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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암산 정상 표지석 백암산은 울진군의 남쪽에 온정면과 영양군 수비면 사이에 있는 1,004m산 이 표지석 뒤쪽은 헬기장이다.
2. 진달래 이 산은 멋지고 울창한 금강송 소나무가 특징이고, 진달래는 많지 않은 산인데. 3월 17일 현재 백암산에는 아직 진달래가 피지 않았다. 이것이 등산코스에서 본 유일한 백암산 진달래다.
3. 생강나무꽃 이른 봄에 산에서 피는 꽃 중에서 가장 먼저 핀다. 좋은 봄날 멋진 산행이다.
금강송(춘양목)
4. 금강송(춘양목) 이 지역에 잘 생기고 곧고 붉은 소나무를 금강송 또는 춘양목 이라고 한다. 지난 설에 KBS 특집방송 울진 금강송을 본 후라 관심을 가졌는데, 이번에 직접 등산을 하면서 자세히 관찰하게 되어 기쁘다. 옛날에 백암폭포까지 왔다 갔지만 그때는 마음에 보이지 않았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하였던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다' 는 고은 시인의 짧은 시가 생각났다.
5. 남사고 울진 태생 풍수지리학자 남사고의 유적지 <남사고 생가터>가 근남면에 있다. * 南師古 ; 고향은 울진, 생몰연대는 미상, 조선중기 학자 도사. 본관은 영양, 호는 격암格菴 선조 때 천문교수를 자낸 것 외는 뚜렷한 경력이 없다. 풍수지리설의 많은 일화를 남겼다. 남사고 비결, 격암유록 등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울진군에서는 남사고 연구를 하고 있다.
6. 남사고의 예언 -명종 말기에 선조 때 있을 분당당쟁을 예언했고,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침범하리라고 했는데, 나중에 왜장 가토(가등청정)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풍수지리에 능했으나 자기 아버지 무덤을 쓸 때에 지나친 욕심에 눈이 멀어서 아홉 번 이장하고 열 번 무덤을 써서 구천십장 九遷十葬을 하는 무리를 하여, 후손도 없이 망했다고 한다.
7. 어우야담(유몽인)의 남사고 이야기 남사고가 강릉에 있을 때 고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금년에는 반드시 큰 병란이 있어, 이곳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삼가 피하도록 하십시오." 고을 사람들은 평소 남사고가 신통한 예언력이 있음을 잘 아는지라 간성과 양양 사이로 피난하였다. 그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온 고을이 적막해졌다. 남사고가 돌아와 말했다. "나의 점술이 조잡하다고 하겠구나. 전염병을 두고 병란이라 하다니......"
8. 잔치를 구경가라. 강릉 고을의 선비 최운부가 과거에 급제한 뒤, 장차 부모를 위해 경사스러운 잔치를 열려고 하자 남사고가 고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반드시 가서 잔치를 구경하도록 하게나. 이 고을에서 30년 동안 이 같은 경사가 없을 것이네." 훗날 '이숙'이라는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니 꼭 31년만이었다.
9. 손님 올것도 알아 남사고가 일찍이 서울에 온 적이 있었는데, 참판 정기원이 어린 나이로 어른을 따라가 남사고를 보았다. 훗날 정기원이 다시 찾아갔을 때, 집 안에서부터 큰 소리로 "정수재가 왔는가?" 하면서 남사고가 허둥지둥 달려 나와 맞이했다. 정기원이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제가 올 줄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그대가 올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남사고가 벽을 가리켰는데, '모월 모일에 정 아무개가 온다' 라고 쓰여 있었다.
10. 선조 즉위 예언 -가정 정묘년(1567)에 남사고가 남산 잠두봉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오랫동안 놀라 탄식하고는 말했다. "어찌하여 왕기가 다해 가는 고!" 잠시 후에 또 말했다. "왕기가 사직동으로 옮겨 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헌대왕(명종)이 승하하셨는데, 적통의 후사가 없어 소경대왕(선조)을 사직동의 잠저 潛邸(왕이 되기 전에 살던 사가)에서 모셔와 받들었다. -정축년(1577)에 치우기(병란의 전조가 되는 별)가 출현하였는데, 그 길이가 하늘과 나란할 정도였다. 이를 보고 남사고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11. 송진 채취 아픈 상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전쟁물자가 부족하자,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여 인적 물적 수탈을 강행했다. 심지어 소나무의 송진까지도 채취해서 바치라는 할당을 했다. 이 소나무들의 상처는 그 때의 아픈 상처들이다. 이곳에서 자세히 보면 이런 모양이 많다.
12. 상처가 마치 하트 모양 같아서 그려 보았다.
백암산 정상의 경치
13. 백암산 정상 전망 경치 울진지역은 진한시대 우중국으로 비정(추정)되는 곳이다. 신라 경덕왕(757년)에 울진군 명칭이 생겼다.
14. 울진군은 1963년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15. [역사] 울진봉평신라비 죽변면 봉평리의 울진봉평신라비는 국보 242호. 524년 (법흥왕 11)에 세움. 1988년 4월 발견. 고구려 영토에서 신라영토로 편입되면서 세웠다. 율령제도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16. [역사] 울진봉평신라비 점령지 백성은 신라의 노인 奴人에 해당되는 바, 이들이 신라에 항쟁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신라는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6부회의를 열고, 대인을 파견하여 다시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 매금왕(법흥왕)도 각부 신료들과 함께 명령을 발하였으니, 당시 신라왕의 한계를 볼 수가 있다.
17. 정상에 바람이 거세니까, 소나무의 수형도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18. 불영계곡 울진의 불영계곡은 12km나 되는 깊은 계곡이다. 이 계곡 불영사는 651년 신라 진덕여왕 때 의상이 창건하였고 여승들의 절이다.
19. [역사] 울진 삼척 무장공비 120명 침투사건, 1968년 11월, 소탕작전으로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다. 우리 쪽 인명피해는 민간과 군경의 전사자 18명. * 평창군 10세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절규하다 죽음을 당한 것도 이때이다.
20. 하산 사이클을 타고 운동장 커브를 도는 것 같은 모습이다. 앞은 낭떠러지, 주의!
21. 위험, 절벽이다.
22. 울진 명승지 -망양정(근남면) 과 월송정(평해읍 월송리)은 관동팔경 중에 속한다. -명승지 성류굴(근남면 수곡리)은 전장 479m -울진군 북면에는 울진원자력발전소가 있다.
23. 잔설 봄인데 잔설이 남았다. 산정에서 눈사람을 만났다.
24. 능선에 쌓인 눈의 두께를 보라. 마치 성벽 같다.
잡목의 아름다움
25. 정상 참나무 밭의 빼빽한 모습
26. 잡목의 아름다움. 뿌리 부분이 예술작품 같다.
27. 참나무 껍질은 코르크 마개를 한다.
28. 천냥묘 등산길에 김녕 김씨의 묘소 두기가 아래위로 있는데, 천냥묘라고 표지판이 그럴듯한데 설명이 없어서 많은 등산객들이 궁금해 한다. (궁금하면 5백원~) 군청 사이트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그러므로 특별한 전설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쉽게 말하자면 무덤 자리가 명당이어서 거금 천냥을 주고 샀다는 것이다. 관리소 아저씨의 설명이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인터넷상에 전한다.
29. 천냥묘(계속) 멀지 않은 옛날 김녕 김씨 집에 머슴살이를 하던 천씨 성의 사람이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소로 쓸 적당한 장소가 없어 이 높은 곳까지 모시고 와서 아무렇게나 묻고 갔는데, 그 후 점점 살림이 번창해갔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이 유명한 풍수를 데려다가 머슴부친의 산소를 보였더니 천하명당이라면서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산소를 사라고 권유하였다. 김녕 김씨 주인은 머슴을 설득해서 기어이 천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 그리고 자기 할아버지를 그 곳 위쪽에 이장시키고 그 아래에는 자기가 묻혔다. 그 후부터 천냥묘라고 불렸고, 그 후손 중에서 초대 울진군수가 나왔다는 얘기다.
새터 바위와 주변 전망
30. 새터 바위 백암폭포 조금 위에 있는 새터 바위, 이 바위 아래에 새들이 많이 깃들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1. 울진 죽변항 어부 정대화 이야기 정대화 이야기를 시작으로 <희망, 신념, 의지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1994년 울진 죽변 어부 정대화는 난파당하여 15일 표류 끝에 살아났다. 출어할 때 아들이 도시락 반찬으로 콩자반 좀 사달라고 칭얼거리던 것을 듣고 나왔기 때문에 꼭 살아서 아들에게 콩자반을 해주어야겠다고 굳은 의지로 망망대해에서 15일을 버텨냈다. 정신이 혼미해 지려면 ‘콩자반~’ 하고 외치며 죽음을 극복했다 한다.
32. 에스토니아호 조난 승객 9백 명이 죽은 에스토니아호 조난(1994) 순간 29세의 청년 켄트는 20세의 아가씨 사라에게 “우리가 다시 살아난다면 스톡홀름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하자.”고 극한 상황에서 데이트를 신청하자 사라는 “꼭 그렇게 하겠어요.” 라고 약속했다. 사라가 구명보트를 붙잡고 실신상태의 남자를 구하고 보니 켄트였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영하의 바다에서 5시간의 표류 끝에 구조되었다. 그들은 스톡홀름에서의 저녁식사 약속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33. 유태인 수용소에서 나치스의 다하우 유태인 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까지는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항복 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하루 30명 안팎의 병사자가 5명 미만으로 격감하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전쟁이 계속되자 병사자가 80여명으로 급증하였다 한다.
34.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비엔나 대학 신경정신과 교수 빅토르 E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라는 책을 썼다. 그는 유태인으로 제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3년 간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몸이 튼튼하다고 반드시 살아남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력이 승리의 열쇠였다.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이 죽음을 이겨내었다. 나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희망과 사명감이 절망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35. 영화 빠삐용 영화 빠삐용에서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획득하는 강인한 의지의 인간을 잘 그려 놓았다. 몇 해 동안 독방에 갇혀서 영양부족 때문에 시력이 나빠지고 이빨이 빠지며 죽음직전의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매일 아침 ‘나는 약해지지 않는다.’고 되풀이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원기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감동을 주었다.
36. 희망 변수 이 예들은 모두 희망변수(希望變數)가 생명에 영향을 준 것이다. 희망(希望)의 힘, 신념(信念)의 힘, 의지(意志)의 힘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암 폭포
37. 백암폭포
높은 낙차落差아래 깊은 용소龍沼는 맑기도 해라 너를 다시 불러 주고픈 이름은 '은사시폭포' 가 좋겠어. * 이재익 <간월산 홍류폭포에서> 제1연
38.
어차피 저 길 밖에 없다 해도 저토록 용감하게 떨어지는구나.
살아가며 풀리지 않는 일 있으면 폭포에 와서 결심을 다질 수 있으리. * 이재익 <간월산 홍류폭포에서> 제2, 3연
39.
폭포야, 너로 인해서 오랜 마음 숙제를 해결해 가니 내 머리가 더욱 맑아지고 오늘은 최상의 삶을 사는구나. * 이재익 <간월산 홍류폭포에서> 제4연 //
40. 우렁찬 폭포수 밑에서, 땀을 씻고 몸을 식히거나, 먹고 힘을 차리기도 하고, 기를 받고 호연지기를 키우기도 하며, 감상하고 명상을 하는 이도 있다. 이재익, <폭포수 아래서> 제1연
41.
그 어느 것도, 정답도 오답도 아닌 말없는 그 자리가 이끄는 힘이요, 실상이다. 이재익, <폭포수 아래서> 제2연
42.
진리는,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 흐르는 물 한 방울에도 있는 법,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지구의 중심이 될 수도 있고........ 이재익, <폭포수 아래서> 제3연
43.
나 머무는 곳 어디든지 그 자리는 상석上席, 그 자리는 꽃자리요, 깨달음의 자리. 이재익, <폭포수 아래서> 제4연 //
44. 백암온천은 유황 라돈 등 성분이 많은 물 좋은 온천. 울진군 북쪽 덕구 온천은 알칼리 온천이다.
45. 백암산 정상
46. 백암폭포. 내가 좀 멋지게 나온 것 같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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