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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울산의 오지마을>12.미안하다 옹태여!
청목/金永柱 추천 0 조회 25 11.08.10 10: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울산의 오지마을]고향 잃고 찾아들어간 산촌마을…세월은 가고 시름만 느네
(12)미안하다 옹태여!
2011년 08월 04일 (목) 20:52:39 이재명 기자 jmlee@ksilbo.co.kr
사연댐에 수몰된 마을 주민 모인 옹태골
망향비 조차 없는 설움 무엇으로 달랠까
인근 산 곳곳 송전탑과 고압선 얽혀있고
장마철 댐 불어나면 마당까지 물 들어차


◆배를 타고 사연댐 오지마을 탐방

배를 타고 돌아본 사연댐의 경관은 기대 이상이었다. 비무장지대를 방불케 하는 수변, 굽이도는 계곡과 깎아 지르는 절벽, 산자락을 휘감은 울창한 숲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렇다. 길은 걸어봐야 알고, 물은 건너봐야 안다. 필자의 눈에 비친 대곡댐은 용이 되기 전의 이무기 형상이었
   
▲ 옹태마을 김지일(81)씨 노부부. 지게에 풀을 지고 옥수수 밭을 지나는 김씨 곁으로 아내 박필순(82)씨가 집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권일
고, 사연댐은 두 발 달린 청룡 형상이었다.

수천 년 전에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가 다니던 물길을 따라 수상이동을 시작하였다. 배는 한실까지 이동이 가능하였고, 우기(雨期)에는 상류인 천전리각석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 배는 반구대암각화가 있는 댐 상류로 향하였다. 사연댐은 선사시대 바위그림을 수장시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호수로, 인류학자들은 물속에 방치시키고 있는 우리를 지적(知的) 난장이로 분류했다.

수심 10m 댐 한가운데에서 배가 멈추었다. 불쑥 솟아난 모래톱이 뱃길을 막아 선 것이다. 모세의 기적과도 같은 모래톱이 댐 한가운데 있다니, 필자는 새로운 발견을 한 것처럼 두근거렸다. 갈수기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톱은 그 모양이 고래 등과 흡사했다. 울산 앞바다의 귀신고래가 반구대로 거슬러 오르다가 수심이 얕은 바닥에 걸린 것 같아 신비감마저 들었다.



◆망향비 없는 거대한 웅덩이 사연댐

언양읍 태기리 골짜기에 위치한 옹태골로 뱃머리를 돌렸다. 과거 마을이 있었던 수면 부근에서 ‘할배 감나무’를 발견하였다. ‘할배 감나무’는 수면 위로 머리 끝 부분만 드러내고 있었다. 한때 사연댐에서 배를 몰았
   
▲ 옹태마을 전경. 길쭉한 마을에 송전탑 고압선이 거미줄처럼 에워싸고 있다.
던 박수성(84) 씨는 배를 멈추게 하곤 “저 할배 감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던 당산나무였다”며 물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물속에 어렴풋이 마을이 보인다고 했지만, 필자는 아무리 보아도 푸른빛 물결만 흔들거릴 뿐이었다. 수몰민인 그는 “저 물결만 바라보아도 고향 생각이 난다” 며 바다 같은 호수를 망연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댐은 망향병에 걸린 사람들의 수상가옥이자 유일한 정착지였다.

박 씨처럼 사연댐에는 망향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곳곳에 살고 있었다. 범서읍 세연동 골짜기에서 수상생활을 하던 ‘외딴집 노인’은 익사체로 발견되었고, 반대편 언양읍 태기리 장골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실향민은 얼마 전에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물 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망향병이다. 물에 고향을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총을 든 청원 경찰들이 얼씬도 못하게 했었다”는 박 씨는 “이웃한 대곡댐에는 망향비와 박물관을 세웠지만, 군사혁명정권이 마구재비로 밀어붙인 사연댐은 여태 망향비 조차 없는 한(限)의 웅덩이”라고 탄식을 하였다.

◆사연댐이 출산한 낙도오지 옹태

댐에 유입되는 개천을 따라 길쭉하게 늘어선 옹태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형태가 독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인 옹태(瓮台)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었으나, 사연댐이 들어서면서 졸지에 낙도오
   
▲ 고래등 형체의 사연댐 모래톱. 댐에 물이 빠지는 갈수기에 드물게 나타난다.
지로 변한 곳이다. 물을 끼고 살지만, 상수도가 없어 정작 식수문제를 안고 산다. 언양읍 신흥마을로 통하는 외길이 있으나 길이 비좁고 교통이 불편해 택시도 잘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 1965년 마을을 댐에 내어 줄 당시, 고향 땅을 떠나지 못한 12세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한 날 한 시에 이곳으로 이주를 하였다.

이 마을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김지규(80) 씨는 새 집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바람에 지붕이 날아가 낙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댐에 의한 고통과 고압선의 공포를 견디다 못해 집단이주를 건의하였지만 번번이 묵살되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거미줄처럼 마을을 에워싼 고압선을 가리키며 “남자 씨를 말리는 저 고압선을 봐라. 이 통닭마을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울분을 감추지 못하며 “교통의 불편은 감수하더라도 생명을 위협하는 살벌한 고압선만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미안하다 옹태여!

필자는 배를 타고 옹태골 주변을 돌아보았다. 옹태골 주변의 방아등과 용두등 범골, 유서깊은 산 곳곳에는 줄지어 송전탑이 세워져 있었다. 골바람이 불 때면 송전탑이 살벌하게 울어댔다. “산은 전기고문을 시키고, 댐은 물고문을 시킨다”며 댐이 불어나면 마당까지 물이 차고 온다고 필자를 붙잡고 울먹이던 김지규 씨가 떠올랐다. 어떻게 이런 척박한 곳으로 이주를 시켰을까. 돌아오는 배는 천근의 납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올해는 근 한 달을 끈 장마로 댐에 유입되는 쓰레기를 제거하는 청소선도 덩달아 바빴다. 떠내려 오는 묵은 쓰레기 중에는 먹다 남은 족발이며 참외도 눈에 띄었다. 참외처럼 진물러진 반구대암각화는 아무래도 올 연말까지는 보기 힘들 성 싶다.



◆옹태 지게꾼 김지일 노부부의 세상만사

지게에 풀을 지고 가는 김지일(81) 할아버지를 마을에서 만났다. 손에는 작대기와 낫이 들려져 있었다. 김 할아버지를 본 아내 박필순(82) 할머니가 집 앞 옥수수 밭에서 걸어 나왔다. 팔에 깁스를 하고 지팡이를 든 박 할머니는 “토끼가 있나 소가 있나, 이 더운데 뭐하려고 풀 베러 갔소?” 고함을 치듯이 큰소리로 잔소리를 했다. 귀가 어두운 김 할아버지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히죽 웃기만 했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묘한 웃음이었다. “난 배운 게 지게 질, 풀 질, 나무 질 밖에 없어야” 김 할아버지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입가에 거품이 일었다. 그리고는 박 할머니를 가리키며 “시집 올 때 곱더라” 며 특유의 웃음을 여러 번 지었다. 그러자 박 할머니가 “입에 침 좀 닦으소. 추져버 못 보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 배성동 시인


박 할머니는 열아홉 살에 시집와서 옹태골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촌로였다. “귀가 어두운 바보 영감에게 죽자 살자 고함을 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바보가 되었다” 고 말하는 박 할머니는 “내가 키가 작아 아무도 안 데리고 가더라. 신랑이 약간 모자라고 귀가 멀어도 고맙다고 시집을 왔지. 호호”

김 할아버지를 만난 인연을 신세타령처럼 늘어놓으면서도 60년 넘게 해로한 김 할아버지를 은근히 치켜세웠다. 산촌오지 지게꾼 김 할아버지는 20년 째 시내 구경을 못하였다.



배성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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