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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경을 많이 알지 못하였으나 1931년 9월 10일 목포 유달산에서 성령의 불 세례를
받은 후에 모든 세상의 잡서를 버리고 성경에만 전무한 것이 동기가 되어서 성경을 열심
히 읽는 동시에 성경에 대한 지식을 알고 깨닫게 되었다. 어떤 주석이나 강해 보다 더욱
신비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30년 전까지는 성경 연구에 대하여 많은 취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반대로 세속적 서
적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30년 전 어느 날 성화(聖火)의 세계가 임할 때에 신앙
의 정화를 받고 성서의 빛을 받음으로 성서의 경이적 가치를 깨 닫게 되었다. 이것이 나
의 신앙의 혁명인 동시에 성서로 돌아가는데 획기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서 따르
는 결과는 성서연구에 방해되는 제반 속서(俗書)를 숙정하고 성서연구에만 전심치의(專心
置意)하였던 것이다. 누구든지 이같은 경험을 가진 자마다 성서에 대한 진미를 깨달을 줄
믿는다.
영암은 성경을 정확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기독교 진리의 토대와 생명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성경이 지닌 위력으로 구원의 능력, 지혜의 원천, 교육의 양서, 영혼의 좌우 검, 영혼의 탐조등을 지적했다.
영암 신학의 유일한 출처는 성경이었다. 그는 그의 저서 곳곳에서 "나는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정통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어떤 학설이나 사상으로부터의 영향을 전적으로 배격하고 오직 성경 말씀과 원리에 충실하려고 했다. 이는 "내게는 서재가 없다." "하나님이 직접 주필이 되고 나는 기자만 되려는 때문이다"라고 한 그의 말에 의해서도 증거된다. 순 복음적 입장에서 성경에 나타난 진리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그의 저술 활동의 목적이었다.
영암의
신학 활동은 철저히 성경 중심적이었다. 성경을 강해할 때도, 성경 그 대로 해석할 뿐이었다. 즉 성서로 성서를 해석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과 지시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인간의 학설이나 교파의 주의 혹은 주장을 떠나 성경 그대로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인간의 말이요 사상"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설교 역시 성경 중심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범 설교 1000]을 통해
목회자들에게 설교는 성경 중심이어야 하며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의 조직신학서인 [성서적 정통신학]을 "학설이나 논문이
아니고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서를 중심한 신학"이요 "성서를 중심한 순수한 진리 입장"이라고 스스로 평했다. 따라서 영암 김응조목사 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경 중심적 신학 또는 철저한 성서주의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은총의 신학
영암 김응조목사는 목사, 감리목사, 부흥사, 신학교수, 저술가, 신학대학장에 이르는 자신의 90 평생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아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자서전의 명칭을 [은총 90년]이라고 한 것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개인적 신앙 체험은 그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영암신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영암의 자서전을 토대로 그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신앙 체험의 사례를 몇가지 살펴 보면, 첫째, 중생의 체험이다. 영암은 1915년 그의 나이 15세에 대구에서 유대인 출신 선교사 피득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집례자가 세례 문답을 한 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기도했을 때, 소년 영암은 심령이 변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마음에 한없는 기쁨이 넘치고, "이제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암의 중생의 체험이었다.
둘째, 그리스도 재림의 환상이다. 영암은 경성성서학원 재학 중 일본에 있는 동양선교회 본부에서 모집한 일본 전도대원으로 선발된다. 일본에서 전도 활동은 하든 영암은 1917년 9월 13일 숙소에서 자던 중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광경의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밤중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별안간 환해지면서 수많은 천사가 나팔을 불고 예수께서는 흰 구름을 타시고 영광스러운 광채의 몸으로 찬사의 호위 하에 강림"하시는 환상이었다. 영암은 이 체험을 계기로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소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재림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재림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으며,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깊이 연구하여, 재림 공부가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의 특징이 되었다.
셋째, 성결의 체험이다. 영암은 재림의 환상을 본 후, 재림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심령이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다음 날 밤 골방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저히 죄를 회개하고 심령이 정결해지는 사죄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넷째, 신유의 체험이다. 전술한바와 같이, 영암은 목포 유달산에서 기도하던 중 성령 세례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영암에게 심신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마음에는 기쁨과 사랑, 능력과 사랑이 샘솟았으며, 혀와 성대까지 성화되고, 여러 가지 질병에서 치유되었다. 그것은 성경 중심적 신앙을 가지게 된 획기적 사건이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역동적 활동, 특히 그의 부흥운동에 지속적 힘을 공급해 준 원천이었다. 그의 심령 속에서 타오르게 된 성령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고 평생 그의 가슴속에 불타 올랐다. 영암을 이 체험을 "성령의 불 세례" 혹은 "성화의 세례"라고 불렀다.
다섯째, 목회 경험이다. 영암은 기도의 능력자요 체험적 신앙의 증인이었다. 영암은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103번에 이르는 기도 응답을 간증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일생을 산 인물이었다. 이런 개인적 신앙 체험과 더불어 그의 목회 경험, 즉 감리 목사로 전국을 순회 목회하거나 담임목사로 개 교회에서 사역하거나 혹은 저명한 부흥사로 교파의 영역을 넘어 활동한 경험이 영암의 신학 형성에 소중한 자원이 되었다.
영암은 그의 [성서적 정통 신학]에서 자연과 성서와 더불어 경험을 신학 자료의 3 요소로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계시의 심원함 때문에 그것을 즉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경험을 통해 점차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경험이 신학의 중대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영암의
신학에 주 자원이 된 것은 성경 말씀과 그의 신앙체험이었다. 영암의 신학은 주로 성경 강해와 설교를 통해 표현되었다. 그것은 어떤 학설이나
이론에 의존하기 보다 성경 말씀 자체와 그가 체험적으로 말씀에 대해 깨달은 것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가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두게 된
것은 유달산 성령 체험이 계기가 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한 것은 재림 환상을 본 것이 동기가 되었다. 그의 신학은 이론적이라기 보다
실천적이며 실용적이었다. 그는 말씀과 체험에 근거하여 목회 현장, 특히 설교에 실제로 적용할 수 실용적 학문을 추구했다. 그의 저서 대부분이
성경 강해서와 설교집들이었다.
3. 종말론적 신학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중요한 신앙전통과 유산 가운데 하나다. 성결교회의 목적은 국내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영혼을 구원하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며 재림의 주를 대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성결교 전통을 이어 받은 영암의 신학 역시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암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 전도 시 재림의 환상을 본 후부터였다. 그는 이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사명과 과제로 생각했다.
영암은 성경에 정통하기를 원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시서인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계시록에 정통하기를 원했다. 그가 계시록 연구를 시작한 것은 일제 말 시골에서 은둔 생활을 할 때였다. 그는 이 기간을 사도 요한의 밧모 섬 생활로 생각하고 계시록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국 전쟁 직후인 1953년 [다니엘서 강의]를, 그리고 1954년에는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근거하여 [말세와 예수의 재림]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교재로 수 십 년간 초 교파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며 소위 "재림준비 촉진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자신 묵시서에 정통하다 자부했으며 재림 공부를 자신의 특기로 간주하기도 했다.
영암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하고, 이를 그의 설교나 부흥회, 저술과 강의를 통해 실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에게 최고의 관심사였으며, 그의 활동의 중심 요소였다. 한숭홍교수가 지적한 것과 같이, 영암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네
기둥으로 하여 그의 신학을 건축했으나 그 중심이 된 것은 재림론이었다. 재림론이 그의 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암의 신학을
종말론적 신학이라 부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4. 보수주의 신학
영암은 어떤 학설이나 사상의 영향을 배격하고 오직 성경 말씀과 원리에 충실하며 성서적 진리 체계를 수호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여겼다. 그는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성경중심적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보수주의 강경노선 위에 서서 한국 교회와 신학계의 한 축을 형성했던 대표적 신학자였다.
영암은 신앙적 선택의 기로 앞에 섰을 때, 항상 보수적 신앙을 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보수적 성향은 청년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일본 동지사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 것도 그의 보수적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영암은 자신을 동지사 대학에 추천해 주겠다고 약속한 조합교회 교역자들이 흡연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자신이 잠시 유혹에 빠졌다고 판단하고 그 길로 경성 성서학원을 찾아갔던 것이다. "회고하니 그 때에 내 신앙은 철저한 보수였던 모양이다."
영암이 보수쪽을 택한 가장 대표적 예는 서울신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예수교 대한 성결교회를 창립하는 일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1950년대 말부터 성결교단이 NCC 가입을 계속 유지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세력과 그것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NAE(한국 복음동지회) 세력으로 양분되어 대립하고, 결국 1960년 총회에서 기성, 예성으로 분열되었다. 영암은 증경 총회장, 원로교수로서 그가 누렸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예성 쪽에 가담했다. 영암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교단 분열의 근본 원인은 교리, 즉 신앙문제였다. 선교사들은 선조들의 순복음적 신앙에서 변질되어 직업적 선교사로 전락되었으며, 교회는 구호물자 문제로 부패하고 교역자는 타락하게 되었으며, 세속화된 NCC노선을 지속하려 했다. 강경 보수주의 노선에 있던 영암은 자유주의와 에큐메니칼 신학을 반대하고 순복음을 보수한다는 명분으로 교단분열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영암은 불의와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진리는 호리라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 이념으로 삼았다. "나는 진리에는 일보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의에는 일언도 타협하지 않는다." 이런 영암의 신념은 정화와 보수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영암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양보하지 않는 소극적 태도에 머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의를 정화하고 진리를 보수하려 했다.
정화를 향한 영암의 열정은 1956년 교단 총회장으로 피선된 후, 그가 발표한 취임사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그는 정화와 부흥을 슬로건으로 하여 "정화가 없으면 부흥이 없고, 부흥이 있으려면 정화가 요구된다"라고 갈파했던 것이다. 영암이 교단 정화를 총회장으로서 자신의 사명과 책무로 간주하게 된 것은 구호물자로 인해 목회자와 교단의 부패와 타락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암이 성결교단 분열의 명분으로 교리 문제를 들면서도, 당시 선교사와 목회자의 도덕적 부패상을 지적한 것은 교단의 정화를 또 다른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암이 1957년 교단 총회의 희년 기념사절로 미국을 방문하여, 7개월 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얻은 수확 중 하나가 한국 교회 보수 신앙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미국 여행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의 실상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이 한국 교회에 미치기 전에 보수 신앙과 신학을 확고히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영암은 성경 진리를 옹호하고 보수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준칙으로 삼았다. 그는 "미신과 이단과 괴신학으로 더불어 싸워서 진리 보수의 방패"가 되고자 했다. 따라서 그가 착수한 것이 1958년 집필을 시작하여 1962년 완성한 [신구약성서대강해]였다. 그것은 보수주의 신앙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 것이었다. 예성 교단의 분립도 보수를 위한 것이었으며, ICCC에 가입한 것도 보수교단과 손을 잡기 위해서였다. 영암은 1962년 보수신학의 본산지인 미국의 헤이스 신학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으면서도 이를 보수신학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 학위장을 한국에서 보수진리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싸워달라는 위임장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영암이 예성교단과 성결대학교를 창립하여 한국 유수의 보수교단과 보수신학교로 성장, 발전시키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암은
성경의 진리를 보수하는 데 고집스러우리 만큼 완고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고집 불통," 또는 "고집장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영암은
이를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의 고집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의 고집을 "거룩한 고집"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를 '고집'이라 부른다. 과연 그렇다... 예수가 고집 때문에 죽었다. 스데반과 폴
리갑이 고집 때문에 순교했다... 나의 고집이 60년간 나를 지켜서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나의 머리에는 불의의 타협과 진리의 양보를 찾을 수 없다.
요약하면, 영암 김응조목사는 항상 보수주의 신앙 노선과 신학방향을 추구했으며, 보수주의는 영암 신학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II. 성서적 정통신학
오늘의 시각에서 영암의 전공 분야를 분류한다면, 그것은 성서신학, 그 중에서도 구약학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학적 관심은 신학의 특정 분야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사, 조직신학과 같은 이론신학과 목회학, 설교학 같은 실천신학도 그의 탐구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중심한 종합 신학을 지향했던 것이다.
영암의 신학은 "순 정품"의 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현대 신학 사조의 영향으로 변질되거나 어떤 군더더기 같은 이론이 첨부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 그대로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암의 순정품의 신학이란 어떤 것인가? 영암이 일체의 타협과 양보를 하지 않고 보수하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성서적 정통신학이었다.
이제
영암의 [성서적 정통신학]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의 실체를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신학의 자료
영암의 [성서적 정통신학]은 그의 조직신학에 해당되는 책이다. 그는 신학서론과 신론에서 시작하여 종말론으로 마치게 되는 조직신학 책의 일반적 순서에 따라 그 책을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성경 중심의 정통신학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서적 정통신학]은 성경을 중심으로 기도와 성령의 감동 아래 쓴 것이라고 영암은 밝히고 있지만, 성경만을 가지고 쓴 책은 아니었다.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여러 견해와 학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서론의 첫 페이지에서 발견되는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 인용이나, 하나님의 존재, 예정, 영감, 속죄 등에 관한 여러 학설이 그 예다. 그러나 때로는 학설을 소개만 하고 있어, 영암 자신의 견해가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신학은 그 주장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어떤 근거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영암은 제1편 서론에서 신학의 가능성, 신학의 자료, 신학의 조건 등을 다루면서 이 문제를 다 각도로 논의했다.
영암은 신학의 자료로 자연, 성경 그리고 경험, 세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신학은 이 자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관해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다. 영암이
자연을 신학의 주요한 자료로 취급한 것은 "자연계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연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에 도달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자료가 필요하며, 그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자연보다 더 훌륭한 자료다. 영암이 신학의 주 자료로 자연과 성경을 지적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신학의 토대와 근거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연은 일반 계시를 가리킨다면, 성경은 특별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영암은 제3의 신학 자료로 인간의 경험을 들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했으나, 인간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을 통해 점차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험이 신학의 중대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영암은 신학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세 가지, 즉 하나님의 존재, 인간의 지력 그리고 계시를 지적했다. 하나님은 신학의 대상이라면, 인간은 신학하는 주체요, 계시는 신학의 근거로 이해된다. 따라서 영암은 신학 연구의 첫 번째 조건으로 지력을 강조했다. 지력이 부족하면,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암은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및 아다나시우스신경을 신학의 전통적 3대 교리로 간주했다. 이는 그가 사도시대부터 이어져내려 오는 전통적 교리를 중시했다는 증거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영암이 강조했던 보수 신앙은 성경 진리에 대한 보수뿐만 아니라 전통적 신앙에 대한 보수를 의미한 것이다.
한숭홍교수는 영암 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관주의가 강하다는 점"이라고 지적하고 영암의 신학을 "주관주의가 강조되는 신학"이라고 규정했다. 심지어 감정의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숭홍의 해석은 영암 신학의 일면, 즉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만을 주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영암이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고,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자료로서 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암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것은 주관적인 인간의 감정이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 말씀 그 자체였다. 영암은 감정적 경험에 치중하여 종교를 "경건한 마음"으로 정의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주장을 주관적 견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영암이
신학의 자료와 요소로서 성경, 경험, 이성을 강조한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주관주의적 견해가 아니라 오히려 웨슬리의 신학 정신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웨슬리는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할 때, 흔히 성경, 전통, 이성 및 경험에 호소했다. 웨슬리 연구가들은 이 네 가지
신학적 지침을 웨슬리안 4 요소 또는 웨슬리안 사변형(the 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부른다. 영암의 신학 방법론 역시
이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성경의 영감
성경은 인간의 저술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성경은 약 1500년 이상에 걸쳐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책들의 수집이다. 이것이 성경이 지닌 인간적 요소다. 또한 성경은 저자들이 영감, 즉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며(딤후3:16),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지닌 신적 이며 초자연적인 요소다.
보수주의자들은 신적 요소를 중시하고 인간적 요소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축자 영감설이나 구술설에 따르면, 하나님이 성경의 내용을 직접 성경 저자들에게 구술하여 받아쓰게 했다. 저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된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의 인간성과 행동은 성경의 구성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적 요소를 중시하고 신적 요소를 경시한다. 직관설에 따르면, 성경을 인간의 종교적인 질문과 경험의 기록 또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질문과 대답으로 간주한다. 성경을 탁월한 종교적 직관을 지닌 사람들의 저작물로 생각한다.
한편, 중도적 견해인 역동적 영감설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것, 역사적인 것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 활동한다. 따라서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기록하거나, 구전 혹은 문서화된 자료를 수집하여 성경을 형성하는 인간적 활동의 전체에 성령께서 함께 활동했다고 믿는 것이다.
영암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류가 전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성경 무오설을 받아들였으나 축자 영감설이나 구술설을 주장하지 않았다. 영암에 따르면, 영감은 성경의 각 문자까지 임한 것이 아니라 영적 사실에 한하여 임한 것이고, 그 이외 역사적, 과학적 사실에 대한 것은 저자의 지식을 토대로 성령의 감화에 의해 기록한 것이다. 그는 양자를 구분하여 전자를 특수 영감, 그리고 후자를 보통 영감이라고 불렀다.
한편, 영암은 역동적 영감설을 성경의 두 요소를 동일하게 인정하는 이론으로 평가하고, 여러 영감설 가운데 가장 공감을 얻는 견해라고 지적함으로써, 자신 역시 그것을 지지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영암의 영감설은 그의 신학이 극단적 보수주의, 즉 근본주의 신학과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구 프린스톤 정통주의로부터 유래된 근본주의 신학은 축자 영감과 전적 무오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영암은 성경의 전적 무오는 수용했으나 축자 영감설과 같은 극단적 견해는 배격하고 온건한 역동적 영감설을 지지했다.
영암의
신학이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또 다른 예는 앞서 언급한 이성과 지성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발견된다. 근본주의는 학문을 불신하고, 합리적 추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신앙을 이성에 반대적인 것, 또는 합리적 분석이나 비판적 평가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신앙에
대한 추론을 거부하는 비교화주의(obscurantism)을 일어나게 했다. 반면, 영암은 오직 성경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성에
적대적이거나 반지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이 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3. 예정론
예정이란 우주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결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그 원인이 되는 것과 결과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즉 인간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결정하신 것인가?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인간의 행동은 그 결과라고 믿는다.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행동이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에 대한 예지의 결과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믿을 사람과 믿지 않을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 예정하신다. 전자는 개인의 운명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영암은 우주 안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예정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행위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렇게 계획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세 전에 예지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영암은 예지 예정론을 성결교 전통적 진리로 간주했다.
영암의
예정론은 칼빈주의의 절대 예정론이 아니라 알미니안의 예지 예정론에 속한다.또한 그것은 "예정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의 계획을 준비한 것"을
말한다는 웨슬리안 성결파의 견해와도 구별된다.
4. 재림론
영암의 설교의 핵심 메시지요,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 요소는 재림론이었다. 그는 [말세와 예수의 재림], [단이엘서 강의] 등을 저술하고 부흥회를 통해 재림촉진 준비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말세와 예수의 재림]은 수 십만 권이 보급되었을 정도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재림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암의 재림론은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철저한 성서적 재림론이다. 전체 구조로 보면 세대주의 종말론과 비슷하나 그 세목으로 들어가면 세대주의 해석과 여러 면에서 구별된다.
첫째, 영암이 성서 예언에 대해 문자적 해석과 미래적 해석을 강조한 것은 세대주의와 동일하다. 세대주의는 성서예언에 철저하게 문자적 해석을 적용하는데 반해, 영암은 문자적 해석과 함께 모형론적 해석 또는 영적 해석을 강조했다.
둘째, 종말론의 구조가 다니엘 9장의 70 이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과 70 이레에 대한 해석에서 세대주의와 영암은 큰 틀을 같이 하고 있다. 69이레 후 70이레가 계속되지 않고, 그 사이에 교회시대 또는 이방인의 시대가 등장했다. 마지막 1이레의 예고는 말세 천년왕국 직전, 대 환란 기간을 통해 성취된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교회를 본래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일부도, 구약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제도도 아닌, 69이레와 70이레 사이에 등장한 막간극(parenthesis)과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반면, 영암은 세대주의 극단적 교회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을 교회의 모형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교회부흥의 모형으로 해석했다.
셋째, 세대 개념을 수용하여 안식시대를 천년왕국 시대로 해석하거나 그리스도의 전 천년기적 재림과 천년왕국의 유대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세대주의와 영암이 동일하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천년왕국을 단지 유대왕국의 회복으로 보고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반해, 영암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고 보았다.
넷째, 휴거론의 구조가 전형적인 전 환란기설, 즉 환난 전 휴거설에 속한다는 면에서는 세대주의와 영암이 동일하다.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은 대 환난 시 지상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영암은 교회의 존재를 인정했다. 즉 영암은 환란 전 휴거를 주장하면서도, 환난통과를 부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휴거를 반대하는 것도, 통과를 부인하는 것도 비 성서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 환난 중 남은 교회와 신자의 존재를 인정했다.
요약하면, 영암의 재림론의 구조는 세대주의 종말론과 거의 비슷하다. 영암은 세대주의 종말론의 주요 요소인 전 천년기적 재림, 이중재림, 비밀 휴거, 유대적 천년왕국 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의 주요 교리를 다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성경 해석과 일치하거나 성서적이라 생각되는 것과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암이 세대주의란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이를 말해준다.
결 론
영암의 신학은 성서적이며 정통적이다. 그의 신학사상은 특정 신학 계통이나 조류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인간의 학설이나 교파의 주의 혹은 주장을 떠나 성경 그대로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따라서 그는 근본주의, 복음주의, 웨슬리안주의와 같은 용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어떤 학설을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적인 것으로 판명될 때만 수용했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보수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영암의 신학을 어떤 특정 신학 이론에로 귀속시키려 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다. 오히려 그의 신학을 성서적 정통신학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영암의 신학은 순수하고 명쾌하다. 복잡한 이론이나 난해한 사변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성경의 진리를 강의와 설교, 저술을 통해 평이한 언어로 대중들에게 전파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대중적이며 실용적이다. 설교를 위한 신학, 교회 봉사를 위한 신학이었다.
영암의 신학은 성경 말씀과 신앙 체험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신학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하며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고 있으나, 지나치게 건조하거나 냉냉하지 않다. 오히려 그 속에 열정과 활력이 있다. 신앙 체험을 통해 여과된 신학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그의 신학은 체험을 강조하면서도 주관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라는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암의 신학은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진리는 양보하지 않는다는 신앙원리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반지성적이거나 극단적 보수 신학은 아니었다. 지성을 존중하는 온건한 보수주의, 열린 보수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 정신의 도전으로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고, 신학의 사변화로 신학과 교회가 유리된지 오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거듭나야 할 시점이다. 영암의 성서적이며 실용적 신학을 재발견하는 것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 될 것이다.
<출처 ; 호주성산신학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