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일상생활 가운데는 늘 재난과 사고가 따르고 있다. 태풍 · 쓰나미 ·지진 · 산사태 같은 자연적 현상은 물론 화재 · 추락 · 산불 · 충돌 등의 온갖 인위적인 것까지 늘 발생한다. 이를 예방하고자 심지어 법규까지 제정하고 책임자를 엄벌하는 데도 그치질 않는 걸 보면 이 또한 자연현상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이들 재난에는 반드시 막대한 물적 피해는 물론 귀중한 인명(人命)을 앗아 가는 희생이 뒤따른다. 특히 항공기나 선박에서의 화재(火災)는 육상과 달리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극히 제한적인 환경에 놓여있음으로 자칫하면 탑승한 인명 전체가 고스란히 피해를 당하는 수가 있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평소 소화(消火)기구들의 정비나 승무원들이 지켜야 할 규정을 만들어두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소형선이나 어선(漁船)의 경우는 거의 실행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승선 중에 직접 겪은 화재 사건 두 경우를 되돌아본다. 반년 동안을 남태평양에서 Tuna Long Line(참치연승)선에서 죽으라 실습을 마쳤는데 막상 첫 취업은 어법(漁法)도 지역도 전혀 다른 Trawler(저인망선:底引網船)인 51동방호(東邦號)의 2등항해사로 승선, 생판 낯선 상황에 적응하느라 시쳇말로 똥오줌을 못 가리다 겨우 직무를 담당할 수 있던 시기였다. 말로만 들어왔던 한겨울 북태평양의 바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거치는 저기압이나 태풍의 무덤이었던 곳! 지금 생각해도 무시무시한 바다였었다.
1. 자선(自船)의 화재
그 날의 일기를 보면,
「1970년 12월 15일 (화) 04:00시(현지시각). 지금 땅 위엔 평안과 고요와 깊은 안식이 깃들어 있을 시간이다. 오직 바다 위에서만 심한 바람과 높은 파도와 매서운 눈보라와 다툴 뿐이다. Onekotan(러시아 캄챠카 반도 끝에 있음)섬이 바로 눈앞에 왔을 만큼 육박했다. 배들이 있었다. Radar의 Scanner에도 눈과 얼음이 겹쳐 붙었고 갑판 위에도 미끄러워 다니지 못할 정도이다. 정식으로 하면 소련의 영해침범(領海侵犯)이다. 지금이라도 Coast guard(해안경비정)가 나와서 납치해간다면 영락없이 당하는 거다. 그러나 우리뿐이 아니다. 우리보다 먼저 10여척의 같은 배가 제각기 집결상태로 모여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약속한 것도 아니다. 우선은 풍파를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거친 바다 위에 불빛만 보아도 반갑고 위안이 되는 것이리라. 가끔 달빛에 백설이 뒤덮인 섬의 한 부분이 선명히 보인다. 날이 새면 절경이 펼쳐지리라. 이 섬의 서쪽 끝에는 해발 380미터에 큰 호수가 있고 그 호수 한가운데 다시 1380미터 높이의 산이 솟아있는 섬이다. 이런 섬이 내 것이라면 멋진 관광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하지만 이런 곳이라면 같은 뱃놈의 입장에서라도 인도적인 면에서 피차 피항할 수 있는 길을 어떤 세계적인 기구를 통해 열렸으면 좋겠다. 파도에 시달리는 것이 몹시도 피곤하다. 배의 Pitching(선박이 앞뒤로 흔들림)이 심하니 글씨가 쓰여지질 않는다. 또 한숨 자야한다. 내일을 위한 힘을 장만하기 위해서 -.
소련 상선 한 척이 지나간다. Deck에 붙은 얼음을 보니 상당히 고생한 모양이다. Kamchatka(캄차카)로 가는 듯. Container와 자동차를 실었다. Derrick(갑판상의 철기둥)에 달린 wire rope(鋼索)가 얼어붙은 얼음의 중량 때문에 축 늘어졌다. 그 아래서 작업하다 떨어지는 얼음에 얻어맞으면 즉사하는 수도 있다. 일본선들도, 우리도 왼통 배가 얼어붙었다.
오네고탄 섬의 위치
같은 날 13:35시 (L.M.T: 현지시각)
어제 오전 10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저기압을 피항중이다. 위도 49도30분까지 올라왔다. 새벽 2시부터 Onekotan섬 약 2마일까지 접근, 표류했다가 다시 기상이 악화, 黑石灣(구로이시만)까지 들어왔다. 주위엔 일본선들도 많다. 모두 U•P Flag(旗)를 달았다. ‘본선 긴급상황이 발생. 지급 입항허가를 원한다’는 뜻이다. 일본은 소련과 정치적 수교관계가 성립되어 있으니 별개지만 현재 한국선으로선 처음인데 약간 불안하기도 하다.
멀리서 본 섬의 자세가 그야말로 웅장하다. 가파르게 높은 산, 뒤덮힌 눈, 사람이 살만한 곳 같기도 한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간혹 심한 눈(아니 차라리 얼음 덩어리라고 하는 게 낫겠다)과 함께 폭풍이 계속 분다. 灣內(만내)이므로 파고는 낮다. 28시간이란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시간이 돈’이란 격언이 바로 우리들에게 한 말 같이 시간이 중요한데 몰라주는 대자연의 현상에 안타까울 뿐이다.
물개(물범이 맞다고들 한다)와 갈매기는 계속 배 주위를 맴돈다. 배에서 나오는 찌꺼기 들이 곧 그들의 먹이가 되는가 보다. 그저께는 큰 물개가 산채로 그물에 걸려 올라와 한때 작업 중지까지의 소동이 있었다. 스스로 기어내려 가긴 했지만 참 영리한 동물이다. 떡 벌어진 어께, 두툼한 목덜미에 시원스런 머리가 마치 점잖은 영웅의 타입이다. 울부짖음 또한 우렁차다. 대변이 일정치 않고 변비 현상이 계속 있다. 약은 있지만 먹기 싫다기 보담 먹지 말아야 한다. 모처럼 세수와 세면과 양치질을 하다. 역시 개운하고 맑은 기분이다.
같은 날 21:20 L.M.T
계속 강풍 속에 피항(避航) 중이다. 섬 가까이라 파도는 약간 숙어진 감이다. 연 이틀째 계속이다. 이젠 지나가고 회복될 시간이 넘었는데 -. 일본선들도 계속 피항중이다. 101와 102호는 현장에서 Heaving to(선체를 파도 방향으로 유지하며 최저속으로 풍파를 피하는 방법) 하는 모양이다. 한국의 연안에서 여객선이 기관고장으로 침몰, 1명 생존, 300여명이 익사했다는 뉴스다. 쇼킹하군. 해녀 1명이 표류 중 구출됐단다. 우리 회사 동방53호는 아직 부산 입항을 못했다니 그쪽에도 상당히 기상이 악화된 모양이군. 집에서 무척이나 걱정하겠다. 내일은 전보 한 장 쳐주어야겠다. 황천 피항중 기관 고장은 위험천만이다. 기관정비는 곧 생명과 직결됨을 기관부는 명심해야 할 일이다. 내일쯤은 작업장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할텐데 -.」
바로 이날, 밤중인데도 약간 파고가 낮아지는 듯하여 지루함도 벗어날겸 해서 작업에 나섰다. 투망(投網)후 두어 시간 후 양망(揚網)하고자 선교(船橋:Bridge)에서 선장(船長)의 직접 지휘하에 갑판 선원 모두가 갑판상에서 작업 중인데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얼른 얘기하고 뛰어 내려갔다. 바로 아래 선장실에서 심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급히 문을 열어보니 조그만 난방용 전기히터가 선체의 심한 롤링(橫搖)으로 넘어져 바닥에서 연기와 더불어 독한 유독성 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얼른 난로 스위치를 차단하고 난로를 바로 세운 뒤 목에 둘렀던 수건으로 타는 자리에 덮고 발로 밟아 진화(鎭火)을 했다. 그것으로 끝이 났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유독가스를 마신 목과 눈 보다 마음이 더 따가운 느낌이었다. 보고를 마치자 선장도 놀란 얼굴에서 싱긋한 웃음으로 반겼다. 천만다행이고 잘 처리했다는 뜻이리라.
겨우 손바닥의 절반만큼이 탔는데도 그 연기하며 냄새는 지독했다. 바닥이 화학제품으로, 그야말로 숨이 탁 막히게 하는 유독성 가스이기 때문이었다. 당직 사관인 나 이외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그냥 덮어버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다른 곳이 아닌 선장실에서 발생한 사고였기에….
통상 일반 침실에는 별도의 난로를 쓰지 못하게 되어있지만 24시간 근무 중인 선교(船橋:Bridge)와 선장실은 워낙 바깥 날씨가 추우므로 임시로 사용한 결과였다. 덕분(?)에 조타실에도 난로를 끄기로 했다. 추웠다. 그래도 선내 분위기조차 추우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계속)
첫댓글 목이 메인다.
가족들이 폭풍 뉴스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해서 일상을 잊었을 것 같다.
요즘 짝꿍이 일본 참치잡이 TV를 즐겨 보고 있어서 곁눈으로 보긴 하지만
이렇게 극한 상황은 처음 본다.
남자들이 밖에서 아니 직업전선에서 죽을 고생한다는 걸 짐작하긴 하지만
자연과 상대로 이렇게 사투를.....
소설같은 이야기를 친구의 수기로 읽고 있다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위대한가를 서완수님을 통해서 절감하게 된다.
<2023년의 4월 봄날에>
고마버이다. 사는 것이 다 그런 거 아닌가 싶네요. 부산넘
완수님께서 폭넓은 풍부한 사람이 된것이 바다 와 세계와 그리고 많은 경험들이 좋은 영향 을 준것같아요.한번뿐인 인생을 넓은 경험으로 살아낸 것은 성공적인 삶이지요.그러한 고생들이 경험들이 부럽네요.
말이 그렇지 사실은 바지가랭이 몇 번이나 적실뻔 했지요. 뭘 몰랐으니 용감해진 것이고..... . 고맙소. 건강하소. 부산넘
젊은이의 용기 그리고 아름다움 이지요.
늑점이 님이 서완수 선배님이시군요.
우리 선배님 중에서 2등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시고 저인망선을 타셨다니
놀랍고 대단하십니다.
노인과 바다 소설 생각이 납니다.
선장실의 화재를 잘 껐습니다.
'부산넘'이 허언이 아니었네요.
선상의 화재 후편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