그는 꿈 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았고, 꿈을 깨고 난 후에도 그 풍광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는 당시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꿈을 그리게 했다. 그게 ‘몽유도원도’다.
문래동
1363년 고려시대 문익점이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가져와서 시험재배한 지역이라서 문래동이라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실 뽑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그의 이름 문래에서 ‘물레’라는 말이 나왔다
어쨌든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물레를 만들고, 또. 손녀 문영이 천을 짰는데 그게 무명의 유래란 말도 있죠. 문래에서 물레란 말이 유래된 거죠. 어쨌거나 목화나 방직과 인연이 깊은 동네입니다. 대표적 방적업체인 경방이 그 땅을 팔아, 그 자리에 자이아파트아파트, 홈플러스, sk뷰(워터파크 씨랄라, cgv)와 같은 시설이 들어섰고, 제2의 코엑스를 짓고 있죠.
박영효가옥
박영효는 조선의 개화사에 이름을 크게 남긴 인물이다. 특히 태극기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가 살았던 가옥은 1800년대 지은 한옥으로 서울 8대가 중의 하나였다. 대가의 면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규모 역시 컸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로 이뤄져 있었으나 안채 외는 모두 헐렸다. 박영효에 이어 이용익과 공주 갑부 김갑순이 뒤를 이어 살았으며, 해방 후에는 이진승이 살아 이진승가라고 불렸다. 1983년 이금홍이 매입해 경인미술관으로 사용했고, 남산골 한옥마을로 이전하면서 안채 외에 사랑채와 별당채를 복원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의 고분 8기에 대한 확인으로 베일을 벗었다. 이어 1975년 잠실지구 신시가지 조성 계획에 따라 6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1979년 12월 사적 제270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시의 복원공사가 진행됐으며 현재는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도굴되어 남아 있는 유물은 적다. 하지만 고분의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적 자료의 가치가 크다.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들은 사방의 벽을 돌로 쌓아올린 뒤 한쪽에 널길을 내고 바깥을 흙으로 덮은 굴식돌방 무덤이다.
백사실계곡 종로구 부암동 일명 ‘백사골’ 일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별장터인데, 주민들은 이곳을 ‘백사실’로 부르고 있습니다.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약 1,500평 규모의 전통건물터 및 정자터, 연못터 등 문화유적과 이곳으로부터 100m가량 떨어진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바위 등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중입니다.
백악산(북악산의 옛이름) 뒷자락에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하나로 주변에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흰 돌이 많은 백악산을 ‘백석산’에 비견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와 연못지 등이 남아 있다.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 사랑채와 안채의 건물지가 있고 사랑채는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건물지 아래쪽으로 연못지가 남아 있고 연못 한쪽으로 육각정자의 주춧돌과 돌계단이 남아 있다.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이라 새긴 바위가 남아 있다.
부암동 능금나무길
과거에 능금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 능금나무길. 창의문을 통과해서 클럽 에스프레소 골목길을 접어들면서부터 시작되는 능금나무길은 부암동 골목 구석구석 깊게 자리한다
부암동은 이곳에 부침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작은 돌을 대고 자기 나이만큼 문지르면 돌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붙고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골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큰길인 자하문길을 가운데 두고 무계정사길 시리즈가 펼쳐지고 길 건너편으로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는 능금나무길, 환기미술관길, 백사실길 시리즈가 나온다. 두 길의 분위기는 딴판이다.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는 길은 무계정사길에 비해 좀 세련됐다. 고급스럽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이선균의 집으로 등장한 산모퉁이 카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능금나무길 주택에는 담쟁이넝쿨이 참 많다. 붉게 물든 담쟁이넝쿨이 만추의 낭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북한동마을
북한산성 계곡 깊숙한 산속에 자리한 북한동마을은 북한산성 안쪽에 자리 잡은 유일한 산골 마을이다. 숙종 37년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북한산성을 축조한 뒤 행궁을 지키는 사람들이 머문 것이 마을의 시초가 되었다. 해방 후 산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음식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주민들은 환경오염 문제로 인해 결국 마을을 떠나게 된다. 북한산 마지막 마을, 300여 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다.
북한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을 꼽는다면 그 중 하나가 북한산일 것이다. 서울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접근이 쉬워 기네스북에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록된 북한산은 한 해 약 1000만 명의 사람들이 찾는다. 예로부터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백두산과 더불어 오악에 드는 명산으로 꼽힌 북한산은 주봉인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이 거대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렸다. 산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위엄까지 겸비하여 서울의 진산으로 손색이 없는 북한산. 어떤 말을 한다 해도 북한산을 다 나타내기는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저 지금처럼 우리에게 싱그러움으로 언제까지나 고마운 산. 도심이 품지 못한 자연의 생명을 안은 산. 자연에 목마른 사람들은 주말이면 북한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新羅眞興王巡狩碑] [국보 제3호]
지금까지 발견된 4기(基)의 진흥왕순수비 중 하나로,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의 형태는 다른 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비신의 상단(上端)에 1단의 촉을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개석(蓋石)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많은 부분이 절단 또는 손상되어 있고, 비신의 뒤쪽에는 무수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비문에 명기(明記)되어 있었을 연호 간지(干支)가 마손되어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 16년 왕이 북한산에 순행(巡幸)한 사실이 있으나 이를 곧 비의 건립연대로 보기는 어렵고, 남아 있는 글자의 내용을 검토하면 568년(진흥왕 29) 이후 진흥왕 생존시의 일로 추정된다
진흥왕은 확대된 영역을 직접 순수하면서 이를 기념하려고 이른바 순수비를 세웠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33)·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3)·마운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1)·황초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0) 등 모두 4개이다.
삼군부총무당
그냥 집으로 보기엔 규모가 크고 격식도 남다르다. 마치 제자리가 아닌 곳에 위치한 느낌이다. 이 건물은 ‘삼군부 총무당’(서울 유형문화재 제37호)이라 불리는 몇 남지 않은 조선시대 관아건물이다. 원래 자리는 광화문 바로 앞, 지금의 정부중앙청사 자리로 조선말 최고 군사기관으로 대궐의 수비, 도성의 순찰 등을 총괄하던 삼군부청사의 중심건물이었다.
삼성 리움미술관
남산 자락 아래 한적한 한남동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그 길의 끝에서 세련된 건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리움미술관이다. 설립자의 성[Lee]과 미술관을 의미하는 언어의 어미[um]가 말해 주듯, 삼성그룹의 창립자 고 이병철 회장의 수집품에서 출발한 미술관.
하지만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미술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야외 조각이다. 리움은 소장품 리스트만으로도 가치가 크지만,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미술관 건축물 그 자체가 최고의 작품이다. 마리오 보타와 장 누벨, 렘 쿨하스의 건축을 한 장소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삼일로창고극장(三一路창고劇場)
한국 최초의 민간극장, 고로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삼일로 창고극장(1975년 개관)
삼청각 성북구 성북2동 330-115
삼청각이 담을 헐어낸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1972년 지어져 그해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 대표단이 만찬을 열었던 장소로 1970~80년대에는 요정 정치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비켜 있던 삼청각은 1980년대 손님이 줄며 1990년대 중반 일반음식점으로 담을 헐어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시에 매입되며 전통한옥 문화공간으로서 한정식당, 라운지 & 와인 바, 공연장으로 또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본관인 일화당과 청천당, 천추당 등 5개의 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문객을 위한 정자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교통이 편리하진 않지만 주변에 30여 개의 외국 대사관저가 있고 북악산 등 주변 풍경이 좋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 사진촬영 장소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잘 손질된 각 별채의 정원은 아름다운 야외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삼선공원
삼선동에서도 가장 깊은 곳은 서울 성곽과 한성대학교 사이의 골짜기라 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마치 배 모양을 한 공원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삼선공원이다. 동쪽에는 한성대가 맞붙어있고 서쪽에는 ‘장수마을’이 성곽 아래 자리한다. 남쪽에도 높은 지대가 있어 u자형의 주머니처럼 생긴 지형을 이룬다. 형국이 이러하다 보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은 성북천으로 이어지던 옛 하천길을 따라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방법뿐이다. 골짜기 아래로 물이 모여들던 기다란 땅을 덮어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배 모양의 특이한 형상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기다란 공원 안에는 입구에서부터 관리소, 어린이 놀이터, 문화재, 산책로 그리고 어린이집이 300미터 정도 되는 공간에 마치 콩깍지 안에 한 알씩 들어간 완두콩처럼 연달아 자리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는 전시관, 중앙사, 12옥사, 공작사, 한센병원, 순국선열추모비, 사형장과 시구문, 유관순 지하 옥사, 담장과 망루의 순으로 관람한다. 관람 시간은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어제와 오늘’이란 제목으로 영상물도 관람할 수 있다. 지하층은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벽관, 독방, 임시구금실, 고문실 등이 있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벽관은 1분도 참기 힘들 만큼 답답했다. 이곳에서 고문당한 조상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그리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원혼이 떠올랐다.
서울 맛집 이문 설렁탕
서울세계등축제(Seoul Lantern Festival)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및 청계천 일대에서 "등(燈)"을 주제로 펼쳐지는 축제이다. 서울특별시에서 주최하고, 서울관광마케팅이 주관한다.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5개의 다리를 주변으로 5개의 테마로 이루어집니다!
1. 모전교 일대 2. 광통교 일대 3. 광교 일대 4. 장통교 일대 5. 삼일교 일대
재즈빅밴드 식전 공연, 재즈, 타악, 댄스가 어우러지는 퓨전공연, 개식 고지 및 축제소개, 환영사, 점등식, 타악 축하공연
서울숲 성동구 성수동1가
서울특별시가 '뚝섬 숲 조성 기본계획'에 따라 기존의 뚝섬체육공원 일대를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대규모 도시 숲으로 만들기 위해 2004년 4월 6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전체 면적은 35만 평이며, 1년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05년 6월에 문을 열었다. 총 공사비는 2500억 원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공원이 부족한 서울 동북부 지역의 시민들에게 도심 속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숲의 형태는 친환경적 요소를 강조해 공원 전체에 걸쳐 지름 30~40㎝에 높이 20m의 나무 104종 42만 그루를 옮겨 심는다. 대표적인 나무 종은 참나무·서어나무·산벚나무 등이며, 한국 고유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선바위
스님을 닮은 바위로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문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성곡미술관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경희궁길을 지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흰색 건물의 성곡미술관이 서 있다. 성곡미술관 건물 앞에는 큰 나무가 한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두 석조 건물 사이에 넓은 정원이 놓였다. 인왕산을 병풍처럼 두른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성곡미술관 본관과 별관의 갤러리에 들어서면 다양한 상설 전시와 개성 있는 기획 전시를 만나볼 수 있다. 단순하고 깔끔한 갤러리 인테리어가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성곡미술관은 갤러리 외에도 기념관, 야외 조각 공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방문객들에게 다양한 재미를 준다. 특히 아기자기하게 꾸민 본관과 별관 사이 오솔길로 올라가면 야외 조각 공원이 펼쳐진다. 야외 조각 공원은 작품을 감상하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성곡미술관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숙정문
1396년(태조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
숭인원(홍릉)
홍릉은 원래 명성황후의 무덤이었다. 대대로 왕가의 묘지로 쓰이던 터였으며 명성황후의 무덤이 안장된 후 홍릉이라 불렀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남양주시로 옮겼지만 여전히 홍릉이란 이름이 따라다닌다. 홍릉에는 현재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숭인원(崇仁園) 고종황제의 넷째아들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장자인 이진의 묘다. 이진은 의민황태자와 일본인 황태자비 마사코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로 순헌황귀비의 손자인 셈이다. 의민황태자 내외의 귀국 하루 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순종황제의 명으로 홍릉에 묻힌 것이다. 부모보다 일찍 죽으면 불효라 했지만 어린 진의 억울한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순종황제의 배려였다.
아차산성[阿且山城]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아차산에 있는 이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으로도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 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이 산성 밑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溫達) 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이 공원에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동상이 있다.
고구려 평원왕에게는 울보인 딸, 평강이 있었다. 왕은 딸이 울 때마다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며 겁을 주고 달랬다고 한다. 공주가 자라 혼기가 되자 권문세족 고씨(高氏) 집안으로 왕이 시집보내려 했으나 공주는 “나의 신랑은 온달”이라며 궁을 뛰쳐나온다. 이후 온달을 만나 부부가 됐다. 평강은 온달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 훌륭한 장군으로 만든다. 이후 온달 장군이 신라에 뺏긴 한수 이북의 땅을 두고 싸우다 전사한 곳이 아단성(阿旦城), 즉 아차산성이라고 전해진다.
여의도의 면적 행정 상 : 839.6 만 평방미터 ( 254 만평 )
실 면적(하천,고수부지제외) :294.6 만 평방미터 ( 89.1 만평 )
영휘원(홍릉)
홍릉(洪陵)은 원래 명성황후의 무덤이었다. 대대로 왕가의 묘지로 쓰이던 터였으며 명성황후의 무덤이 안장된 후 홍릉이라 불렀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남양주시로 옮겼지만 여전히 홍릉이란 이름이 따라다닌다. 홍릉에는 현재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다.
영휘원(永徽園)은 고종황제의 후궁이었던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이다. 원은 왕의 사친 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을 부르는 이름이다. 순헌황귀비는 철종 5년 태어나 철종 10년에 궁궐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이 됐다. 을미사변(1895) 후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황제를 보필했고 광무 원년에는 의민황태자(영친왕)을 낳아 귀인에 봉해졌다. 그리고 광무 7년에는 황귀비로 책봉됐다. 그 후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1905년 양정의숙과 1906년 진명여학교을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가 재정난을 겪자 200만평 땅을 기증하기도 했다.
숭인원(崇仁園)은 대한제국 의민황태자의 장남인 원손 이진의 무덤이다. 숭인원에 안장된 이진은 1921년 8월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의민황태자(영친왕), 이방자여사)와 일시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5월, 생후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풍습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으나, 순종황제가 이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어른의 장례와 같게 치르도록 하고 원호를 숭인(崇仁)으로 내리고, 할머니인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 남측에 조영하였다.
우이동 솔밭근린공원
우이동의 소나무 숲은 꾸미거나 가꾸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의 동쪽에 자리한 3만 4,955㎡의 숲. 특이하게도 이곳은 사유지였다. 따라서 서울의 개발 붐이 이곳까지 이어져 1990년에는 아파트 개발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칫 사라질 위기에 처한 숲을 주민과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 보존운동을 벌였고, 1997년 서울시와 강북구가 땅을 매입하여 2004년에 솔밭근린공원으로 개장했다.
우이령길(소의 귀를 닮은 우이렁길)
많은 사람들은 북한산을 떠올릴 때 험준한 바위산과 암벽 등반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산 아래 자락을 따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 천천히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북한산 둘레길은 산자락을 따라 약 63km의 아담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특히 1968년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이후 41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우이령 길을 북한산 둘레길의 백미.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혜의 비경 그 자체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귓가를 간질이는 새들의 노랫소리, 포근히 발을 감싸는 흙. 싱그러운 여름의 초록빛 낭만이 길을 따라 스민다.
육의전박물관
선전, 면포전, 면주전, 지전, 저포전, 내외어물전으로 구성된 조선시대 육의전의 발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육의전박물관’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육의전빌딩 지하에 자리 잡았다.
육의전은 발굴 후 4년 8개월 만에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육의전(六矣廛) 조선 시대 서울 종로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섯 가지 종류의 어용상점(御用商店). 일명 육주비전(六注比廛)·육부전(六部廛)·육분전(六分廛)·육장전(六長廛)·육조비전(六調備廛)·육주부전(六主夫廛). 이들은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대신에 정부로부터 강력한 특권을 부여받아 주로 왕실과 국가의식(國家儀式)의 수요(需要)를 도맡아 보는 등 상품의 독점과 전매권(專賣權)을 행사, 상업경제를 지배하면서 말기까지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여 왔다. 원래 조선의 전(廛-시전 市廛)은 태종 때 설치되었는데 초기에는 상업의 규모가 비슷하여 경영과 자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었다.
• 선전(線廛:비단 상점) • 면포전(綿布廛:무명 상점) • 면주전(綿紬廛:명주 상점) • 지전(紙廛:종이 상점) • 저포전(苧布廛:모시,베 상점) •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생선 상점)
비단(선전)/무명(면포전)/명주(면주전)/종이(지전)/모시(베)(저포전)/생선(내외어물전)
의릉(懿陵)
조선 제20대 경종(景宗, 1688~1724)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능이 옆으로 나란히 있지 않고 위 아래로 배치된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의릉 일대는1962년부터 1995년까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청사 부지로 사용되면서 정자각 앞에 연못을 파는 등 모습이 바뀌었다가 안기부가 이전한 뒤 문화재청이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광수 가옥[李光洙家屋]
이광수가 약 530㎡ 터에 목재와 벽돌을 이용해 손수 지은 연면적 221.18㎡ 규모의 기와집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 등을 발표했으며 한국 근대 문학사의 선구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이광수는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항일운동에 가담했으나 결국 친일로 돌아섰다. 그가 1934년부터 5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으며 이곳을 '자하문 산장'이라고 불렀다. 집 마당에는 이광수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와 감나무가 남아 있다. 이 집의 매입자가 개·보수를 거쳐 복원했으나 다행히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근대화된 한옥 양식을 보여주는 문학적·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40번지에 있다
인왕산
인왕산에는 태조, 무학대사의 기도터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 이름마저 왕(王)자를 쓰지 못하고‘인왕(仁旺)’으로 고쳤다가, 1995년에 와서야‘인왕(仁王)’이란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코스는 사직터널을 출발 기점으로 성곽터와 정상을 지나 부암동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청와대 앞길과 연결되어 있어 여유가 된다면 팔판로, 효자로, 경복궁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성곽길은 오르는 길 자체보다도 뒤쪽 전망을 쉬엄쉬엄 돌아보며 걷기 좋은 코스다. 창의문을 지나 성곽 안쪽 길을 따라 쭉 걷다가 돌계단을 오르면 성곽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성곽 밖 길은 200m 정도 이어지는데 태조·세종·숙종 때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성돌들을 볼 수 있다. 성돌에 낀 거무스름한 이끼가 서울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종로도서관 우리나라 최초 공립 도서관
1920년 11월 5일 이범승이 종로구 가회동 취운정에 경성도서관을 설립하고 1920년 11월 27일 장서 2만 3천권으로 경성도서관(京城圖書館)을 개관하였다. 8·15광복 후 1945년 12월 20일 서울시립종로도서관으로 승격되고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립종로도서관으로 개칭하였으며, 1967년 10월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1968년 8월 20일 사직공원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이라고도 한다. 비류왕(比流王)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4세기 중반에 백제를 크게 발전시킨 왕이다. 371년에는 북쪽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충청·전라도와 강원·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산(漢山)으로 거처를 옮겨 도성체제를 정비하고 372년에는 중국 동진(東晋)에 조공하여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작호를 받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국가기록을 맡겨 《서기(書記)》를 쓰게 하였고, 《고사기》 《일본서기》 등의 일본 옛 기록에 의하면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 등을 일본에 보내 학문과 각종 문화를 전파하였다. 근초고왕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적 기반을 튼튼히 한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이!서울페스티벌[Hi! Seoul Festival ]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1994년부터 매년 10월에 열린 '서울 시민의 날' 행사가 2002년 월드컵 기간에 시청광장과 광화문 일대에서 시민이 스스로 거리 응원을 펼치며 축제 분위기를 만든 것에 착안해 2003년부터 이름을 바꾸고 10월에서 5월로 옮겨 열렸다.
매년 5월에 개최되던 하이서울페스티벌은 2008년을 기점으로 4계절 축제로 변경되어 도시 전체를 테마로 축제를 개최하게 된다. '하이서울페스티벌 2008’은 특히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변신하는 서울의 다채로운 문화와 다양한 풍경들을 세계에 알리는 특별한 도약의 기회로 자리잡았다.
호림박물관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과 함께 국내 3대 사립박물관으로 꼽힌다. 약 1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54점의 유물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 8점, 보물 46점) 신림동에 호림박물관 신림본관이 있고, 2009년 신사동에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을 개관하였다. 우리나라의 고미술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전시하며 주제에 따라 1년에 3~4회 정도 특별전이 개최된다.
호암아트홀 중구 순화동 7 중앙일보사 건물 호암 아트홀
2002년 순수 예술을 위한 공연장으로 호암아트홀이 새롭게 태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쾌적한 분위기의 공연장을 만들기 위해 896석이던 좌석 수를 643석으로 조정했다.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규모보다는 깊이와 감동의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서다.
홍제동 개미마을 - 벽화로 새 단장
홍제동 개미마을.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달동네 중 하나였던 이곳이 최근 벽화로 새 단장했다. 대학생들이 찾아와 잿빛 담벼락에 화사한 벽화를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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