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5절을 보겠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탄생설화가 없고, 마태와 누가는 탄생설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예 하나님의 아들을 넘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의 근원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기독교가 삼위일체설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 말씀입니다. 이어서 6~8절을 보겠습니다.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다. 그 증언으로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 자신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온 것뿐이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던 요한복음의 저자가 세례 요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갑자기 세례 요한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일까요? 세례 요한의 영향력은 1세기 말에는 거의 소멸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서기 90년대까지도 여전히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살아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어서 9~13절을 보겠습니다.
9 그 빛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이 본문은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 위대하신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면서, 그분을 알아보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고 영생을 주신다는 교리의 바탕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14~18절을 보겠습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요한은 그를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또 세례 요한을 견제하는 글이 삽입되어 있어서 본문의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하고 있네요. 요한이 스스로 ‘그분이 나보다 앞선 분이고 먼저 계신 분’이라고 증언했노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 문제로 초대교회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답니다. 아버지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답니다. 이 본문이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신의 아들을 넘어, 본질상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이 선언이 향후 200여 년간 격렬한 기독론 논쟁으로 이어졌고,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을 가진 분’이라고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의 이론이 받아들여져 서방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피조물의 으뜸이지만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는 아니다’ 라고 주장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동서교회가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갈라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세례 요한이 자기 자신과 예수님에 대해 유대지도자들에게 증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요한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냐고 재차 묻자, 요한은 그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재차 물으니,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23~28절입니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24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이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26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27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소."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본문의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 본문은’ 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 본문의 내용은’ 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내용 자체는 요한복음과 나머지 공관복음 사이에 공유되는 부분이 충분히 있지만, 요한복음이 마가복음의 자료를 가져다가 기록했다거나 마태나 누가의 자료를 가져다가 기록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공관복음서의 존재와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공관복음서의 내용은 몰랐는데 단지 참조한 전승 자료를 서로 공유했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과 표현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본문을 기록한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이 스스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으니 이제 요한의 그림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세례 요한이 자신을 낮추면서, 예수님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증언하고, 자기 제자를 예수께 보내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40~42절을 보겠습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이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이다.)
첫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다른 복음서와는 매우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조금씩 표현의 차이는 있어도 베드로와 안드레가 어부로 고기 잡는 일을 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고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형제가 스승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복음서 전체를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록들 때문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몰랐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어지는 본문에는, 빌립과 나다나엘이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 빌립은 열두 제자의 목록에 들어가 있지만 나다나엘은 열두 제자 목록에 없는 인물인데,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이 나다나엘이 다른 복음서가 말하는 바돌로매와 동일 인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의 기록의 차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그렇게 간주하는 것밖에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