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골이란?
신라가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족장세력으로 영역을 가지고 있던 <간> 세력을 체제에 끌어들이면서
<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립하였습니다. 이들 <골>은 신라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
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초기의 소국을 벗어나 체제 정비를 하는 지증-법흥-진흥왕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야계 귀족들이 신라에 유입되었고, 진흥왕의 영토확장으로 북방계 귀족들도 신라체제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삼국통일기에 이르면, <골>족의 증가로 인하여 골족들의 특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입
니다. 이 시기에 내물 마립간계 후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지배집단과 구분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격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즉, 차별화된 지배집단을 형성하여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 필
요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골>족 중의 진정한 <골>로 여기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시대 <진골>
집단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진골이라는 개념은 신라가 성장하는 6c 무렵부터 등장하는 개념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골은 국왕의 후원 아래 체제 속에서 요직을 독점하였으며,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전 혈연성을 내세
워 특권세력으로 격상합니다. 그리고, 초기 박씨, 석씨 골족 중의 일부도 진골에 포함시킴으로서 다른
계층의 골족이 성장하는 것을 막기 시작합니다. 법흥왕 대 17관등으로 관등 및 골품제를 정비하고, 율령
반포, 불교수용 등 일련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한 것도 국왕권과 그에 밀착한 진골세력을 강화시키기 위
한 일련의 조치라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2. 성골의 등장은?
진골 계급은 국왕과의 밀착성을 주장하면서, 국왕권이 신성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국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은, 국왕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골족인 진골의 우월성도 같이 강조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골 중에
서 국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권자들은 하늘이 내린 성스러움을 가진 <성골>로 미화하기도 합니다.
거칠부의 국사를 보면, 신라왕을 모두 성골로 규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모든 왕들은 성골이 왕
으로 즉위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보아 성골이란, 어떤 특수한 신분계급이 아니라 왕이 될 수 있는 후
계자를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성골이라는 것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개념이므로, 단순히 혈연집단
을 뜻하는 진골보다 더욱 <유동적>인 개념입니다.
일단 성골이 될 수 있는 기준을 볼까요?
먼저 현왕의 장자가 성골이 될 수 있겠네요. 다음 왕위계승자니까요. 즉, 왕위계승과 관련있는 순위의
적자, 손자 등은 모두 성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국왕은 당연히 성골입니다. 그 왕자들도
왕위 계승의 후보들이므로 성골입니다. 만약 왕이 자식이 없다면, 왕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므로 이때
의 왕의 동생은 성골입니다. 만약, 왕과 왕의 동생이 모두 죽었다면, 왕의 동생의 아들이 성골이 되겠네
요.
이것은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스러운 왕위계승자는 특수한 <혈통>에서만 가능하다는 직조관념에서
비릇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골이란 신성함으로 엮인 왕위계승순서에 따라 자격자로서의 조건을 갖출 경
우에 해당되는 개념인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왕의 동생의 아들이 왕위계승을 한 경우가 있다면, 이 경우 <왕의 동생>은 자신의 아들이
왕에 올랐으므로, 자동으로 왕의 아버지로서 성골 자격이 생깁니다. 그는 왕을 한 적오 없이 성골이 되
었는데 이런 경우에 그 왕의 아버지를 <갈문왕>이라고 하여 성골 왕의 대우를 해줍니다.
그러나 신라 시기 진평왕 이후 이 계승원칙을 지킬 성골 남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골
계승원칙상 여자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이 여왕이 바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입니다. 그리고 선
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서는 성골의 관념이 약해집니다. 결국, 신라가 통일하면서 사회
체제가 바뀌어가자 <진골>에서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진골로서 최초의 왕이 된 자가 삼국통일의
공신 김춘추(태종 무열왕)입니다. 선덕여왕기의 일을 보아, 성골이란 선덕여왕 즉위집단과 관련되어 있
다고 보는 설도 있습니다.
3. 진골의 분열
6c 이후 진골과 성골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자 진골들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6등급 아찬까지 오른 계층
이 바로 <6두품>이라는 새로운 계층이었습니다. 원래 5두품까지밖에 없던 신라사회에 6두품의 출현은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6관등 아찬>이라는 하위직은 6두품에게 넘기고, 진골들은 5관등 대아찬 이상을 독식함으로서 신
라사회가 좀더 개방적이 되었습니다. 즉, 두품이라는 것이 10등급 이하 최하위 관직에 머무는 것이 아니
라 두품은 능력에 따라 승진하면서 관등에 의해 두품이 결정되는 능력주의 사회로 전환된 것입니다. 단,
여기서의 한계점은 그 능력이 6관등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6두품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발버
둥치기 시작한다는 점이죠. 그러나, 신라사회는 6등급 이상은 인정하지 않았고, 설계두나 최치원의 예
에서 보여지듯 신라의 6두품들은 중국 당나라의 빈공과를 통해 출세하려고 신라사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8c 이후 신라사회는 진골의 분열 현상이 심해집니다. 삼국통일 후 신라사회는 전제왕권이 확립되면서
진골중심체제가 아주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나, 일부 진골층은 왕과의 근친혼 등을 통해 성장한 반면, 일
부의 진골들족적 강등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진골의 수가 많아 지면서 더 이상 진골이라는 계
층이 특권층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진골은 왕과 가까운 1골, 왕실과 멀어진 2골로 분화됩니다. 1골은 이전 진골의 특권을 물려받아
특권층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나 2골은 왕실과 혈연관계가 멀어지면서 관료화되어 버린 계급이 됩
니다. 또 6두품 중에서는 제 1골과 밀착하여 왕위쟁탈전이나 군공을 세워 2골로 올라간 계급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6두품이 5품이상의 관리로 올라갔다는 것은 전에 설명한 <아찬 중위제>가 붕괴되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로서, 2골은 진골과 6두품이 혼재한 새로운 계급으로 신라사회에 새롭게 형성되
는데, 이러한 새로운 계급을 역사에서는 <득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결국 8c 이후 신라가 말기로
갈수록 골품제도는 원래의 이념을 지키지 못하고 구제도의 모순이 되어 신라사회의 발목을 잡는 제도로
변질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실제 신라가 망하는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을 <골품제의 모순>에서 찾곤
합니다.
4. 대등의 분열
신라사회가 1골, 1골로 분열된 8c 이후 골족은 또 한번 분열합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등이었던 김양상
이 왕이 되어 버린 사건 때문입니다. 원성왕 김양상은 원래 왕위계승후보였던 골족이 강릉에 머물다가
홍수로 인해 왕위계승에 참석하지 못한 틈을 타 상대등인 자신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를 역사에서는
<원성왕계>라고 합니다.
이로서 신라 진골들은 상대등이라는 자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성왕 이후, 다음 왕인 김경
신 역시 상대등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즉, 신라사회는 이로서 상대등계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진골 귀족 역시 왕의 직계와 상대등계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골의 마지막 분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대등이란, 원래 <등>에서 나온 말입니다. <등>이란 원래 족장 세력이었다가, 왕권에 복
속되어 관직에 머물던 하급 관리를 말합니다. 이 중 국왕의 직속관리로서 세력을 갖춘 자를 <대등>이라
하며, 이 대등은 하급관리인 <대사>와 비교되는 말이었습니다. 신라 법흥왕 대에는 국왕의 업무를 총괄
하는 관리로서 <상대등>이라는 고위직 관리도 등장하게 됩니다.
대등은 실제 고위 관리로서 진골과 같은 대우를 받았는데, 신라 후기에는 1골과 2골이 분화하자 2골은
전문관료직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대등>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등으로서 전문 관료군을 형성한
2골군을 골족, 품족 따지지 않고 <득난>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등 중에서 상대등 세력은 실제 왕과 직계
혈연 관계를 가진 관료였고, 왕위계승에도 적극 개입하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신라 후기에 활약했던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