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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수행문답
1. 단순하게 알아차리십시오
2. 남의 허물을 보지 마십시오
3. 생각과 망상
4. 빛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5. 모든 현상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6. ‘앎’을 하십시오
7. 촉은 접촉입니다
2011년 12월 6일
1. 단순하게 알아차리십시오
< 질문 >
세 가지를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1. Noting을 Watching 하기
어제는 주말이라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산행을 하는 동안 알아차림을 끝까지 지속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가는 도중 몸, 느낌, 마음, 법을 카페에서 알려준 대로 시도해 봅니다. 심념처에 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산에는 새소리, 계곡 물소리 또는 고요함 등이 들립니다. 그때 저번에 법사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대상에 가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소리를 느끼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초보이고 선원에 가서 직접 위빠사나를 배운 적이 없기에 "아 이런 것이구나"하고 감만 잡고 있는 수준입니다.
눈, 귀, 코, 혀, 몸으로 느껴지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비교적 쉽게 가능한 것 같습니다. 특히 어제처럼 산행을 하는 경우에는 귀를 통해 방문하는 대상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감각기관인 귀에 와서 부딪치는 소리와 그것을 아는 마음을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었고 소리가 계속되는 한 지속이 가능한 것을 잠깐이지만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6근 중 마지막인 의근에 대해서는 그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즉 의근에 와서 부딪치는 생각과 그 생각을 아는 마음 그리고 그 아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생각과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동시에 알아차려지지가 않았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난 것은 알아차릴 수가 있었으나 그것이 지속되지는 않더군요. 생각과 아는 마음을 동시에 알아차리면 그 대상, 즉 생각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고 있는 의근을 통한 아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watching하는 것이 원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을 통해 아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가능할 것 같은데 의근을 통해 나타나는 생각과 그 생각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요?
2. 숫자를 세는 마음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 "왼발... 오른발..." 하면서 호흡도 같이 보려고 합니다. 호흡을 볼 때는 들숨을 쉴 때는 들숨을 쉬는 것을 아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알아차린 후 들숨이 끝나고 날숨이 시작될 때 들숨을 쉬는 것을 아는 마음이 끝났음을 알고 "무상", 그리고 "위빠사나 도"라고 알아차리는 식으로 수행을 합니다. 날숨 역시 마찬가지 방법입니다.
그런데 발에는 그렇게 잘 되지가 않습니다. 왼발을 들었다 내릴 때 "아는 마음의 사라짐(무상)", "위빠사나 도", 다시 오른발을 들었다 내릴 때 "아는 마음의 사라짐(무상)", 위빠사나 도 이런 식으로 알아차려지지 않습니다.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가면서 들 때 마음이 숫자를 세고 있습니다. 왼발을 들 때 하나, 오른발을 들 때 둘, 다시 왼발에서 셋.. 이런 식으로 어느새 20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호흡에서는 "무상", "위빠사나 도"를 하면서 발에서는 숫자를 세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알아차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호흡과 발에 따라 각각 다르게 해도 되는지요?
3. "감히... "
자주 다니는 길목에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에서는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 집 앞을 지나갈 때 마다 그 개들이 짖고는 합니다.
어제 역시 산행 후 귀가하는 길에 그 집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저 앞에서 눈에 들어올 때부터 개가 짖으면 그 소리에 따라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아차리려고 미리 맘 먹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무심코 지나가는데 개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짖는 바람에 순간 흠칫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가슴에서 그 놀란 느낌이 매우 강하게 남아 있었기에 알아차릴 좋은 대상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가까이 가니 개들이 짖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는 담장 안에서 개소리만 들릴 뿐 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조그마한 개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시골마을의 담장은 벽돌이나 콘크리트가 아니라 돌담이나 탱자나무 같은 것으로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담 너머가 군데군데 보이곤 합니다.
애완견 보다 약간 큰 개인데 눈에 불을 켜고 사납게 달려드니 저도 모르게 순간 "감히 저 쪼그만 게... (인간인) 나에게 대들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더니 그 개를 향해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안해!" 그리고는 저의 마음이 그 개를 제압해야겠다는 의도를 내서 돌멩이라도 집어 저 녀석에게 던져 혼내 줄까 하는 의도가 막 생기더군요.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 집 앞을 지나간 후에도 다시 돌아가서 돌멩이를 던져 완전히 제압해 버릴까 하는 미련이 계속 남아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마음이 차분해 지니 이번에는 제 자신이 매우 괴롭게 느껴집니다. 개 역시 의식이 있는 생명이니 나름의 축적된 성향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이해해 주지 못했고, 저의 마음이 그렇게 성낼 정도의 '자만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여서 그랬는지 계속 속상하고 화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개와의 잠깐 동안의 만남에서 저의 아만심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 확연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마음이 급격히 냉랭해 져서 한편으로는 상처 받고 나중에는 계속 그 사람을 곱씹게 되고 몇 년이 지나도 악의가 일어납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아만심'이 아닌가 합니다. 하루가 지난 아직도 저의 그 성냄 때문에 마음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그 조그마한 개에게서도 성내야 하는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게다가 가족 간에도 그 아만심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많아 괴롭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남에서도 한국명상원 법회가 열리기를 바라면서 초심자 올림.
< 답변 >
1. 수행을 직접 배우지 않고 글이나 법문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글은 완성된 것을 말하는데 수행자는 저마다의 자기 수준이 있기 마련입니다. 수행에 대한 법문도 총론적인 것이라서 개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책이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글은 필요한 사람에게는 약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독입니다. 수행은 자기에게 맞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심념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념처 수행을 해서 집중력이 생겨야 합니다. 있는 몸도 알아차리기 힘든데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신념처 수행을 하지 않고 바로 심념처 수행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도 단계가 있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충실히 해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겼을 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은 같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중에서 더 집중이 요구되는 것이라서 힘이 없을 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힘이 없는데 하려는 것도 욕망입니다. 그러면 바르게 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2. 걸을 때는 발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걸을 때 호흡이 가빠지면 호흡을 알아차릴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동작인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무상이라고 알고 다시 이 무상이 위빠사나의 도라고 아는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단순하게 알아차린 결과로 지혜가 나는 것입니다.
숫자를 세는 것은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수행입니다. 물론 숫자를 세면서 사마타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의 느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숫자를 세지 않습니다. 숫자를 세다보면 잠시 집중은 되겠지만 대상을 성품을 보지 못합니다. 숫자가 필요하다면 숫자를 사용해서 집중을 하십시오. 하지만 언젠가는 대상의 느낌을 보십시오. 숫자를 세야 하는 집중력으로는 아직 무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너무 이론적으로 수행을 하는 것 같아 오히려 염려가 됩니다.
3. 개소리는 사람을 화나게 합니다. 특히 위협적일 경우에는 더욱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개의 입장에서는 소리를 내면서 짖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개의 권리와 사람의 권위가 충돌합니다. 그래서 개소리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범부고, 개소리를 그냥 소리로 듣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개소리 때문에 후회하지 마십시오. 개소리 때문에 화가 났으면 그냥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리고 말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자책하는 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4. 어느 곳에 가서나 직접 수행을 배운 뒤에 상담을 하십시오. 수행을 할 때 이론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수행에 대한 이론을 들었다고 해도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모두 잊어버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단순한 것이면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다보면 차츰 단계적인 지혜가 납니다.
2011년 12월 10일
2. 남의 허물을 보지 마십시오
< 질문 >
강의를 듣다가 강사가 자기 자랑을 하길래 '저 사람 또 저러나'하는 마음이 올라왔다가 갑자기 그 마음이 사라지고 매우 짧은 순간에 너무 짧아서 알 수도 없는 마음이 두 번인가 일어났다 사라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 사람의 이런 마음이 이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조건에 의한 마음이구나'하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제 마음도 결국 제 것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매 순간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것 때문에 요즘 내내 마음에 대한 혐오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몸속에 자기 것이 아닌 물체가 들어와 있는 것만 해도 혐오스러운데.. 자기 정신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기분이 난감하겠습니까..)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답변 >
남의 허물을 보기보다 남의 장점을 보십시오. 남의 허물을 보는 사람은 매사에 비판적인 선입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보는 시선이 편치 않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남의 잘난 체와 맞서는 것은 나의 잘난 체가 부딪친 것입니다.
남이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을 보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대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부터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비판적으로 본 것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조차도 혐오스럽게 느낍니다. 이것은 무상을 보아서 혐오감을 느낀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성향에 대해 못마땅한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출발이 좋아야 끝이 좋습니다. 남의 일을 분석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십시오. 만약 반응했으면 반응한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렇지 못하면 고요함을 얻지 못하고 남에게 환영받지 못하며 신망을 잃습니다.
2011년 12월 10일
3. 생각과 망상
< 질문 >
마음의 작용을 보는 것이 곧 생각의 작용을 보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보겠다고 보면 생각이 곧 끊어지고 맙니다. 어떻게 이어지는 생각을 볼 수가 있는 것인지요?
망상과 생각의 차이점도 궁금합니다. 망상은 무의식적인 사고이고 생각은 의식적인 사고, 이렇게 이해해도 될 런지요? 좌선 중에 떠오르는 생각은 모두 망상입니까? 모두가 망상이라면 생각을 본다는 말은 모순된 말이 될 수밖에 없겠네요.
이 경계가 불분명하여 늘 게운하지가 않습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십시오.
< 답변 >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만 일어납니다. 생각을 했을 때,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생각이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새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마음이 사라지면 다시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생각도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진행되므로 같은 마음이 아니고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있으면 생각이 끊어지고 알아차림이 없으면 부질없는 생각들이 계속됩니다. 이것을 법으로 보면 무상과 무아입니다. 마음이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무상이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무아입니다.
생각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서 의근에 속합니다. 이때의 생각은 마음이 대상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망상은 알아차려야 할 때 알아차리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좌선을 할 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고 다른 계획을 세운다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망상에 속합니다.
2011년 12월 13일
4. 빛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법사님^^
토요일 날 수행에 참가한지 두 번째 되는데요.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눈과 눈 사이에 빛이 보이면서 그 빛으로 제 모든 것이 흡수되는 느낌입니다. 완전이 그 빛으로 빠져 버려서 잠시 시공간을 잊는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데 잘은 모르지만. 그 빛에 빠지면 안락함과 평화로움은 느낄 수 있지만. 말씀하셨던 사마타 수련을 하는 것 같아서 호흡으로 마음을 자꾸 돌리는데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을 집중하는 게 좋은 것인지요? 그 빛에 빠져버리면 무엇을 느낄 수도 알아차려지지 않고. 그냥 확~~빠져버리는 느낌입니다.
또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평화로움을 느끼는데요. 가려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가려움을 계속 지켜보다가 참을 수 없으면 긁어주는데요. 그러면 또 호흡에 집중했던 마음이 다 흩어져 버리는데요.
가려울 때 참는 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긁어주고 다시 호흡에 집중하는 게 좋은 것인지요?
< 답변 >
수행을 할 때 눈을 감으면 누구나 빛이 보입니다. 이때 빛보다는 눈꺼풀이 닿아 있는 느낌을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이 빛을 겨냥하면 빛을 알아차리지만 눈꺼풀이 닿아있는 느낌을 겨냥하면 눈꺼풀의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빛이 나타나면 그냥 빛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빛을 좋아하거나, 또는 빛을 문제로 삼지 마십시오.
좌선을 할 때 눈을 감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수행을 할 때 눈을 감고도 습관적으로 눈으로 보려고 하면 대상의 모양을 보거나 형상을 만들어서 봅니다. 이것은 사마타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법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집중이 되면 처음에 빛이 나타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빛을 천박한 번뇌라고 말합니다. 빛이 좋아서 빛을 집착하면 다음단계의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이라서 초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이 있으면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가려울 때도 피부의 느낌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가려울 때는 먼저 가려운 것으로 인해서 생긴 긁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다음에 가려운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피부가 가려울 때 긁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면 가려움이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긁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가려움은 알아차리면서 참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을 때는 먼저 긁고 싶은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천천히 손을 가져가서 가볍게 긁으면 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이 있으면 긁을 때 성냄과 욕망으로 긁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볍게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가려움이 사라집니다.
가려움이란 강한 대상이 나타났는데 이것을 피해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무엇이나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호흡은 강한 대상이 없을 때 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2011년 12월 19일
5. 모든 현상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 질문 >
안녕하세요. 차가운 날씨에 감기조심하세요. 요즘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아 명상원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일과중 아침에 1시간 일찍 일어나 좌선1시간을 생활화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종숙 선생님과 법사님의 지도로 수행의 참맛을 보고 있습니다. 두 분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요즘 줄 곳 호흡이 짧게 살짝살짝 지속되고 어쩔 땐 호흡이 희미해지기도 하고,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 합니다. 그리고 몸의 느낌도 희미해지고 손이 맞닿은 자리는 허공처럼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좌선은 집중이 잘되어 호흡의 길을 쭉 따라가다 보니 온몸의 느낌이 희미하고, 호흡의 일어남 꺼짐을 좀처럼 느끼지 못했습니다. 약5분정도 지속되었는데 그래도 숨은 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몸 앞에 거울 같은 게 둘러싸인 느낌이었습니다. 당황하고 놀라지는 않았고 모든 게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른 지도 부탁드립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 답변 >
호흡을 알아차려서 집중이 되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므로 몸이 부드러워지면서 호흡도 희미해집니다. 이때는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한 노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손이나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까지 계속해서 수행을 하십시오. 이렇게 수행을 해서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지면 다음 단계로 ‘아는 마음’을 지켜봐야 합니다. 만약 이런 상태가 오면 다시 질문을 하십시오.
수행을 할 때 ‘호흡의 길을 쭉 따라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요?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좋으나, 코로 들이쉰 호흡을 배까지 내려가면서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호흡은 어느 곳이 되었거나 한 곳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론 위치는 바꿀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몸 앞에 거울 같은 것이 둘러싸인 느낌이 있으면 단지 그 느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런 현상은 수행 중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떤 현상이 되었거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이런 현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이런 현상을 기대하면 수행이 퇴보합니다.
2011년 12월 26일
6. ‘앎’을 하십시오
< 질문 >
안녕하세요. 묘원님 항상 감사합니다.
저는 주로 108배를 매일합니다. 3년 정도 동작 하나하나를 알아차리면서 했습니다. 좌선을 해보니 호흡이 사라지고 없어요. 또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릴 대상이 없으니 그다음 단계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 답변 >
일반적으로 호흡이 사라졌다고 할 때는 집중이 되어서 몸이 부드럽고 가벼워져서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미세한 호흡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세한 호흡도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몸에 있는 다른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몸의 느낌을 느낄 때는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 등등의 느낌을 느끼거나, 아니면 가슴에 있는 느낌이나 맥박을 대상으로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몸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이나 호흡이 사라지면 다음 단계로 ‘앎’을 해야 합니다. ‘앎’은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것이 없을 때는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앎’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았으면 ‘앎’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때 잘못하면 장애가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지도를 받고 수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들이 이 상태까지 가기도 어렵지만 이 상태에서 바르게 수행을 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한국명상원 게시판의 묻고 답하기의 위쪽 공지 란에 있는 ‘아는 마음을 아는 것에 대하여’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또 도서출판 행복한 숲에서 발행한 ‘보니 거기 세상이 있다’를 읽어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직접 오셔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면담을 받는 것입니다.
2011년 12월 31일
7. 촉은 접촉입니다
< 질문 >
안녕 하십니까?
"촉"이 어떤 것입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
< 답변 >
촉(觸)은 접촉(接觸)의 준말입니다. 접촉을 부딪침이라고도 합니다.
12연기에서 보면 정신과 물질[名色]을 원인으로 육입(六入)이 일어나고,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接觸)이 일어나고,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육입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감각기관입니다. 접촉은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감각대상을 말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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