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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놓여 있는 작은 방에서 아담스베르그는 낡은 담요가 덮인 사각형의 커다란 쿠션 의자 두 개를 발견했다. 의자들은 쉴 곳 없는 사람의 임시 잠자리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분명 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메르카데의 작품 같았다. 투철한 직업의식과 수면 사이에서 시달리고 있는 이가 바로 메르카데였기 때문이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든 아담스베르그는 그 잠자리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의자에 앉은 그는 허리 뒤의 쿠션을 빼고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대충 감싸주는 포근한 보풀은 마치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까지 주었다. 그곳은 사실 깊은 명상도 할 수 있는 자리였지만 아담스베르그는 발을 움직여 거닐 때에만 명상에 빠져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것도 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사고한다는 것과 ‘생각을 만들고 연결시켜 판단을 내리는’ 이 행위의 정의 사이에는 아무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아담스베르그가 인정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편안한 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팔을 괸 채 서류를 앞에 놓고 만년필을 손에 쥔 채 손가락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논리의 흐름을 끊어놓기만 하는 온갖 묘책을 생각해 내는 것도 잘못은 아니었다. 아담스베르그의 정신은 구조 자체가 허물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정신은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나와 하나의 ‘관념’으로 형성될 수 없는 마그마와 같은 하얀 종이만 떠올릴 뿐이었다. 이런 그의 정신 속에서는 소리, 낱말, 향기, 광채, 추억, 이미지, 메아리, 먼지가 서로 엉켜 있는 조그만 오솔길을 통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스물일곱 명의 요원들을 지휘하여, 국장의 표현대로 혁혁한 ‘결과’를 얻는 것도 결국은 아담스베르그의 이런 정신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이런 정신 상태에 대해 아담스베르그는 분명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것들로 꽉 차 있었다.
아담스베르그는 잠꾸러기 부하의 친절한 발명품을 고마워하며 두 팔을 쭉 뻗어 목뒤로 깍지를 끼었다. 어두워진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때 자판기 앞에 나타난 당글라르가 잠들어 있는 과장을 보곤 자판기 작동을 단념한 듯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나, 자는 거 아니야, 당글라르. 커피 마셔.” 아담스베르그가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메르카데를 위해 이런 자릴 만들어놓았나요?”
“그런가 봐, 계장. 그래서 한번 누워보았네.”
“메르카데와 경쟁하게 되었네요.”
“어쩌면 경쟁자가 더 늘어날지도 모르지. 귀퉁이마다 여섯 개의 좌석이 놓여 있잖아.”
“네 귀퉁이뿐인데요.” 바의 등받이 없는 의자에 올라앉아 두 발을 흔들면서 당글라르가 과장의 말을 정정했다.
“어쨌든, 등받이 없는 그 엉터리 의자보다 훨씬 편안해. 그런 의자는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 너무 높아서 발이 닿지도 않잖아. 거기 앉으면 마치 종탑에 앉은 황새 같다니까.”
“스웨덴 사람들이 만들었어요.”
“그래,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키가 더 크지. 참, 자네는 그런 것 때문에 어떤 게 변한다고 생각해?”
“네? 뭐가요?”
“키 말이야. 키의 차이가 사고에서 무언가를 변화시킨다고는 생각 안 해? 머리가 발에서 190센티미터나 떨어져 있을 때 말이야. 피가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그만큼 더 길어서 발과 뒤섞이지 않을 때 더 순수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역으로 키 작은 친구가 더 신속하고 구체적으로 생각을 잘할 수 있는 것일까? 어때, 자네 생각은?”
“임마누엘 칸트의 키도 겨우 150센티미터였대요.” 당글라르가 흥미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아주 훌륭한 사색가이고, 대단한 사상가였죠.”
“칸트의 몸은 어땠는데?”
“칸트가 몸을 쓰는 일은 없었답니다.”
“그 사람도 별로구먼…….” 다시 두 눈을 감으면서 아담스베르그가 중얼거렸다.
당글라르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느니 사무실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당글라르, 자네 그것 본 적 있나?” 아담스베르그가 한결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옹브르, 즉 어둠 말이야.”
당글라르 계장은 그 자리에 서서 창문을 때리고 있는 빗줄기를 쳐다보았다. 비 때문에 방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담스베르그 과장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그였기에 과장이 지금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 어둠이 지금 여기 와 있어, 당글라르. 빛을 가리고 있는 걸 자네도 느끼지? 주위에서 우릴 보고 있어.”
“어두운 기운 같은 건가요?” 계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말하자면 그런 거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당글라르는 한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떤 어둠이란 말인가? 또 언제 어떻게 왔단 말인가? 후유증 때문에 한 달의 강제 휴가를 보낼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아담스베르그가 겪었던 퀘벡의 충격적 사건 이후로 당글라르는 그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보살피고 있었다. 아담스베르그 과장은 온전한 정신에서 초췌한 상태로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또 재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물론 아담스베르그의 정신으로 말이다. 당글라르는 자신이 걱정하던 일이 임박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담스베르그가 곧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 같았다.
“언제부터요?” 그가 물었다.
“출장 갔다 온 뒤부터.” 두 눈을 뜨고 사각형 방석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어쩌면 그전부터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우리 구역을 배회하면서 말이야.”
“우리 구역이라고요?”
“우리 수사대 구역 말이야. 그게 자기 구역인 거지. 노르망디 같은 곳에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돌아오니까 있는 거야. 조심성이 있는 거지. 이 녀석은 아마 라 뮈에트일 거야.”
“그게 누군데요?”
“클라리스라고, 무두장이에게 맞아 죽은 수녀라네.”
“과장님은 그런 말을 믿어요?”
아담스베르그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언젠가 밤에 그녀 소리를 들었어.” 그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락방에서 옷감이 바닥 스치는 소릴 내면서 걸어가는 소리가 들리잖아. 벌떡 일어나서 쳐다보았지.”
“아무것도 없었죠?”
“맞아.” 아담스베르그가 아롱쿠르에서 구두점 역할을 하던 사람의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과장은 조그만 방의 구석구석에 눈길을 던졌다.
“그녀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거예요?” 당글라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치 지뢰밭을 탐색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좋은 것도 아니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녀가 우릴 도와주려고 여기 나타난 게 아니라는 거지.”
“과장님이 돌아온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곤 신참 하나 온 것 말고는 없는데요.”
“베이렝 드 빌?”
“그 친구가 마음에 걸립니까? 그 친구가 어둠을 데리고 온 건가요?”
아담스베르그는 당글라르의 말을 곰곰이 따져보았다.
“골칫거리인 건 분명해. 그 친구는 이웃 산골 마을 출신이야. 그 이야기 안 하던가? 자신이 오소 골짝 출신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머리카락 이야기도?”
“아니요. 왜죠?”
“그 친구가 어린 시절에 다섯 놈에게 당했다는데, 배에 칼질을 당하고 머리도 찢겼다는 거야.”
“아!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 그놈들이 우리 마을 친구들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 친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 그 친구는 처음 안 것처럼 행동했지만 여기 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 친구가 온 것도 그 때문이야.”
“왜 그렇죠?”
“지난 일을 떠올려보게, 당글라르.”
아담스베르그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가 2년 전에 체포했던 여자 생각나? 간호사였지, 아마? 그렇게 나이 많은 여자 범인은 처음이었어.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지.”
“그래요, 마녀 같은 여자였죠.” 당글라르가 맞장구쳤다. 목소리는 뒤엉켜 있었다.
“법의학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 그녀는 정신 분열 상태였대. 정상적인 그녀, 즉 알파인 그녀에서 죽음의 사신이자 다른 쪽의 오메가인 그녀로 말이야. 그런데 알파와 오메가란 게 정확히 뭔가?”
“그리스어 철자잖아요.”
“아! 그래. 그때 그 여자 나이가 일흔셋이었지. 체포당할 때의 그 여자 눈빛 기억나?”
“네.”
“그때 일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건은 아닌 것 같아. 자네도 그렇지? 그 여자가 지금도 우릴 쳐다본다는 생각, 들지 않아? 저 어둠이 바로 그 여자라고 말이야? 한번 기억을 더듬어봐.”
***
그랬었지. 당글라르는 그때를 생각했다. 사건은 한 노파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사. 사망 진단은 그랬다.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담당 의사와 함께 있을 때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던 법의학자 로맹은 15분 만에 사건의 결말을 내렸다. 심장 마비였다. 텔레비전은 그때까지도 켜져 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당글라르와 라마르는 이 같은 진부한 경험을 또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흔한 살의 노인이었다. 안락의자에서 사망했는데 손에는 책이 펼쳐진 채였다. <할머니의 기술>이라는 희한한 제목의 책이었다. 아담스베르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담당 의사와 법의학자가 거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사인은 동맥 파열이군.” 담당 의사가 말했다. “노인네들은 언제 쓰러질지 아무도 몰라. 쓰러지면 쓰러지는 거야. 이의 없죠?”
“전혀.” 로맹이 화답했다.
“그럼, 좋아. 그렇게 진행하세.”
의사가 만년필과 함께 사망 진단서 양식을 끄집어냈다.
“아닙니다.” 아담스베르그가 끼어들며 말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담스베르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로맹이 물었다.
“선생님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시나요?”
벽에서 몸을 뗀 아담스베르그는 사체에 다가갔다. 얼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은 뒤, 노인의 성긴 머리칼을 잠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얼굴을 들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로맹, 이 공기 중에 있어요. 시체만 쳐다보지 말고 다른 데를 좀 보세요.”
“다른 곳 어디요?” 천장으로 안경을 돌리면서 로맹이 물었다.
“로맹, 이 노인은 살해되었습니다.”
두툼한 검은색 만년필 뚜껑을 닫던 담당 의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두 손은 낡은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팔은 햇볕에 그을린 듯 갈색을 띤, 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키도 작고 눈도 흐릿한 이 친구는 영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깨끗한 인상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내가 담당하던 이 환자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어요, 늙은 말처럼 말이오. 이런 사람은 쓰러지면 그냥 쓰러지는 거라니까요.”
“물론 쓰러졌지만, 저절로 쓰러지지는 않죠. 의사 선생님, 무슨 냄새 안 납니까? 이건 향수도 아니고 약 냄새도 아닙니다. 이건 카밀레 꽃과 후추와 장뇌와 오렌지나무 꽃 냄새입니다.”
“진단은 다 끝났어요. 게다가 당신은 의사도 아니잖소.”
“네, 아닙니다. 경찰입니다.”
“짐작은 했소. 우리가 내린 진단에 불만이 있다면 당신네 과장에게 말하시오.”
“제가 과장입니다.”
“그래요, 이 사람이 과장입니다.” 옆에 있던 법의학자 로맹이 한마디 거들었다.
“제기랄.” 담당 의사가 뱉어낸 말이었다.
노련한 당글라르는 아담스베르그의 목소리와 태도에 의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아담스베르그의 증명으로 덜미가 잡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이유도 모를, 그렇다고 대단히 화려한 것도 아닌 아담스베르그의 마력에 이끌려 무쇠 같은 사나이와 강철 같은 여자들이 그의 설득에 넘어가는 것을 익히 보아왔듯이 담당 의사도 아담스베르그의 마력에 무너지고 있었다. 이 무례하고도 기묘한 현상을 접할 때마다 당글라르는 흡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글라르의 이런 불만은 아담스베르그에 대한 애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렇네요.” 당글라르가 허공의 냄새를 맡으면서 덧붙였다. “이건 아주 조그만 병에 넣어 파는 값비싼 기름 냄샙니다. 신경과민이나 우울증을 없애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관자놀이와 목뒤에 한 방울씩만 적셔도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는데, 수사대의 케르노르키앙 형사도 갖고 있어요.”
“맞아, 당글라르. 그게 이거야. 그래서 내가 이 냄새를 알아챘지. 의사 선생님, 여기 이 환자가 이 약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의사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두 사람은 비싼 향유 냄새보다는 자신이 처한 비참함의 극한을 보여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가 모험을 시작했다.
“그건 당신이 두 달 전에 죽은 여자 시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거기서도 똑같은 냄새가 났어요. 당글라르, 기억 안 나? 자네도 현장에 있었잖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당신, 로맹은 어때요?”
“아니오.” 법의학자는 기분이 몹시 상한 눈치였다.
“이건 같은 냄새야. 그곳과 여기서 각기 다른 두 사람이 죽기 직전에 동일 인물이 있었던 게 분명해. 이 환자의 담당 간호사가 누구였죠, 의사 선생님?”
“아주 뛰어난 간호사를 소개했는데.”
당황한 의사는 팔로 어깨를 주물렀다.
“그전에 병원을 그만두어서, 말하자면 불법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 간호사 덕분에 그다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환자들이 집에서 간호를 받을 수 있었지요. 더 이상 돈이 없을 때는 법망을 피할 수도 있잖아요.”
“간호사 이름이 뭡니까?”
“클레르 랑그뱅입니다. 40년간 노인병 간호 전문으로 일한, 아주 솜씨 좋은 간호사지요.”
“당글라르, 본부에 전화해서 노인 전문 의사를 찾아보라고 해. 그리고 그 의사에게 전화해서 지금 노인 환자를 맡고 있는 간호사 이름을 알아보라고 해.”
당글라르가 수사대에서 보낸 자동차까지 갔다 오는 동안 방 안 사람들은 자기 직업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20분을 보냈다. 환자 침대 밑에서 싸구려 포도주 한 병을 끄집어내며 의사가 말했다.
“항상 조금씩만 따라주었는데, 정말 독한 술이에요.”
침대 밑에 다시 병을 밀어 넣는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때 당글라르가 돌아왔다.
“클레르 랑그뱅이랍니다.” 그가 소리쳤다.
곧이어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고, 동시에 모든 시선이 아담스베르그를 향했다.
“살인 간호사구먼.”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소위 죽음의 천사라고 부르는 자들 중 하나야. 이들이 지상에 오면 대학살이 벌어지지. 그래서 죽음의 천사가 내려오면 많은 이들이 죽는 거야.”
“아뿔싸.” 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 선생님, 이 간호사가 맡고 있는 또 다른 환자는 누구죠? 당신이 소개시켜 준 환자들 말이에요.”
“아뿔싸.”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 병원 저 병원 이 동네 저 동네에 걸쳐, 죽음의 천사에 희생된 서른세 명의 명단이 만들어졌다. 근 반세기 전부터 죽음의 천사들은 프랑스와 폴란드뿐 아니라 독일까지 세력을 넓히면서 사람들의 팔목에 공기 기포를 만들어 죽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2월 어느 날 아침, 부하 네 명과 함께 아담스베르그는 교외에 위치한 그 간호사의 별장과 자갈로 된 진입로와 그녀가 돌보고 있는 화단을 포위했다. 막강한 화력을 가진 살인범도 능란하게 제압할 줄 아는 네 명의 부하들은 작전이라면 이골이 난 베테랑들이었지만, 오늘은 사소한 것에도 신경이 쓰여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성이 여성스럽지 않으면 세상이 흔들리는 거야, 아담스베르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입로를 올라오면서 아담스베르그는 당글라르에게 남자들이 살인하는 것은 여자들이 그러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일단 여자들이 나섰다 하면 세상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당글라르가 “아마 그렇겠죠.”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문이 열리면서 주름진 얼굴의 여자가 나타났다. 정갈하고 올곧은 자세로 여자는 화단의 꽃과 나무를 조심할 것을 주문했다. 아담스베르그는 여자를 유심히 보았지만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증오의 불길도 없었고, 간혹 다른 살인자들에게서 밝혀내곤 하는 죽음에 대한 열광도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야윈 여자일 뿐이었다. 수갑 채우는 동작은 침묵 속에 진행되었다. 익숙한 형사 피의자 고지 조항도 더듬더듬 전달됐다. 이어 당글라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 죽어가는 여인을 절대 무시하지 마시오. 가련한 사람이 죽는 이유를 누가 알리오.” 아담스베르그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건 대낮에 석양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맞장구였다.
“물론 기억납니다.” 당글라르가 오한이 이는 듯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멀리 프라이부르크 교도소에 있잖아요. 그녀가 거기서 어둠을 갖고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담스베르그는 일어섰다. 그리고 두 손을 벽에 대고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10개월 전까지는 그랬지, 당글라르. 그녀가 간수 한 명을 죽이고 탈옥했다네.”
“빌어먹을.” 종이컵을 으스러뜨리면서 당글라르가 말했다. “아니, 우리가 그걸 왜 몰랐죠?”
“바덴 주 정부가 통보 의무를 소홀히 한 거지 뭐. 관료 사회는 소통이 잘 안 되잖아. 산에서 돌아온 다음에야 알았어.”
“그녀의 행적을 알아냈대요?”
아담스베르그가 창밖 거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니, 계장. 그 여자는 지금 저 밖을 배회하고 있어.”
14장
에스탈레르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다이아몬드 같은, 클리냥쿠르에서 찾은 자갈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예요?”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면서 당글라르가 물었다.
“그분을 위한 거예요. 그분이 찾아오라던 것이거든요.”
에스탈레르가 말하는 그분이 아담스베르그 과장임을 당글라르는 순간 떠올렸다.
당글라르는 에스탈레르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는 양 빠르게 인터폰을 눌렀다. 이미 땅거미가 내려 있었다. 집에서는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담스베르그 과장님? 에스탈레르가 과장님께 무언가를 가져왔어요. 여기 와 있습니다.”
에스탈레르는 손바닥을 펼친 채, 조금 전 자세를 조금도 풀지 않고 있었다.
“편히 있게, 에스탈레르. 과장님 오시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항상 느리잖아.”
5분 뒤 아담스베르그가 도착할 때까지 젊은 형사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동상처럼 서서 무언가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에스탈레르와 함께 가, 그 친구 눈이 비상해.”라고 과장이 아까 회의에서 한 말을 계속 되뇌고 있었다.
젊은 친구가 갖고 온 전리품을 아담스베르그는 유심히 뜯어보았다.
“이 돌들이 거기에 그대로 있었지?” 과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바깥에서 찾았습니다. 문간에 붙어 있는 작은 계단 왼쪽에서요.”
“자네가 찾을 줄 알았지.”
에스탈레르는 마치 첫 비행에서 벌레를 물고 돌아온 새끼 새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몽루주 사건에 남은 시간은 하루밖에 없어, 밤샘을 해야 돼. 네 명, 아니 가능하면 여섯 명으로 조를 짜서 출동하라고. 쥐스탱, 메르카데, 가르동과 함께 말이야. 그 친구들이 오늘 당직이거든.”
“네, 하지만 메르카데는 아마 지금 자고 있을 겁니다.” 당글라르가 요원들의 상황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면 부아즈네랑 함께 가. 그리고 르탕쿠르도 데려가. 단, 그녀가 원하면 말이야. 르탕쿠르는 잠자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여자야. 열흘을 밤샘할 수 있고, 또 걸어서 아프리카를 횡단한 뒤 밴쿠버에서 비행기를 잡아탈 수 있는 여자가 바로 르탕쿠르야. 에너지를 변환시킬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여자지.”
“물론이지요, 과장님.”
“공원이나 빈터, 풀밭 길을 샅샅이 뒤져봐. 특히 창고 같은 곳을 주의해서 찾아봐. 리스트와 하나하나 대조하고, 확인하면서 말이야.”
에스탈레르가 출발했다. 거의 뛰어가듯 했다. 물론 올 때 지니고 있는 그 보물을 손에 꽉 쥔 채.
“저도 갈까요?” 당글라르가 컴퓨터를 끄면서 물었다.
“아니야. 아이들하고 저녁 식사를 하게. 나도 애한테 가봐야 돼. 카미유가 생튀스타슈에서 연주를 하거든.”
“애들과의 저녁 식사는 이웃에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스물네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잖아요.”
“그래서 눈 좋은 친구가 갔잖아. 게다가 그 친구 혼자도 아니고.”
“그 친구 눈이 비상하다는 걸 과장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 친구는 눈이 좋을 수밖에 없어. 젊잖아. 그리고 처음 올 때는 다들 눈이 좋아. 어떤 친구들은 좋았던 시력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유지하는가 하면, 다른 친구들은 몸이 불어서 날씬한 몸매를 망치기도 하고, 또 다른 친구들은 총명했던 머리가 흐릿해지기도 하지.”
아담스베르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머릿속에서 신참의 붉은 다갈색 머리를 떨쳐 내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탈레르 혼자 그 자갈을 찾았을 거야. 르탕쿠르는 만사 귀찮아서 신참과 맥주 한잔 마시고 있었을 거고, 아마.”
“그랬을 거예요.”
“르탕쿠르는 나한테 또 화를 내고 있겠지.”
“과장님은 모두의 화를 돋우잖아요. 그녀라고 예외는 아니겠지요.”
“모두들 신경질을 내도 그녀만은 아니야. 르탕쿠르는 내가 무얼 바라는지 알고 있어. 내일 보세, 당글라르.”
***
아담스베르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 위에는 아이가 엎드려 있었는데, 아비 원숭이의 털에 매달린 새끼 원숭이 같았다. 둘 다 저녁을 제대로 먹은 뒤라 평온한 가운데 말이 없었다. 둘은 아담스베르그의 둘째 누이가 준 커다란 빨간 털 이불 속에 푹신 빠져 있었다. 다락에도 수녀의 흔적은 없었다. 예전에 루치오 벨라스코 씨가 혹시 클라리스가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아담스베르그는 그런 건 없다고 분명히 말한 적이 있었다.
“얘야, 이야기 하나 해줄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담스베르그가 입을 열었다. “산간 지방 이야기인데, 전에 했던 ‘오푸스 스피카툼’ 얘기는 아니야. 이제 담장 얘기는 지겹지. 오늘은 어떤 염소가 다른 염소를 만난 이야기야. 염소는 다른 염소가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걸 무척 싫어한단다. 대신 다른 동물들은 아주 좋아하지. 토끼든 새든 곰이든 마르모트든 어떤 동물이든 다 좋아하지만 염소는 절대 아니지. 다른 염소가 자기의 영토와 아내를 빼앗으려 하니까 그렇단다. 그래서 커다란 뿔로 다른 염소를 받아버린단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기라도 하는 듯 토마가 몸을 뒤척였다. 아담스베르그는 아기의 주먹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괜찮아, 곧 끝날 거야. 오늘은 내가 염소 뿔에 받힐 뻔했단다. 내가 먼저 선수를 치자, 붉은 염소는 도망치고 말았어. 얘야, 너도 크면 뿔을 갖게 될 거야. 너에게 뿔을 주는 것이 바로 산이란다. 산이 유익한 건지 해로운 것인지는 나도 잘 몰라. 그게 너도 어쩔 도리가 없는 너의 산이란다. 내일이든 모레든 그 염소가 다시 와서 나를 공격할 거야. 화가 무척 나 있겠지.”
이야기를 듣는 아이보다 이야기하던 아담스베르그가 먼저 잠들었다. 한밤중에 두 부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깊은 잠에 들었다. 그러다가 아담스베르그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팔을 뻗어 전화기를 잡았다. 전화번호는 머릿속에 있었다.
“르탕쿠르? 지금 침대에 있나, 몽루주에 있나?”
“과장님이 한번 맞혀 보세요.”
“몽루주의 창고 같은 곳이겠지.”
“아닙니다. 빈터에 있어요.”
“다른 친구들은?”
“흩어졌어요. 한참 찾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고 있어요.”
“지금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딘가?”
“장조레스 거리 123번지 근처요.”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곧 갈게.”
아담스베르그는 천천히 일어나 바지와 윗도리를 입은 뒤 아이를 품에 안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조심스레 받쳐 토마가 깨어날 염려는 없었다. 추운 한밤중에 몽루주로, 그것도 무시무시한 형사들 틈으로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을 카미유가 모르기만 하면 만사 괜찮을 것 같았다.
“톰, 엄마한테 고자질하지는 않겠지?” 담요로 아이를 감싸면서 아담스베르그는 중얼거렸다. “엄마한테 밤중에 나간 걸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어쩔 수 없어서 이래, 하루밖에 시간이 없거든. 얘야, 잘 자.”
25분 후, 택시가 아담스베르그를 장조레스 거리에 데려다 주었다. 대원들이 보도블록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데리고 다니는 데는 이골이 났군요, 그래.” 택시로 다가오면서 르탕쿠르가 말했다.
자신들의 생명까지 걸었던 그 치열한 몸싸움 이후 아담스베르그 과장과 르탕쿠르 경사는, 기차가 레일을 갈아타듯이 가끔 평소의 호칭을 바꾸어 말을 놓고 지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확실히 속내가 서로 통하는 동류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결합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처녀들의 사랑처럼, 말하자면 더 이상 변치 않을 것 같은 사랑인 셈이었다.
“너무 걱정 마, 비올레트. 아기는 천사처럼 잘 자고 있어. 자네가 당글라르에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만사 오케이야. 그랬다간 당글라르가 당장 카미유에게 일러바칠 거야. 신참은 왜 왔어?”
“쥐스탱 대신해서요.”
“차량은 몇 댄데?”
“두 대입니다.”
“한 대에 타게. 난 다른 차를 탈 테니까. 묘지 정문에서 만나세.”
“왜요?” 에스탈레르가 물었다.
아담스베르그가 그의 볼에 손을 잠깐 갖다 댔다.
“자네가 찾은 돌은 거기서 나온 거야, 형사. 디알라와 라 파유의 고정관념을 생각해 보게.”
“그 녀석들이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나요?”
“그럼, 그 녀석들이 고정관념 이야기를 했잖아.”
“아, 그 녀석들이 했다던 무덤의 평석 깨는 이야기 말인가요?” 부아즈네가 말했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다고 했잖아. 그놈들은 카페에 들러 음식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어떤 굉장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어. 무덤 평석 이야기가 그거야. 평석을 빼내거나 깨뜨리는 이야기 말이야. 이 몽루주에 있는 누군가가 그 평석이 너무 무거워 그 녀석들의 힘을 빌린 거지.”
“몽루주 공원묘지에 있는 묘지석 말이군요.” 갑자기 가르동이 끼어들었다.
“묘지석 가운데 하나를 들어내고 무덤을 연 거야. 자, 다들 횃불 하나씩 준비해.”
잠들어 있던 공원묘지의 관리인을 깨우는 데는 아주 힘들었지만 조사는 쉽게 이루어졌다. 아무런 소일거리도 없어 심심하던 밤중에 경찰이라도 말을 주고받는 게 관리인으로서는 반가운 일 같았다. “네, 그래요. 그날 사람들이 묘지석 하나를 들어냈어요. 위에 올려놓고 그걸 깼지요. 무덤 옆에서 두 개의 조각을 발견했어요. 나중에 가족들이 묘지석을 새로 놓았죠.”
“무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담스베르그가 물었다.
“네? 무덤이라고요?”
“묘지석을 들어내고 난 뒤에 말입니다. 그 안을 파지 않았나요?”
“아뇨. 하지만 문제를 많이 일으켰죠.”
“그게 언제 이야긴데요?”
“보름 전 밤이었는데, 정확한 날짜는 장부에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관리인이 선반에서 두툼한 장부를 꺼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6일에서 7일 사이의 밤이군요. 여기 다 나와 있어요. 묘지 명부를 확인하고 싶은가요?”
“그건 조금 있다 하지요. 우선 그곳으로 안내해 주시죠.”
“안 됩니다.” 관리인이 몸을 움츠렸다.
“안내해 주세요, 제발. 우리가 어떻게 그 무덤을 찾습니까? 호수같이 커다란 이 공원묘지에서 말입니다.”
“안 됩니다, 절대로.” 관리인의 고집이 대단했다.
“묘지 관리인 맞아요, 당신?”
“지금 여기 우리는 둘뿐이에요. 난 가고 싶지 않아요.”
“아니, 우리 둘뿐이라고요? 다른 관리인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자는 밤마다 나타납니다.”
“누군데요?”
“잘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그건 그림자예요. 하여튼 거기는 안 갈 거예요.”
“본 적 있어요?”
“물론이죠. 지금 당신을 보는 것처럼요. 그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림자인데, 회색에다가 느릿느릿 움직여요. 그 친구는 미끄러지는 것처럼 걸어가요. 넘어질 듯하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면서 말이에요.”
“그게 언제인데요?”
“묘지석을 옮기기 2, 3일 전이었어요. 하여튼 거기엔 가기 싫어요.”
“그럼 우리가 찾아갈 테니 당신은 따라오기만 해요. 당신을 절대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게요. 당신을 보호할 형사를 붙여 줄게요.”
“꼼짝없이 경찰이랑 지내게 됐네. 당신은 아이까지 데리고 다니네요. 무섭지도 않나 봐요.”
“아이는 자고 있어요. 아이는 겁나는 게 없잖아요. 어린아이도 가는데 당신이 못 간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르탕쿠르와 부아즈네의 호위를 받아 관리인이 일행을 무덤까지 안내해 주었다. 서둘러 돌아올 욕심에서인지 발걸음이 무척 빨랐다.
“자, 저기예요.”
아담스베르그는 돌 위에 횃불을 놓았다.
“젊은 여자군. 석 달 전, 서른여섯 살에 죽었어. 이 사람이 왜 죽었는지 기억해요?”
“제가 알기론 교통사고였답니다. 참 안됐어요.”
“네, 그렇네요.”
에스탈레르가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조사했다.
“자갈입니다, 과장님. 같은 거예요.”
“그래, 형사. 하여튼 견본을 제대로 챙기면서 조사해.”
아담스베르그가 횃불로 손목시계를 비추었다.
“5시 반이 거의 다 됐군. 30분 뒤에 가족들에게 통보해 줘.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무얼 하려고요?” 관리인이 물었다. 사람들과 같이 있게 되자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했다.
“묘지석을 들어내려고요.”
“아니, 이 돌을 몇 번이나 들어내는 거예요?”
“돌을 들어내지 않고서 그들이 무얼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주 논리적이야.” 부아즈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은 무덤을 파지 않았어요.” 관리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젠장, 아까 내가 말했잖아요.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바늘구멍 하나 나 있지 않아요. 마른 장미 가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 땅바닥을 봐요. 이게 바로 그들이 손을 대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안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확인은 해봐야지요.”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요?”
“이 일과 연관되어 보이는 남자 둘이 목이 찔린 채 죽었어요. 묘지석을 들어낸 대가를 치른 셈이지요. 정말 골치 아픈 문제를 던져놓고 말입니다.”
당황한 관리인은 손으로 자기 배만 긁었다.
“그들은 다른 무언가를 했을 겁니다.” 아담스베르그가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런데 왜 난 아무것도 못 보았죠?”
“곧 알게 되겠지요.”
“네.”
이때 베이렝이 르탕쿠르를 따로 불러내어 물었다.
“과장님은 왜 시계를 두 개씩이나 차고 있죠? 미국 시간을 보려고 그러나요?”
“그게 아니라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원래는 하나였는데 여자 친구가 또 하나를 주는 바람에 그것도 같이 차고 다녀. 그래서 두 개가 된 거지.”
“둘 중에 어느 걸 택할지 마음이 서지 않은 것이로군요.”
“아니,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고 단순해. 시계 두 개가 있다, 그래서 두 개를 차고 다닌다. 이런 거지 뭐.”
“알았어요.”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과장님이 공원묘지 생각은 어떻게 한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꿈이라도 꾼 건가요?”
그때 아담스베르그가 불렀다. “르탕쿠르, 요원들 잠깐 쉬게 하지. 나도 엄마한테 애를 맡기고 교대할 사람들과 같이 올게. 그때 만나지. 참, 그리고 이 무덤의 가족 동의서 좀 받아놓을 수 있겠나?”
“제가 함께 있을게요.” 신참이 나섰다.
“그래, 베이렝? 자네 괜찮겠나?” 아담스베르그가 딱딱하게 물었다.
“안 될까요?”
르탕쿠르 경사는 재빨리 눈을 감았고, 아담스베르그는 괜한 말을 했다며 후회했다. 산에서 만난 염소들의 충돌을 떠올리며 경사는 베이렝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밤인데도 머리에 나 있는 붉은 갈색 무늬가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지금은 일이 있어, 베이렝. 그것도 아주 고약한 일이야.” 아담스베르그가 천천히 말했다. “지금까지 34년을 기다려왔는데, 또 며칠 더 기다려야 해. 그래서 말인데, 우리 잠시 휴전 협정을 맺자고.”
베이렝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아무 말 없이 과장의 제안에 동의했다.
“알았어. 그럼, 한 시간 뒤에 다시 올게.” 길을 나서면서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아니, 무슨 말이에요?” 과장을 뒤따라가던 르탕쿠르가 물었다.
“전쟁 이야기야.” 아담스베르그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두 산골 마을 사이의 전쟁 말이야. 자네는 여기에 끼어들지 말게.”
마음이 편치 않은 듯 르탕쿠르가 멈추어 섰다. 그러곤 가까이 있던 돌을 주워 허공에 던졌다.
“전쟁이 지금도 심각해요?” 그녀가 물었다.
“웬만큼은.”
“저 친구는 무얼 했는데요?”
“그보다는 저 친구가 앞으로 어떻게 할까? 비올레트, 자네 저 친구 좋아하지? 그러니 제발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게. 언젠가는 자네가 선택해야 될 순간이 올 거야. 저 친구와 나 사이에서.”
첫댓글 슬슬 얽혀들기 시작하누만.
그의 정신 속에서는
"소리, 낱말, 향기, 광채, 추억, 이미지, 메아리, 먼지가 서로 엉켜 있는 조그만 오솔길을 통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키의 차이가 사고에서 무언가를 변화시킨다고는 생각 안 해? 머리가 발에서 190센티미터나 떨어져 있을 때 말이야. 피가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그만큼 더 길어서 발과 뒤섞이지 않을 때 더 순수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주옥같은 문장들이 연이어 터진다. 황홀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