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차 사념처수행 : 7강 육문, 육경, 육식에 대한 이해
1. 우리의 현실은 몸에 달린 육문과 외부의 육경, 이 둘을 조건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육식이 일어난다. 우리는 밖을 향해서 육문을 열어놓고 밖에 있는 육경을 안으로 들여와 마음이 경험한다. 그러면 이어서 생각으로 말로 몸으로 행동을 한다. 여기서 육문은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기관이고, 육경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감각대상이다. 붓다는 육문과 육경을 일체(一切)라고 설하신다.
일체 경 (S35:23) :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제4권 111-112쪽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일체[諸, sabba]에 대해서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몸과 감촉, 마노[意]와 [마노의 대상인] 법 -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4.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존재는 매순간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조건으로 새로운 오온을 만든다. 이러한 오온을 세간에서는 ‘나(atta)’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나’라고 부르는 이 몸[有身], 오온은 조건에 의해 연기된 법이다. 다시 말하면 ‘오온은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과 물질[色]의 결합이다.
2. 산다는 것은 매순간 여섯 감각기관과 여섯 감각대상의 부딪힘을 조건으로 알음알이[識]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세 가지 근·경·식이 화합하는 감각접촉이 일어난다. 이때 좋고, 싫고, 덤덤한 느낌이 일어나고, 이어서 느낌에 대한 갈애가 일어난다. 이 갈애가 이 몸[有身]을 만들어 내는 자양분을 취하게 하여 새로운 오온이 생긴다. 그래서 6근→6경→6식→6촉→6수→6애로 진행되는 6·6의 연기는 육내입처로 부터 연기되는 갈애를 설하고 있다. 이어서 ‘나’라고 부르는 이 몸[有身]의 일어남과 소멸을 설한다. 육육에서 연기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중생들이 욕계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마왕 빠삐만이 쳐놓은 덫이다.
마라의 덫 경1 (S35:114)각묵스님옮김 『상윳따니까야』 제4권 251-252쪽
3. “비구들이여, 눈(~마노)으로 인식되는 형색(~법)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 이를 일러 비구는 마라의 소굴로 들어갔다, 마라의 지배를 받는다, 마라의 덫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마라의 속박에 묶여버려 마라 삐삐만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4. “비구들이여, 눈(~마노)으로 인식되는 형색(~법)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것들이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으면 이를 일러 비구는 마라의 소굴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라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마라의 덫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라의 속박에서 풀려나 마라 삐삐만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게 된다.
3. 마음은 매순간 대상을 경험한다. 수행자가 지금 경험하는 대상을 조건에 의해 일어난 법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대상을 자기입장에서 받아들이고 그때 일어난 감정이나 생각이 시키는 대로 행위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오온을 연기시키는 신구의 삼행이다. 이는 사견(邪見)으로 시작하는 팔사도의 길을 가는 것이며 여기서 쌓이는 것은 탐진치다. 하지만 지금 마음이 경험하는 대상을 법으로 알아차리면 지금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과 대상에 반응하려는 의도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때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바른 말과 바른 행동을 한다. 이는 정견으로 시작하는 팔정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때는 탐진치 대신 계정혜가 쌓이고, 이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원인을 만든다.
중생이 살아가는 무대는 육근·육경·육식이 부딪치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六觸入處]다. 우리는 이 육촉입처(六觸入處)에서 즉시 지옥이나 천상을 경험한다. 또한 육촉입처는 사견으로 시작하는 팔사도나 정견으로 시작하는 팔정도를 선택할 수 있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기회 경(S35:135) [각묵스님옮김 『상윳따니까야』 제4권 306-307쪽]
3.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청정범행을 닦을 기회를 얻은 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이익이다. 이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큰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라는 지옥을 본적이 있다. 거기서 눈(~마노)으로 어떤 형색(~법)을 보든지 간에 그들은 원하지 않는 형색(~법)만을 보고 원하는 형색(~법)은 보지 못한다. 좋지 않은 형색(~법)만을 보고 좋은 형색(~법)은 보지 못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법)만을 보고 마음에 드는 형색(~법)은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청정범행을 닦을 기회를 얻은 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이익이다. 이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큰 이익이다.”
4.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청정범행을 닦을 기회를 얻은 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이익이다. 이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큰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라는 천상을 본적이 있다. 거기서 눈(~마노)으로 어떤 형색(~법)을 보든지 간에 그들은 원하는 형색(~법)만을 보고 원하지 않는 형색(~법)은 보지 못한다. 좋은 형색(~법)만을 보고 좋지 않은 형색(~법)은 보지 못한다. 마음에 드는 형색(~법)만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색(~법)은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청정범행을 닦을 기회를 얻은 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이익이다. 이것은 참으로 그대들에게 큰 이익이다.”
4.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대상만을 인식하고 사라진다. 어떤 마음도 두 순간을 머물지 못하고, 또한 두 가지 대상을 동시에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매 찰나 색·수·상·행·식이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사라진다. 6근·6경·6식으로 진행되는 6·6의 연기도 모두 찰나생멸하며 흐른다. 이러한 정신과 물질의 흐름에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 즉 ‘나’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자아’ 또는 ‘나’라고 부르는 인습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정신과 물질이 생멸하며 흐르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그 흐름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그 안에 나,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없음을 통찰하는 수행이다. 이런 통찰은 그동안 이 몸을 ‘나’로 집착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킨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5. 수행자는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사념처 수행을 한다. 지금 마음이 경험하는 대상을 법으로 맞이하여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이어서 그 법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한다. 여기서 이 몸과 마음, 오온은 본래의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연기된 법이라고 안다. 그러면 오온의 무상과 괴로움과 실체 없음을 꿰뚫어 안다. 이렇게 생긴 통찰지혜는 ‘나’리고 하는 유신견을 깨고, 오온에 대한 집착을 소멸한다. 다시 말하면 사념처 수행은 오온에 대한 바른 견해를 얻어서 오온에 대한 집착을 소멸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게 하는 수행이다.
첫댓글 이 법보시의 공덕으로 도과를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