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의 철학
정 성 천
작년에 있었던 한 지인의 이야기다. 감기 때문인지 기침이 심해 내과병원에 가니 의사가 엑스레이 폐사진을 한번 찍어 보자고 하여 별생각 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폐 깊숙한 지점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니 빨리 대형 종합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한번 받아 보라고 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점점 좋지 않은 생각에 불안과 두려움이 온몸을 엄습해 온다.
더군다나 서울 종합병원에 진료 신청을 한 결과 의료사태 때문인지 진료가 밀려 6개월을 기다려야만 전문 의사 진료가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른 종합병원에 다시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가장 빠른 것이 3개월 정도는 기다려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기침은 다 나아 사라졌으나 온갖 상상에 상상을 덧칠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고 밥맛까지 떨어져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끝내는 몸살기까지 겹쳐 끙끙 앓아눕기까지 했다고 한다.
지옥 같은 3개월을 보낸 후 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 별 이상한 점이 아니고 어렸을 때 생길 수도 있는 상처 흉터와 같은 것으로 판명되어 지인의 폐는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동안 시달렸던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한 불면과 영양결핍 등의 후유증을 아직도 겪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인간 마음의 존재는 여리고 약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본다.
어느 해부 전문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90세를 넘기고 죽은 노인들의 몸을 해부해보면 적어도 30년 전쯤 발병했음 직한 암 덩어리들이 수시로 장기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30년 전에 암을 일찍 발견하고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받았더라면 그 노인은 90세를 넘기고까지 과연 살 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더 오래 살았을까? 아니면 더 일찍 돌아가셨을까?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알 수 없다. 세상의 일은 이렇게 알 수 없는 것이 기본이다.
요즈음 서양 기독교 문화의 나라 젊은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agnostics)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사람을 나눌 때 유신론자(有神論者:theist)와 무신론자(無神論者:atheist)로 양분하여 부르던 것을 지금은 불가지론자를 첨가하여 세 가지 유형 중 하나로 부른다고 한다.
불가지론자는 1869년 진화론의 신봉자 중의 한 사람인 ‘토마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가 처음 사용한 말로서 ‘신, 신성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유무를 인간은 알 수 없고 또 알 필요가 없다는 견해나 믿음’을 신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불가지론에서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모르니 있는 것(유신론적 불가지론) 아니면 없는 것(무신론적 불가지론)으로 치자”가 아니라, “신은 있는지 없는지 현재로선 (혹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다.”라는 부정과 인정 그 사이에 중립적 입장을 가지며,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분별을 보류 혹은 불가함으로 여긴다. 즉 이는 결론이 확실한 유신론과 무신론을 전부 부정하는 논리다.
인간 생명이 생겨나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러 인간의 의식이 갖추어지는 동안 자연선택이라는 기재는 인간 마음에 모름은 불안 공포와 불편함을 앎에는 평안과 즐거움을 심어 놓았다. 그래서 모든 걸 알아야만, 모든 걸 밝혀내야만 편안해져서 직성이 풀리는 본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해와 달 그리고 자연 만물, 인간 자신의 생성과 운행의 진실을 알아야 하는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 알 수 없음, 즉 그 모름이 두고두고 인간에게는 불편하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만들고 그 불편함을 해결했는데 그 모름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불가지론자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불가지론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인간 이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정당화할 충분한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알거나 믿는다고 공언할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을 개인 자신이 안다거나 믿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주장에는 살펴볼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들은 초점을 신의 존재 유 무에 맞추고 있다. 하지만 불가지론자들은 그 초점을 인간의 행복에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선택으로 야기된 앎의 본능은 인간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나 인간의 행복에는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는다. 라고 본다. 신의 존재 유 무를 따지는 것이 인간 행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그저 모름에 머무는 것이 인간 행복을 위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불교를 잘 모른다. 하지만 불교에 관한 일천한 나의 지식으로 가늠해보니 부처님이 주장하신 중도가 바로 이 불가지론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며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이지 다른 종교처럼 전지전능하신 신이 아니다. 부처님은 해와 달 하늘의 운행과 인간의 미래를 주재하는 것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인간의 현재 고통과 그 고통의 소멸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간파하신 인간 고통의 씨앗은 바로 그 앎, 즉 분별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분별하여 알지 않은, 즉 모르는 마음인 순수의식을 찾는 것이 깨달음이고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모른다는 것은 ‘분별(앎)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의식’이다. 이 ‘모르는 마음’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그 근원이자 원점이라는 분별 이전의 자리 즉 숭산 스님이 주창한 ‘오직 모를 뿐’에 익숙해지는 자리가 바로 깨달음이 아닐까?
작년 지인의 해프닝도 그 점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 않겠는가? 이렇게 강한 자극들이 외부로부터 수시로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이다. 아직 결과는 모를 뿐인데 생각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해서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모름’에 좀 더 익숙한 마음 근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지인은 지옥 같았던 3개월도 그 후유증도 좀 더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을까?
지리산 정상에서 발원한 물은 불일폭포로 내려꽂히고 급류로 바위와 부딪쳐 흰 물거품을 만들며 흘러 쌍계사계곡을 소용돌이치며 지나고 화개 장터에서 섬진강 본류의 흐름에 들게 된다. 그리고 광양만으로 조용히 흘러 바다에 들게 되는데 물은 바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활발한 운동량이 적어지고 잔잔한 고요를 간직하며 끝내는 바다와 합일이 된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젊었을 때는 앎이라는 의식의 운동량이 폭포처럼 내려꽂히기도 하고 급류처럼 부딪치며 활발히 소용돌이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칠십이 넘으면 잔잔한 모름에 익숙해져 인생의 본류라는 어떤 삶의 흐름에 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 그 흐름에 내맡기고 유유자적(悠悠自適)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알 수 없어요.”
참말로, 노을 하나 징하게 붉어 버렸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