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남원양씨(南原梁氏)
【시조】양우량(梁友諒)
【인구】218,546명 (2000년 현재)
【주요파】▲병부공파 ▲용성군파
양씨는 ▲제주양씨 ▲남원양씨 ▲충주양씨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제주양씨에서 분관되었다. 제주도에 분포된 토박이 양씨를 제양(濟梁), 육지에 널리 퍼져 있는 양씨를 육양(陸梁)이라 한다. 이 중에서 남원양씨가 압도적인 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모든 양씨의 시조는 탐라(오늘날 제주도) 개국 설화의 삼신인 중 한 사람인 양을나다. 제주삼성인 양(梁), 고(高), 부(夫)씨의 시조인 삼신인은 맏이가 양을나, 둘째가 고을나, 셋째가 부을나다. 양씨는 원래 양(良)자를 성씨로 썼다. 시조의 후손 양탕이 신라 진흥왕 때인 서기 559년 광순사로 신라를 예방했다. 이 때 진흥왕은 벼슬과 상을 내리면서 양(梁)으로 고치게 했다. 제주양씨에서 남원양씨로 갈라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다.
남원양씨의 시조 양우량은 신라 때 공을 세워 남원백에 봉해진다. 그래서 후손들이 남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남원양씨는 고려 경종 때의 양능양을 파조로 하는 ▲병부공파와, 양주운을 파조로 하는 ▲용성군파로 나뉜다.
양능양은 경학(經學)의 대가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국자감에서 전례와 경의를 강의하고 빈공과에 급제한다. 귀국 후 학교를 세워 영재교육에 힘쓴 당대의 석학이다.
양우는 조선 개국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남원의 교룡산에 은거했다. 이성계가 집현전 대제학에 임명했으나 3차례나 거절했다. 그는 움막 속에서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숨어 살다가 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동방의 백이숙제라고 했다. 이태조가 그를 벌하려 했을 때 중신들이 "양우를 벌하면 충신의 길이 막힌다"고 말하여 죽음을 면했다.
양성지는 조선 세종대에서 성종대에 이르는 동안 우뚝 솟은 양씨 문중의 인물이다. 훈구파의 중진으로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지내다가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이어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다. 문물제도와 국방. 양병. 농경 등의 일대 개혁, 홍문관과 규장각의 창설,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지리지 작성 등 그가 남긴 역사적 위업은 엄청나다. 저서로 눌제집, 논선서, 시정기(時政記), 삼강사략 등이 있다.
양성지를 전후한 시기에 양씨 문중은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그의 동생 양신지는 상장군, 아들 양찬은 승지, 손자 양연은 중종 때 이조.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청백리 양권은 군수로 있을 때 선정(善政)이 상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은 이를 그림으로 그려 조회 때마다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이는 청백리 양권의 모습이니 제관들은 이를 본받아 선정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양덕수는 음악가로서 조선 광해군 2년에 고가연구에 귀중한 악보의 하나인 양금신보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양대복도 남원양씨 후손이다. 그는 사재를 털어 4천여명의 의병을 모집, 임실, 영암 등지에서 왜병 3백여명을 몰살시킨 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