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보호(保護)
이제는 신문기사를 읽으면 마음이 아프고 저려온다. 무엇 때문일까?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시대만의 특성인 것인지, 인간성 자체가 이젠 예전과 달라진 것인지, 자신이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당하는 것에만 온통 신경이 집중되어, 딴에는 ‘옳다’는 것만을 앞세우며 갑을논박만 하고 마음을 챙기지 못하는 세상모습에 필자는 기운이 빠졌다.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정의 내려야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서로 관심을 ‘적당히’ 갖고 ‘적절하게’ 표시해야 하며 조금만 더 갖거나 표시하면 사생활침해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우린 살아가고 있다. 이젠 이웃집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을 공권력이 근거를 갖고 파악해야 하는 것이 되어 이웃사촌의 개념도 새로이 적립해야 하는 것 같다. 내 아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남의 자식이니까 아주 제대로 엄하게 가르쳐야 겠다는 생각, 왜 하게 되었을까? 수십 명이 있는 교실 안에서 나만 즐겁고 좋을 야릇한 얘기를 해도 되겠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세상에서 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고 외치고 또 외치고 있는데, 처벌이 가볍다고 혹은 빠져 나갈 수도 있다고 또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외면하여 벌어지고 있는, 신문기사에서 보도되는 아동학대, 체벌, 성희롱 문제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면 마음이 잠시 놓이지만, 피해 입은 자들의 심정이 공감되기 시작하면 벌벌 떨리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면을 접하게 되면 갖게 되는 증상인 것 같다.
은밀한 내용조차도 정보처럼 공유하려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면 좋을 교육 내용이 무엇일까? 처벌되는 죄의 종류는 정해져 있어 같은 법에 의해 같은 처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피해정도와 피해내용과 가해동기가 모두 다를 것인데, 세상이 그들에게 무엇을 어떤 내용을 나누면 그들이 달라질까. 공개적으로 법을 근거로 사이트를 폐쇄해야지만 물러서는 이들에 대해 우리와 무엇이 다른지를 찾고 선을 그어야 되는 것일까?
사람을 놀래키고 선 놀랬다고 표시를 하면 분노를 해버리는 것은 소수의 몇몇이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국민성인걸까? 끼어들기도 못하게 하고 끼어들게 해주곤 성내고 양보 안 해 주어 속상해서 화나고, 자신이 누려야 하는 진행을 방해하는 자에 화가 나고 화가 나서 화를 내면 똑같이 성을 내며 응해오니, 미안하다는 말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미안하다 라는 표시를 하면 현명한 것이 아닌 무시해도 되는 자가 되는 세상을 만든이가 누군지 찾아낼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부터의 보호 말이다. 편을 나누어 다투자가 아니라 같은 입장이 되어 헤아려 보자는 것이다. 옳다 그르다 만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하는 상황에 대해 공감을 나누며 그 상황이 빨리 종료될 수 있게 하여 어떤 것이 옳은지를 함께 실행해보자는 것이다.
아동보호. 아동은 보호를 해주어야 하는 대상이지 아동 스스로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보호의무자가 보호를 해주지 않으니 아동의 보호를 위해 ‘신고의무자’가 생겼다. 이로 인해 보호받고 있지 못한 아이들을 발굴하여 구조는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대안은 아니기에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누려야할 권리, UN아동권리협약에 나오기에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그러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고 있느냐 못하고 있느냐로만 보호자들만을 옥죄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단어는 떠올리기만 해도 목이 메이는 것이 보통의 감정일 것이다. 이 세상이 길러준 부모에 대해서는 애틋함을 갖게 하였고, 자신을 기르며 고생한 자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세대를 통해 주고 받고 있다고 본다. 패륜 범죄로 한 때 세상이 떠들썩했다. 자신이 소유한 집에서 살고 있는 부모를 내쫓으려는 자녀에 대해 법이 해당되는 것이 없음에도 그 행동에 정당함이 없고 인륜에 반하는 행위라 하여 법이 판단을 내려줄 만큼, 법이 존재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공정하게 다뤄 함께 잘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이 받는 상처는 부모가슴에 못이 되어 빠지질 않고 부모로서 더 슬피 우는데, 내 자식 귀한 만큼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의 행태는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기르고 어떤 정을 나누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오로지 훈육의 옳음에 따른 아이들 행동의 잘잘못만을 판단하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아이가 올바르게 잘 크길 바라는 마음에 은사라 하며 스승의 체벌을 허용한 것이지, 자식이 맞는 것이 응당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체벌역시도 아이가 잘못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정도를 따라야 하는데, 혼을 내다보면 아니 혼을 내면서 때리다 보면 흥분하게 되면서 자신의 속상함을 한순간에 확 쏟아내게 되는데, 아이들은 그 에너지를 견뎌낼 수도 없기에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다 맞게 되는 것 같다. 엄마가 아이를 욕조에 익사시킬 때도 고학년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묶어놓고 때릴때도 아이들은 그 매를 다 맞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부모의 화가 자신에게 비롯된 것이라는 아이들의 자동사고가 부모의 체벌에 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른에게 대항하며 크는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크는 세상이면 참 좋겠다. 보호 받고 자란 아이가 다른 이를 보호하고 자신도 다른 이로부터 보호 받으며 정을 나누는 세상이 되면 참 좋겠다. 자연보호처럼 이젠 사람보호가 필요해 보이는 세상. <행가래로 1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