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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모든 바같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나타낸다.
오대산 적멸보궁(지방 유형문화재 제28호)은 신라시대 때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가운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교의 성지이다.
중대사자암에서 비로봉을 향해 20분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적멸보궁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적멸보궁이 자리한 곳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용의 정수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곳을 방문하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감탄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아래쪽으로 두 개의 샘이 있어 이를 용의 눈,
즉 용안수(龍眼水)라 부른다.
▲ 장마비가 내리는 날씨에 자욱한 안개를 배경으로 치악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우리 고찰순레단이 탑승하고 있는 버스.
제14차 고찰순례를 아침 6시 10분경 낙동초등학교를 출발하여, 차내에서 불교방송국의 새벽예불
DVD에 따라 예불후, 항상 수고하시는 정일헌 거사님의 알찬 사찰안내 인쇄물과, 언제나 처럼
정연일 거사님의 '법공양' 책을 배부하고, 주먹밥과 김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였는데, 이번에는
식당에서 주로 사용하는 부직포로된 1회용 물수건을 제공하여 주먹밥을 먹고 난 후 김 묻은 손을
닦을 수 있어 한결 편리했다.
7시 40분경 동명휴게소에서 휴식후 출발하자 말자 단원들에게 순례할 사찰에 대한 사전정보를
제공하여 사찰순례시 보다 나은 순례가 될 수 있도록 이미 사찰안내 인쇄물은 배부하였지만,
'월정사', '상원사', '사자암과 중대 적멸보궁', '보현사'에 관한 각종 정보가 수록된 불교방송국
에서 제작한 '부처님나라 오대성산'과 '한국의 명찰 강릉 보현사 법왕사'DVD를 약 2시간에
걸쳐 시청하였다.
치악휴게소에서 탑승후 2009년 통도사 화엄산림대법회 DVD를 지난번에 이어 순서에 따라 전
중앙승가대 총장이신 종범스님의 법문(화엄경 현담)을 시청하고, 청주불교수련원장이신
재문스님의 법문(화엄경 세주묘엄품)과 통도사 부주지 현근스님의 법문(화엄경 세주묘엄품)
DVD는 순례를 마치고 '초당할머니순두부'에서 저녁공양후 강릉을 벗어나서 시청하였다.
▲ 11시 넘어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적멸보궁에 도착하니 12시가 되었다.
적멸보궁 주위를 둘러싼 안개는 부처님의 진신과 일만 문수보살을 외호하기 위함인듯
신비하고 장엄하기 까지 하였다.
▲ 적멸보궁뒤 석가의 진신을 모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5층탑을 양각으로 새겨 넣은
84센티미터 높이의 마애불탑.
▲현재 조계종 포교사이며 관음사에서 '정토삼부경"을 공부하는 '삼장반' 총무이자 우리 순례
단원인 수행심 보살님의 집전으로 여래지 보살님의 차공양과 다게, 석가모니불 정근, 반야심경 순으로 12시 5분부터 25분 까지 20여분간 적멸보궁 법당내에서 예불을 올렸다.
모두들 적멸보궁이라 그런지 환희심이 넘쳐보였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단층 팔작지붕의 겹처마 집으로 지방유형문화재 28호로
지정돼 있다. 지붕은 청기와를 덮었고 용마루와 합각마루에 용두를 올려놓았다. 공포의 모양
형태에서 이 건물이 조선후기에 재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적멸보궁에서 예불후 사자암으로 내려갔다.
적멸보궁의 수호암자인 중대 사자암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하여 일만의 문수보살이
계시는 곳이다.
조선 태종 1400년 11월 중창되었으며 이후 왕실의 내원당(內願堂)으로 명종 대(代)에 승영(僧營)
사찰로 보호되기 시작하였고 1644년부터 1646년 사이에 중수되었다.
이후에는 왕실보호로 사세(寺勢)를 유지하고 건물을 보수해 나갔으며, 1878(고종15)년 개건되어
요사채로 사용되던 향각(香閣)이 낡아 1999년 퇴우 정념스님이 제불. 보살님께 발원하고 오대(五臺)
상징의 5층으로 향각을 신축하여 2006년 8월에 완공되고 건축불사가 마무리되었다.
▲ 중대 사자암의 법당인 비로전(毘盧殿)은 화엄경의 주불(主佛)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좌우 협시보살로 조성되어 있으며, 세계 최초로 조성된 양각으로
새긴 極樂寶樹 삼존불상 후불탱화는 장엄하기가 그지없다.
▲ 염원하는 모습이 청아하고 단아합니다. 우리 순례단원중 유일한 Miss이자 police입니다.
부디 문수보살님의 가피를 받아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비로전 내 벽체 사방 8면에 각각 다섯 사자좌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상계(上界)에 500문수보살상과 하계(下界)에 500문수동자상 세계가 펼쳐져 있다.
▲ 오대(五臺)를 상징하는 5층 향각
적멸보궁에서 사자암에 도착하니 12시 50분경 이였다. 우리 일행 때문에 공양간 보살님들이
공양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점심공양의 최고 인기는 암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곰취쌈이었다. 깊은 산속 곰이 먹는다 하여 곰취로 불린다는데, 더구나 오대산 청정처에서
용안수(龍眼水)와 이슬만 먹고 자란 곰취인데다, 일만 문수보살도 공양하셨을 곰취이니........,
곰취 리필 주문이 공양이 끝날때 까지 계속되었다.
점심공양이 끝나고 상원사로 향했다.
위 출처 ; 상원사 홈페이지(http://woljeongsa.org/sang_index.php)
▲ 문수전 안에 봉안된 세조때 조성한 목조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과 문수보살상
영락이 달린 목걸이와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阿彌陀九品印을 하고 있는 목조 문수동자상은
세조가 친견한 문수보살(문수동자)을 조각한 목각상이다.
▲ 문수전은 1947년 월정사 주지 지암 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의 건물을 본떠 지었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선원은 정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육이오 전쟁때 군인들이 법당을 불태우려 하자 한암스님께서 목숨을 걸고 지켜낸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다음은 문수전의 주련을 살펴본다
萬事不如退步休 만사불여퇴보휴
이 세상에 온갖 일 물러나서 쉬느니만 못하니
百年浮幻夢中漚 백년부환몽중구
백 년의 인생이 구름 같고 환상 같고 꿈속의 물거품 같도다
趙州不是爭胡餠 조주불시쟁호병
조주스님이 호떡을 아까워하신 것이 아니라
要使時人劣處求 요사시인열처구
사람들이 쉬운 곳에서 깨닫게 하신 것이로다
浦團兀兀欲何爲 포단올올욕하위
방석 위에 우뚝이 앉아 무엇 하려 하는가
更問深山老古錐 갱문심산노고추
깊은 산속 선지식에게 다시 물어보라
空山雨雪無人境 공산우설무인경
아무도 없는 산에 비 오고 눈 오는데
驀地相逢是自家 맥지상봉시자가
문득 만난 것이 바로 자기자신이로다
摘何爲妄摘何眞 적하위망적하진
무엇을 거짓이라 하고 무엇을 참이라 할까
眞妄由來總不眞 진망유래총부진
참과 거짓 모두 본래 참 아니로다
霞飛葉下秋容潔 하비엽하추용결
안개 걷히고 나뭇잎 떨어져 가을 모양 깨끗하니
依舊靑山對面眞 의구청산대면진
눈앞에 여전한 푸른 산이 그대로 참이로다
祖印恒作七佛師 조인항작칠불사
조사의 심인으로 칠불의 스승 되시더니
大智亦爲菩薩首 대지역위보살수
큰 지혜 또한 보살 중에 으뜸이시도다
刹刹現身示無身 찰찰현신시무신
온 세상에 나타나시되 몸 없는 몸을 보여
普令衆生超三有 보령중생초삼유
중생들이 삼계를 벗어나게 하시도다
▲ 사진 오른쪽 아래에 고양이 석상이 보인다.
세조가 상원사를 찾아 법당으로 들어서려 할 때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는데 알고 보니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들어 있었다 한다.
고양이로 인해 목숨을 건진 세조는 사찰에 전답을 내려 치하하였는데 그 전답은 묘답(猫畓; 고양이 논), 묘전(猫田; 고양이 밭)이라 불렸다.
▲국보 제36호인 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꽃집[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봉오리[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일본이나 중국 종에는 없는 음통때문에 '코리안벨'이라는 별도 의 학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신라종은 용뉴에 용이 한마리고 중국과 조선시대 종은 쌍용이라고 합니다.
<아래는 옮겨온 글>
상원사종의 종복鍾腹에는 대칭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두 명의 비천상이 공후와 생황을 연주하는
게 보인다. 비단 옷깃을 날리면서 구름을 타고 있는 비천은 금방이라도 날아 가버릴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잘 보니 공후를 타는 비천은 분명 백수광부의 아내인 것이다.
미쳐버린 남편을 쫓아가 공후를 뜯으며 부르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내의 슬픔이 하늘을 향해 오르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승화되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남편을 부르는 여인의 노래가 청승맞기는커녕 듣는 이의 애까지도 끊어놓을 정도인 것이다.
公無渡河(공무도하) 님이여 저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下(공경도하) 그러나 님은 저 물을 건너고 마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죽고 말다니
當奈公何(당내공하) 어찌할거나 아 어찌할거나
[출처] 노래가 들리는 신라의 범종|작성자 지중해
▲관대걸이 / 상원사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옆에 서 있는 관대걸이는
조선 세조 대왕이 이곳에 의복을 벗어 걸고 목욕하여 병이 나은 곳이다.
세조가 목욕을 하려고 의관을 벗어 이곳에 걸었다고 하여 갓걸이 또는 관대걸이라 부른다
상원사 순례를 마치면서 전소될 위기를 법력으로 맊아낸 한암스님을 기려 본다.
시봉하던 제자마저 일부러 심부름을 보내고 홀로 자리에 앉은채 좌탈입망(坐脫立亡)하신 스님,
마침 절에 들른 국군8사단 정훈장교인 김현기대위가 그 열반 직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그의
마지막 모습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김현기대위의 육사동기이며 인접 사단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소설가, 선우휘는 한암스님의 상원사 이야기를 전해 듣고, 1969년 1월의 《월간 중앙》
에 <상원사>라는 단편소설을 기고했다.
* 한암스님 - 아름다운 좌탈입망상
벽에 쳐져있는 담요는 군인들이 문짝을 태워서 문에 담요를 두른 것.
한암스님(1876~1951)
1925년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 조선총독부에서 협조를 요청하자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익히지 않겠노라"
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에 은둔, 입적하실 때까지 27년간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1.4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하고 법당에 들어가
정좌한 뒤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당신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명령에 복종하듯이
절을 지키는 것도 나의 도리이다.
중이 죽으면 어차피 화장을 해야 하는 것,
이제 불을 지르시오." 했다.
스님의 법력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불을 지르고 떠났다.
입적하기 15일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이 다함을 알고 물외에는 먹지 않았다.
1951년 3월 21일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세수 75세, 법랍 54세)
(출처:조연현기자 cho@hani.co.krⓒ한겨레(http://www.hani.co.kr)
* 경허-한암 : 스승과 제자의 이별시
초대종정 한암스님
21살 때 금강산에서 출가한 한암은 대도인 경허 선사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헤맨 끝에 23살 때 경북 금릉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를 친견한다.
경허는“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금강경〉한 구절로 아직 외형만을
향하던 청년 한암의 심안을 열어주었다.
경허는 바람이었다.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경허는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홀연히 함경도 삼수갑산에 머리를 기르고 숨어든 그를 애제자 수월이 찾아왔을
때도 방문을 열지 않은 채“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경허다.
그런 경허가 한암에게만 예외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도암과 해인사에서 1년을 함께한 뒤 경허는 한암과 헤어짐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출처:http://bosal.hihome.com/Import!!!!!edFiles/woljeong/wj_fm80.htm)
경허 화상이 한암스님에게 준 전별사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하고 학문이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서로 이별을 하는 마당을 당하게 되니 조모(朝暮)
의 연운(煙雲)과 산해(山海)의 원근(遠近)이 진실로 영송(迎送)하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고 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 한 수를 지어서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捲將窮髮垂天翼 (권장궁발수천익)
向槍楡且幾時 (향창유차기시)
分離尙矣非難事 (분리상의비난사)
所慮浮生杳後期 (소려부생묘후기)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않은 데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려운 게 아니지만
부생(浮生)이 흩어지면 또 볼 기회 있으랴.
한암스님은 이와 같은 경허 화상의 전별사(餞別辭)를 받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로
답을 하고 이별을 아쉬워했을 뿐 경허화상을 좇지는 않았다.
霜菊雪梅過了 (상국설매과료)
如何承侍不多時 (여하승시불다시)
萬古光明心月在 (만고광명심월재)
更何浮世謾留期 (갱하부세만류기)
서리 국화 설중매는 겨우 지나갔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가 없을까요.
만고에 변치 않고 늘 비치는 마음의 달,
쓸떼없는 세상에서 뒷날을 기약해 무엇하리.
(출처: 한암 일발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