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한반도 한국의 비밀(7-3)
(가’’) 조선에는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는 광물자원이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정편 4의 해방(海防) 공충도(公忠道),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천연염색연구원’의 광물성 염료 편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백토, 흑토, 적토, 황토, 자토만이 산출되며 공작석, 청금석, 남동광, 노란색의 석웅황, 붉은 색의 주사는 중국, 페르시아, 인도, 티베트에서만 생산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노란색의 석웅황(石雄黃)이다.
이 석웅황에 대해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의 글을 보면 산출지로는
‘중국의 호남의 영릉, 감숙의 무도산곡, 돈황산과 광서, 운남, 사천 등의 지방에서 산출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정편 4의 해방(海防) 공충도(公忠道)편을 보면
‘해미(海美), 서산(瑞山)의 평신진(平薪鎭)ㆍ안민곶(安眠串) 작은 봉우리가 둘러섰고 계곡이 매우 많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엔 경치[境]가 매우 아름답고 금모래가 있으며, 석웅황(石雄黃), 청등(靑藤)이 생산된다.’라 기록했다.
석웅황은 천연염색연구원에서도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에서도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는 자원이라고 하는데 만기요람에서 충청도의 다른 이명인 공청도편에서 석웅황이
충청도에서 산출된다는 기록으로도 조선은 한반도와 관련이 없다.
이뿐 만이 아니다.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에서 ‘노감석(爐甘石)은 중국의 호남, 광서,
운남, 사천 등의 지방에서 산출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편에 그곳의 토산으로
‘노감석(爐甘石), 연철(鉛鐵), 철 모두 식점(食岾)에서 생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봉산군(鳳山郡)편엔 ‘토산으로 사(絲), 삼[麻], 노감석(爐甘石),
황옥(黃玉)이 일흥창(逸興倉)에서 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에서는 각 광물의 산출지에 대해 한국에서 산출되는 광물이
있을 경우는 한국도 산출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중국에서만 산출된다고 하지 않는다.
염료로 쓰이는 재료인 하엽록(荷葉綠)이라는 색채 염료가 있는데,
여기에 관련 아주 모호한 기록이 있다. 문종실록 문종 1년 신의 기록을 보면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숭지(李崇之)가 계문하기를
“황금(黃金)과 하엽록(荷葉綠)은 불상을 그리고 진관사(津寬寺)를 단청하는 데에
모두 소비하고 남은 것이 얼마 없습니다. 이 물건들은 본국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만약 쓸 곳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하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하엽록에 대해 다른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을 보면
‘하엽록(荷葉綠)이 주의 동쪽 20리 청태암(靑苔巖)에서 난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을 보면
‘하엽록(荷葉綠)은 청태암(靑苔巖)에서 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종실록에서 하엽록 관련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 글을 보니 아주 가관이다.
‘단청(丹靑)의 원료인 오채(五采)의 하나. 녹색의 염료로서 연잎에서 채취하였음.’라고
주석하였다. 주석한 사람이 연잎 빛의 색깔인 하엽록 그 자체를 연잎에서
채취하였다고 단정하고 있다. 고건축분야의 단청관련의 글을 보면 단청에 쓰이는
푸른빛 계열의 염료는 거의다가 광물질 즉 돌가루 염료라고 했다.
하엽록에 대해 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서로 상반된 기록인데,
어느 기록이 올바른 기록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혼재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나’’) 조선 전주(全州) 옛 지명(地名)이 계림(桂林)이었다
(다’’) 조선 강릉(江陵) 옛 지명(地名)이 형남(荊南)이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
-임하필기에서 전라도 지역의 계림부(桂林府)는 조선이 대륙에 있었음을 밝히는
확증적인 기록이다. 현재의 지나 대륙의 계림부(桂林府) 관련 자료를 보면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한반도에 있는 금산사라는 사찰이 지나 대륙에도 있는데 현재 지나 대륙의 금산사는
계림시(桂林市) 전주현(全州縣)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유원의 ‘임하필기’의 기록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계림부(桂林府)는
전주(全州)라고 밝히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형남부(荊南府)는 강릉(江陵)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고증하여 보면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원사(元史)지리지’를 보면 ‘唐荊州,復為江陵府。宋為荊南府
(당나라의 형주가 다시 강릉부가 되었다. 송나라 때 형남부가 되었다.’)
임하필기에 형남부(荊南府)는 강릉(江陵)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 역대의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조선의 강릉(江陵)이 형남부(荊南府)였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그런데 임하필기에서는 강릉(江陵)의 옛날 명칭이 형남부(荊南府)였다고
밝히고 있다. 임하필기와 원사 지리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당(唐)의
존재가 신라(新羅)였으며, 송(宋)의 존재가 고려(高麗)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조선의 금릉(金陵)은 양자강(揚子江)에 연해 있었다.
-홍재전서 제7권 시(詩) 3 금릉관(金陵館)에 제하다, 고종 16년 기묘(1879, 광서5) 8월 10일(신해) 맑음, 고종 34년 정유(1897, 광무1) 9월 8일(갑오, 양력 10월 3일) 맑음
-고종 16년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서남쪽이 강한(江漢)지역과 가깝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강(江)은 양자강을 말하며 한(漢)은 한수(漢水)를 말하는 것이다.
고문헌을 보면 양자강과 한수는 거의 함께 등장 한다.
지역적으로 양자강과 한수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러한 지역적 특색이
조선의 서남쪽에 있다는 것 이다.
즉 조선이 대륙에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
홍재전서의 저자인 정조임금이 금릉 지역의 금릉관에 와서 시(詩)를 읊었는데 이
시 정경을 보면 조선의 금릉지역이 양자강과 연한 지역이라 기록하고 있다.
다산시문집 경세유표 제3권의 기록에도 대륙의 금릉(金陵)이 양자강(揚子江)에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종 16년의 기록과 같은 의미의 기록인 것이다.
고종 임금 때만 해도 대륙의 주인은 소위 청(淸)이 아니라 조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종실록에서 북쪽으로는 야인(野人)과 여진(女眞) 등의 지역까지 모두 통일
국가가 되어 온전한 형국이라 말한 것이며 이러한 기록의 사실은 청조(淸朝)의 실체가
제후였다는 것이며 대륙의 실제적인 황제국은 조선이었던 것이다.
(마’’) 조선 후기 북인(北人)의 정체는 청나라였으며 조선의 제후국이었다.
-숙종 1년 을묘(1675,강희 14) 3월18일 (병자), 숙종 24년 무인(1698,강희 37) 5월5일 (무인)
-숙종실록에서 ‘북인(北人)이 화포(火砲)를 요구하는 데에 대하여, 신은 두어 자루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주는 것이 장차 50자루나 될 것이라 들었습니다. 나라의 이기(利器)를 쉽사리 남에게 주어 중국에 해독을 끼치고 천하에 죄를 얻는 것이 어찌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에서는 이 북인(北人)이 청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현재의 지식으로 보면 조선은 청조(淸朝)에 사대를 하는 나라이며 청조(淸朝)가
중국(中國)이다. 그런데 청조=북인에게 화포를 주는 것이 중국(중화中華)에 해독을
끼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인이 청나라이며 중국인데 화포를 주는 것이 중국에 해를 끼친다니 참으로 이해
불가이다. 즉 여기서 이 북인(北人)의 실체는 중국이 아니다.
여기서 북인은 조선의 북번(北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퇴위 당하고 광해군을 따르던
북인(北人)들은 실각하게 된다. 권력을 잃은 북인들의 상당수가 만주족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은 엄격히 말해서 호인(胡人)들의 반란이다.
만주족에게 북인들이 결탁하면서 만주족은 무력을 제공하고 북인들은 조선의
세련된 행정적인 시스템을 제공하여 만주족이 조선의 신흥 북인세력이자
북번(北藩)이며 북후(北侯)가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북인에게 화포를 주는 것이
중국(중화中華=조선)에게 해독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선의 수치라고 말하는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은 조선의
임금이 당한 수치가 아니라 본다. 병자호란의 수치는 신흥 북인 세력으로 성장한
만주족이 조선의 제후로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전쟁으로
북인세력 외 동, 서, 남번 중의 한 세력과의 전쟁이며 그 한 세력의 제후 왕에게
항복을 받아낸 전쟁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가정은 전혀 황당한 가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은 삼전도 굴욕의 병자호란 이후에도 여전히 황제국 시스템이 존재한
나라였기 때문이다.(윗글 11~16번까지의 글)
또한 숙종실록1년의 기록으로도 조선이 중국이라는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숙종 24년의 기록은 아주 황당하면서 중요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번역자는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을 했다.
기록을 보면 ‘아! 북미(北米)의 일이 있고부터 국가가 저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이 많습니다. 진실로 조정에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감싸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오늘날 북미의 일이 우리나라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북인(北人)을 위한 것입니까? 만약 우리나라 사람을 구제하려고 쌀 실은 배를 발송했다면 서로 호시(互市)하는 동안 오직 우리나라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위의 기록은 호시(互市) 즉 국가와 국가 간의 상인 거래에 관한 기록인데
상인간의 거래를 서로 형평성 있게 해 달라는 기록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북미의 일이 우리나라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북인(北人)을 위한 것입니까?’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을 제대로 해석하면
‘오늘날 북미의 일이 동인(東人)을 위한 것입니까? 북인(北人)을 위한 것입니까?’가
되는데 여기서 호시(互市)란 국가와 국가 간의 상인 거래 교역을 말 한다.
여기서 북인과 동인과의 교역을 국가와 국가 간의 교역인 호시(互市)라고 했다.
이 거래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조선의 신하가 숙종임금에게 간언 하고 있다.
그럼 동인과 북인은 국가 대 국가인 것으로 이들은 조선의 제후국이라는 것이다.
이 국가 간의 질서를 보고 받는 숙종임금은 누구란 말인가?
즉 숙종임금이 이 당대의 천자이기 때문에 보고를 받는 것이다.
즉 조선의 동, 서, 남, 북번의 그 실체는 하나의 제후 번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러한 사실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역사에서 조선의 수치라고 말하는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은 조선의 임금인 천자가 당한 수치가 아니라 북인세력 외
동, 서, 남번 중의 한 세력과의 전쟁이며 북인세력이 그 한 세력의 제후 왕에게
항복을 받아낸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