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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록 거량 7. 제자(弟子)도 갇혔고, 큰 스승도 갇혔구나
사주(泗州)에 있는 탑을 지키는 스님이 시간이 되어 탑문을 잠그자 어떤 사람이 묻기를, "3界의 큰 스승이 무엇 때문에 제자(弟子)에게 갇힐까요?" 하니 그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제자(弟子)도 갇혔고, 큰 스승도 갇혔구나."
원오 보설
[사주(泗州)에 있는 탑을 지키는 스님이 시간이 되어 탑문을 잠그자 어떤 사람이 묻기를, "3界의 큰 스승이 무엇 때문에 제자(弟子)에게 갇힐까요?" 하니 그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이 에시에 등장하는 탑입니다. 탑이 무엇입니까?
탑은 탑파(塔婆)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후 화장을 하였고 그 화장한 뒤에 경전에 의하면 8섬 4말이라는 사리가 숕아져 나왔고 이 사리를 수습하여 무덤을 조성하려고 하였으나 주변 석존을 따르든 많은 나라에서 그 사리를 나누어 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나누어 주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가져가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마하 가섭의 주장으로 각나라에게 나누어 주었어 사리탑을 조성하여 주기로 약속하여 인도 전역에 근본십탑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근본 십탑을 참배하고 부처님의 사리탑을 돌면서 자기의 소구소망을 빌고 수행자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종교로 자리잡은 것은 사실 탑파(塔婆)신앙에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주에 있는 탑도 물론 사리탑일 것입니다.
탑 안에 보관된 부처님의 사리탑을 지키는 스님이 아마 저녁 예불이 끝나고 사리탑의 둘래를 처 놓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잠금 장치를 한 문에다 자물세를 체웠든 모양입니다.
그 광경을 본 사부대중 중에서 왜 부처님 사리탑을 이렇게 둘래들 막아 놓고 저녁에는 자물쇠 까지 체워서 막는 것은 부처님의 출입또한 막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3界의 큰 스승이 무엇 때문에 제자(弟子)에게 갇힐까요?" 하시는 것은 삼계대 도사이신 부처님을 어떻게 일게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이 문을 닫아걸고 감금을 시키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형상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리탑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깃들어 있는 현세의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무정물인 부처님의 뜻을 새긴 조형물인 것입니다. 문을 닫고 자물쇠로 잠구는 것은 참배객들의 질서유지를 위한 방편이지 부처님의 영기가 문을 닫는다고 가두이거나 구속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스님이야 당연히 자기 직분을 하고 있을 뿐 부처님을 구속하거나 가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형상에 따라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업(業)이며 행동의 습관이지요. 삼계가 다 부처님이요 나 역시 부처인되 어디가 같히는 것이며 어디가 구속되는 것입니까.
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자유인 것인데 왜 같힌다고 생각을 일으킬까요 이것이 경게에 훈습되는 습성이며 인연법인 것입니다.
이네 몸이 법신이요 이 마음이 부처인데 어디에 상에 매달려 부처를 찾고 법신을 찾습니까? 돌~~~~~~!!!!!!!!
여기서 이 탑파신앙에 대하여 불교학자들이 조사 연구한 탑의 조성시기와 형식과 그 부위에 따른 의미를 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탑파(塔婆)는 인도에서 불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무덤 양식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이지만. 탑파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불교 이전부터 세워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사리탑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탑파는 석가모니가 구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열반한 후 그 사리가 8석이나 나와 각 나라로 나누어져 탑파를 쌓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2~3세기 무렵에는 인도 아소카 왕이 8만 4,000개의 탑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탑파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구조물로서 불교의 전파와 함께 각 지역에 세워졌는데 나라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양식이 많이 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다양화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유물이 기리는 성인이라는 개념과 동일시되고 또 탑파 자체와 동일시되는 탑파의 기본적 상징성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탑파 숭배는 흔히 해의 진행방향을 따라 탑을 돌면서 걸어가는 것으로 석존이후 탑파신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탑파는 다른 건물 안에 세워지더라도 언제나 독립된 기념물로 간주된다.
인도에서 BC 2~1세기경 축조된 산치의 대탑은 복발형(覆鉢形)으로 마치 분묘와 같은 형태이다. 이는 원형의 기단(基壇) 위에 알 또는 태반을 연상시키는 돔 모양의 거대한 탑신(塔身)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우산 모양의 덮개가 씌워져 있다.
대탑 주위에는 전체를 난간이 둘러싸고 있으며 4개의 문이 있는데, 이 문들은 석가모니불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 그의 전생(前生)에 관한 설화들, 신화에 나오는 인기 있는 영웅 등을 묘사한 돌로 새김한 조각으로 장엄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대가 내려갈수록 기단부(基壇部)· 탑신부(塔身部)· 상륜부(相輪部)의 3부분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파형식이 이루어졌다. 탑파는 그 형태에 따라 복발형탑(覆鉢形塔), 감탑, 주탑(柱塔), 안탑(雁塔), 라마탑(喇麻塔), 다보탑(多寶塔), 보협인탑(寶篋印塔), 오륜탑(五輪塔), 무봉탑(無縫塔) 등으로 나누어지며, 재료에 의해서 목탑(木塔), 전탑(塼塔), 석탑(石塔), 이탑(泥塔), 철탑(鐵塔), 금은탑(金銀塔) 등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전탑의 나라, 한국에서는 석탑의 나라, 일본에서는 목탑의 나라라고 각각 다르게 발달하여 주류를 이루었는데 한국에서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4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하여 인도·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의 탑파가 만들어졌습니다.
종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탑은 나무로 만든 중층누각(重層樓閣)의 탑파로 인도에서는 보기 드문 편이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크게 성행했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목탑이 건립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 형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다층누각형(多層樓閣形) 목탑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예로서 고구려시대의 평양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 팔각기단 목탑지(木塔址)와 임원군 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의 목탑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제시대의 예로는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제석사지(帝釋寺址), 미륵사지(彌勒寺址), 중원탑지(中原塔址) 등에 목탑의 방형기단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목탑으로는 지금 초석만 남아 있는 신라의 황룡사지(皇龍寺址) 9층목탑지와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쌍탑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황룡사9층목탑은 〈삼국유사〉 권3 황룡사지9층탑조(皇龍寺址九層塔條)에 의하면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율사가 삼국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645년에 건립했다고 합니다.
이 탑파는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이어져오다가 1238년(고종 25) 몽골 침입 때 완전히 불타버렸습니다. 이밖에도 고려시대의 만복사지(萬福寺址) 목탑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현존하는 법주사 팔상전(1624)이나 쌍봉사 대웅전(198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것을 현재 복원)과 같은 목조건축이 현존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도 목탑이 많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전탑은 보통 크기 27~28cm, 두께 5~6cm의 벽돌을 사용해 축조한 것인데 전체적인 탑파의 형태가 목탑이나 석탑과 매우 다르다. 그 기원은 인도에 있으며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 및 한국에도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원래 목탑이 기본이었지만 남북조시대부터 목조건물의 처마와 두공(枓栱)을 모방한 전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숭악사(崇岳寺)에 있는 12각15층전탑(523)이 가장 오래된 예로 알려져 있으며 당나라와 송대에 많이 건립되었다.
한국의 경우는 〈삼국유사〉 권4 양지사석조(良志使錫條)에 신라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 스님이 작은 전탑을 만들어 경주 영묘사(靈廟寺)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이미 전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탑은 재료의 취약성으로 인해 쉽게 파손되기 때문에 석탑에 비해 상당히 적게 남아 있다.
현존하는 전탑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지방 일대에 있는 신세동7층전탑· 동부동5층전탑· 조탑동5층전탑· 송림사5층전탑· 신륵사다층전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8세기경에 건립된 신세동7층전탑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청도 불령사(佛靈寺) 전탑지에서 특이하게 불상과 불탑이 조각된 전(塼)이 발견되었고. 한국의 전탑은 일반석탑과 같이 화강암을 사용했다는 것이 중국의 전탑과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인 형태는 낮은 단층기단으로 옥개석 상하에 받침을 두었고, 옥신석에는 감실 또는 문비(門扉)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탑보다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려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模塼石塔)이 더 많이 유행했습니다.
그 형태는 크게 석재를 벽돌과 같이 잘라서 전탑 모양으로 축조한 것과, 일반적인 석탑의 기본형식을 따르면서 표면을 전탑과 같이 가공하여 축조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경주분황사석탑, 제천장락리7층석탑, 안동대사동석탑, 정암사수마노탑 등을 들 수 있으며, 후자의 예로는 의성탑리5층석탑, 선산죽장사지5층석탑·경주남산용장사지3층석탑, 경주서악리3층석탑, 월남사지3층석탑 등이 있습니다. 특히 후자의 모전석탑 형식은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건립되었는데, 안동을 비롯한 의성, 선산, 경주 등 죽령(竹嶺) 지역에 집중되어 건립된 것이 주목됩니다. 이와 같이 석재를 이용한 모전석탑이 유행했던 것은 전탑이 한국인의 기호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재료의 특이함과 축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셋째, 석탑은 주로 화강암, 안산암, 점판암 등의 석재를 사용해 만든 탑파입니다. 중국에서는 서진(西秦)시대의 문헌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현존하는 예로는 5세기경의 윈강 석굴[雲崗石窟] 안에 4각5층석탑이 있다. 한국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이 많기 때문에 삼국시대 말인 600년경부터 석탑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탑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이 석탑은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말까지 약 200년간 건립되었던 목탑의 전통과 기술을 바탕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는 목탑을 모방한 7세기 중엽경의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석탑이 있습니다. 특히 미륵사지석탑은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선화공주)가 발원하여 7세기초에 건립한 것으로 한국의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규모가 크다. 신라시대의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예는 경주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634)으로 석재를 벽돌과 같이 쌓아올린 건축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형적인 석탑형식인 4각층탑이 크게 유행했는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그 형태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이루어진 지대석(地臺石) 위에 2층 기단이 놓여 있는데,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의 우주(隅柱)와 1개의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옥신의 각 면에는 양쪽으로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煙)·용차(龍車)·보주(寶珠) 등이 차례로 얹혀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예로는 감은사지동·서 3층석탑을 비롯하여 고선사지3층석탑·황복사지3층석탑,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경주 일대에 남아 있다. 또한 탑신부나 기단부 표면에 인왕상·사천왕상, 십이지상, 팔부중상 등이 조각되어 있거나 문양을 화려하게 장식한 특이한 형식의 석탑으로 원원사지동, 서3층석탑, 월성장항리서5층석탑, 화엄사서5층석탑, 정혜사지13층석탑, 화엄사4사자3층석탑, 진전사지3층석탑 등이 있습니다.
9세기에 들어서면 석탑의 세부구조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기고 크기도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옥개받침이 5단에서 3·4단으로 줄어들거나 기단부 면석의 탱주가 2개에서 1개로 표현되는 점 등이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석탑으로는 보림사3층석탑(870), 실상사3층석탑, 동화사비로암 및 금당3층석탑, 부석사3층석탑, 청량사3층석탑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말기에는 일반형 석탑의 2층기단이 단층기단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 예로는 경주남산용장사지3층석탑·봉암사3층석탑·화엄사동5층석탑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양식의 변화를 보이면서 석탑이 건립되었는데, 개성 현화사지7층석탑, 남계원7층석탑(경복궁 소재), 흥복사석탑(개성박물관) 등은 통일신라시대의 4각석탑 형식을 따른 예이다.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의 영향을 받은 월정사8각9층석탑, 보현사8각13층석탑, 원나라의 장인이 건립한 경천사지10층석탑(1348, 경복궁 소재, 2001년 현재 해체되어 보수중에 있음)과 같은 다각다층석탑(多角多層石塔)이 건립되었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단층기단이 많아지고 옥개석의 낙수면이 심한 경사를 이루며, 추녀도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는 등 장식적인 경향이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석탑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경천사지10층석탑을 충실히 따른 원각사지10층석탑(탑골공원 소재), 수종사8각5층석탑, 낙산사7층석탑, 신륵사다층석탑 등이 전하고 있다.
다시 본론 으로 돌아가 그렇게 탑의 문은 닫은 이야기를 예시한 법안선사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제자(弟子)도 갇혔고, 큰 스승도 갇혔구나."]라고 하시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불자님들이 모든 것은 형상으로 보고 그 형상으로 인하여 사물을 판단하고 그기에 끌려들어가 훈습되고 그 상을 만들고 조성하여 그 형상에 따라 일으나는 신심과 믿음과 계율과 형식을 만들어 그 형상에 집착하게 되고 그 형상으로 인하여 자기의 소구소망도 빌고 또 신앙으로 변모해 버렸어 정작 마음을 수행하는 불교의 근본에서 벗어나 형상이 고정화 되고 형상화 되고 형식화되고 의식화되고 행위화 되어서 불교의 마음 수행은 사실상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 법안선사는 바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제자(弟子)도 갇혔고, 큰 스승도 갇혔구나."라고 하시어 찰나간에 사라지는 그 형상에 따라 담이 쳐지고 문이 생기고 형식이 생기고 하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유위법이며 찰나간에 사라지는 허망한 것입을 알아야 하는데 대답을 못한 그 한 스님이나 선사나 큰 스님이나 다 행위불교 의식불교에 빠져 있음을 꾸짓고 있는 말임을
알아차려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임을 자각하시어서
성불인연 맺으시길 비옵니다.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법안록(法眼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매주 일요일 오후2시~4시에 원오선원에서 명상법회가 열립니다.
수희동참 하시어서 인연성불 하옵시어 대원성취 하옵소서
원오선원 명상쉼터 대구광역시 달서구 새방로 10(용산동577-4) (053) 586 660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법안록을 통하여 인연성불 요인성불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