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0. 15 (토)
원래 계획을 바꿔 오늘 지누단다까지 가기로 했다. 촘롱까지는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그곳에서 밀린 빨래도 하고 느긋하게 쉬고 싶었다. 다음날 란드룩까지 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 문제는 란드룩에서 포카라까지 가는 일이다. 그것도 사실 보통의 트레커라면 조금만 부지런히 운행하면 안될 것도 없다.
그러나 트레킹 막바지에 접어든, 달밧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노친네'들에게는 무리이다. 촘롱에서 쉬려고 한 까닭은 여유 있는 휴식과 전망을 즐기기 위함이지만 여유 있는 휴식 후 바쁜 이틀을 보내야 한다. 시간을 쪼개면 조금 덜 바빠도 된다. 그리고 전망은 이미 베이스캠프의 장엄한 풍광을 만끽한 뒤라 조금 시들해졌다.
8시 25분 뱀부 출발, 10시 5분 시누와 도착하여 휴식. 시누와에서 30분 거리의 바누와를 지날 때 시계를 보니 11시 10분이었다. 오늘의 난코스 촘롱이 빤히 보이는 곳이다. 배가 고팠지만 촘롱에서 먹기로 했다. 기왕이면 전망 좋은 곳에서 먹는 것이 좋고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오르는 것이 좋다.
촘롱 계단을 한 번 오른 경험이 있는 나는 숨을 크게 쉬었다. 동포들에게는 힘들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삼툭에게 촘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롯지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니 그곳에서 포터들도 멈추라고 지시해 두었다.
바누와에서 촘롱콜라 다리까지는 지그재그 흙길 내리막으로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려움은 이제부터다.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오르막 계단. 도대체 몇 계단이나 되는지 세면서 갔다. 대충 계단처럼 보이는 것을 모두 쳐서 세어보니 엘설런트뷰 롯지까지 2300 계단이고 1시간 10분 걸렸다.
다리의 고도는 1965m, 롯지의 고도는 2325m이니 불과 360m의 고도차에 불과한데 힘든 것은 계단의 단조로움 때문이다. 배도 고픈 탓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오르막은 이런 계단이 힘들다. 차라리 고도차가 410m나 나고 4천미터급 고산인 MBC에서 ABC가 덜 힘들 게 느껴진다. 그곳은 오솔길 같은 산길이고 좋은 풍광이 있기 때문이다.
촘롱 다리에서 베이스캠프 쪽으로 오르는 길은 같은 고도를 오르지만 지그재그식 흙길이라 피곤함이 덜하다. 단조로움 만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없다. 더구나 계단 옆으로 민가와 롯지를 스쳐 지나가게 되니 다 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끝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엑설런트뷰에는 12시 50분 도착. 모두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툭 터인 전망을 바라보니 기분은 상쾌했다.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영국 노장팀은 오늘 촘롱이 종착지인 모양이다. 아래 롯지에 여장을 풀고 부지런히 빨래를 한다. 시간을 충분히 가져 온 60대 노장님들에게는 트레커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롯지에는 독일 단체팀들이 일찍 도착해 마당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빨래를 해 널어둔 것을 보니 이들도 오늘 여기서 묵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BC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쌈을 먹었다. 점심으로 가져온 달밧에 생야채가 보여 삼툭에게 혹시 생배추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니 사우지가 한 접시 밭에서 뽑아 왔다. 혹시 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맛이 훌륭했다. 고추장과 함께 싸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이다. 달밧 먹는데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나도 감격할 정도니 달밧에 질려가는 동포들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느긋하게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오후 2시 30분 출발. 지누단다까지는 내리막길 1시간이니 여유가 있다. 그런데 이 내리막길이 엄청 가파른 급경사이다. 그나마 돌계단길이 아닌 지그재그 산길이라 다행이다. 예전에 지누에서 촘롱 올라올 때가 생각났다. 그 때 까마득하게 보이는 꼭대기를 2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올랐다.
중간 산기슭에 메밀꽃이 한창이다. 지누에서 올라오는 트레커들이 제법 있다. 60대 서양 할머니들도 여럿 있었다. 간드룩에서 계곡을 건너 촘롱으로 오는 것이나 지누에서 촘롱으로 오르는 것이나 힘들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지누단다 쪽으로 오자면 1200m의 아래 계곡에서 1850m의 지누단다까지 계속 오르막을 치고 올라야 하기 때문에 피로가 가중된다.
3시 30분 지누단다 도착. 지누단다에는 롯지가 많다. 제일 먼저 생겼고 규모가 큰 롯지는 제일 아래에 위치한 <나마스테> 롯지이다. 티베탄이 운영하는 이 롯지는 트레커들이 제일 많이 찾는 롯지여서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주방 앞에는 기념품도 팔고 있다.
이집에 두 번째 투숙을 했다. 내가 선두에 서지 않으니 앞에 간 K씨가 이곳에 짐을 풀어 버렸다. 지난 번 왔을 때 번잡한 것이 싫어 다음에는 윗집 옥상이 있는 롯지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짐을 풀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묵게 되었다.
그러나 겉 모양과는 달리 이층 방 중 몇 군데는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아 영 불편했다. 모두 안들어왔다면 이해할 만하다. 다른 곳은 주렁주렁 달린 장식용 꼬마전구에도 불이 들어올 정도로 전력이 남아도는데 작은 형광등불이 안들어 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샤워 후 온천을 다녀오기로 했다. 샤워까지 마쳤으니 굳이 온천을 찾을 필요는 없었으나 자료수집 차원에서 가보기로 했다. 15분 내려간다고 표지판에 쓰여 있다. 나는 17분 걸렸다. 가벼운 차림으로 가려다 문득 여기가 히말라야 산자락임을 상기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15분을 내려간다면 상당한 거리일 것이다.
어제 뱀부에서부터 시끄럽게 떠들든 홍콩 아이들도 우리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다. 이 친구들은 목에 수건을 두르고 슬리퍼 차림으로 내려갔다. 나는 옷차림만 가볍게 했을 뿐 등산화에 스틱까지 모두 갖추고 내려갔다. 과연 내 예측이 맞아 일반 트레킹 내리막길과 다르지 않은 길이다. 계곡 옆 온천탕에서 고도계를 보니 지누단다보다 150m나 낮은 1700m였다.
탕은 세 개가 있고 제대로 모양을 내어 만들어 놓았다. 예전 정보에는 '그저 발만 담그는 수준'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온천수는 산 옆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파이프로 연결해서 공급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탈의실은 없다. 입구 쪽의 여탕은 일본인 여성 한 사람만 있고 아래쪽 두 개의 남탕은 서양 청년들과 일본인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가이드, 포터들이 있었다.
사진을 찍고 나도 탕 속에 들어갔다. 정보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영복을 가지고 갔지만 이런 히말라야에서는 굳이 그런 번거로운 격식이 필요하지 않았다(여자의 경우는 조금 다를 것이다). 모두들 그냥 입고 있던 속옷 차림으로 들어갔다. 나도 입고 있던 회색 쿨맥스 속옷차림으로 들어 갔다. 물론 들어가기 전 따로 파이프에서 나오는 물에 몸을 씻었다. 끊임없이 흘러 넘치는 물이라 물은 늘 깨끗하다.
탕의 온도는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온도였다. 몇 도나 될까? 궁금해서 차고 간 고도계를 온도모드로 맞추고 '살신성인'의 기분으로 물에 잠수시켰다. 30m 방수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고장이 날 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5분 정도 지나 온도를 보니 37도였다. 그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다.
시간이 늦어 오래 있지 못하고 20분 정도 온천을 즐겼다. 1시간 정도 몸을 담그면 피로가 많이 풀릴 것 같다. 불편한 점은 목욕 후 젖은 옷을 갈아입을 탈의실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인 여성은 큰 타올을 가지고 와 몸을 감싸고 옷을 갈아 입는다. 남자들은 대충 바위 근처에서 갈아 입었다.
올라오는데 25분 걸렸다. 다시 땀이 났지만 천천히 올라온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홍콩 아이들은 내려오다가 슬리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다.
지누의 이 온천은 따또빠니 온천처럼 뜨겁지도 않고(따또빠니는 물이 너무 뜨거워 찬물을 섞는다) 접근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는 불편함이 있지만(따또빠니는 롯지촌 바로 아래에 있어 5분도 걸리지 않는다) 트레킹의 피로를 풀기엔 그만이다. 이곳에 묵는 사람은 꼭 온천욕을 해보길 권한다.
저녁은 다시 상추쌈. 배추가 아닌 오리지널 상추가 이곳에 있었다. 한접시에 120루삐나 했지만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낮에 고추장이 바닥나 나만의 특별비법인 핫소스를 만들었다. 칠리 소스에 케첩을 섞으면 매콤달콤한 초고추장 맛이 나는 소스가 된다. 아쉬운대로 그것으로 쌈을 싸 먹으니 먹을 만했다. 다음부터는 고추장을 좀 넉넉하게 챙겨와야겠다.
전기불도 없어 일찍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까 오후부터 유별나게 까불던 커플(서양인 남자와 동양인 여자)이 옆방에 들어오는 기척이 있다. 롯지의 방은 대부분 베니어판으로 되어 있어 옆 집 말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 불행히도 그 방은 B스님 침대 쪽 칸막이와 연결된 방이다. 이 친구들, 불도 안오니 일찍 자면 좋으련만 계속 히히낙락하며 떠든다.
매너가 없는 사람들이다. 롯지에서는 옆 방에 사람이 있으면 목소리를 낮추어야 한다. 보아하니 입성도 트레킹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냥 놀러 온 모습이다. 한 터프 하는 B스님이 참다못해 칸막이를 쾅쾅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식들아, 잠 좀 자자! 이것들이 밤 늦게까지 x랄하고 야단이야!!!"
갑자기 지누단다 전체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자리가 조금 예민한 편인 나는 그날 밤 B스님 덕분에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