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 다리 밟기 : 3월 7일 답사 안내문(2)
➐ 관수교(觀水橋) : 종로구 돈화문로(장사동)~중구 충무로(입정동)
- 조선시대에 준천사(濬川司)가 청계천의 수위(水位)를 관(觀)측한 데에서 유래.
조선시대에 이 근처에서 청계천 준설사업을 담당하였던 관청인 준천사(濬川司)가 청계천의 수위(水位)를 관측(觀)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남산 왜성대에서 순종황제가 머물던 창덕궁에 가려면 종로를 거쳐 남대문로를 통해 빙 돌아가야 했다. 일제는 1924년에 총독부 관리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왜성대와 창덕궁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도로를 개통하고, 청계천을 통과하는 다리를 놓은 것이 바로 관수교였다.
즉, 관수교는 일제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세운 다리였다.
이 다리는 1958년에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었다가 서울시가 2005년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운 다리로 놓였다.
➑ 세운교(世運橋) : 종로구 장사동~중구 을지로19길(산림동)
- 부근의 세운상가의 이름을 따서 세운교라 명명.
세운교 위로는 세운전자상가와 청계상가아파트를 잇는 58m 길이의 교각없는 육교가 2개 있다. 원래 1967년 세운상가 건립 때 교량을 만들었는데 2003년 ~ 2005년에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철거했다. 2010년대 중반에 서울시에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다시 ·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2017년에 다시 세운교를 재건했다..
➒ 배오개 다리 : 종로구 창경궁로(예지동)~중구 창경궁로(주교동)
- 이 다리 정북쪽의 배오개 고개이름에서 유래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놓였던 배다리[주교(舟橋)]를 2005년 9월에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놓은 뒤 배오개다리로 명명했다.
배오개는 종로구 인의동 112번지 해운항만청 동쪽에 있던 고개이다. 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어서 배나무고개 · 배고개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배오개가 되었다. 한자명으로 이현(梨峴)이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옛날 이 고개에 숲이 울창하여 짐승과 도깨비가 많이 나와서 도깨비고개라고 불렀다. 그래서 대낮에도 혼자서 넘기가 무서워 백 명을 모아야 넘는다고 해서 백고개 · 백재 · 백채라고 하다가 배고개가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배오개는 지금의 배오개길이 지나는 곳으로 길을 넓히면서 평탄해져 고개의 흔적은 없어졌다.
➓ 새벽다리 : 종로구 예지동 332번지~중구 주교동 45번지
- 주변에 큰 재래시장들이 있어서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의 의미를 담아 지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던 이 다리는, 2005년 9월 30일에 폭 6m, 길이 22.8m로 청계천 복원 공사 떄 준공되었다.
다리 좌우에 광장시장과 방산종합시장이 있어서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를 담은 명칭이라고 하여, 새벽다리라고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제정하였다.
이 다리는 시장 천막의 이미지를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고자 설계되었다. 청계천의 다리들 중의 가장 활기가 넘치는 곳 중의 하나이다.
⑪ 마전교(馬廛橋) : 종로구 종로 5가~중구 방산동
- 조선후기 영조 때 이 근처에 마전이 생기면서 ‘마전교(馬廛橋)’란 이름이 붙여짐
조선 태종 때의 이 다리이름은 창선방(彰善坊)에 있어서 ‘창선방교(彰善坊橋)’라고 하다가 성종 때에는 ‘태평교(太平橋)’로 불렸다. 조선후기 영조 때에 이 근처에 마전이 생기면서 ‘마전교(馬廛橋)’란 이름이 붙었다.
서울의 고지도인 〈수선전도〉에는 ‘마전다리’, 〈도성도〉에는 ‘馬井橋(마정교)’, 대한제국 시기에 그린 〈경성 부근 지도〉와 〈한양경성도〉에는 ‘馬軍生橋(마군생교)’로 적혀있다. 그리고 소와 말의 매매를 주로 낮(午)에 했다고 하여 ‘오교(午橋)’, ‘오굣다리’로도 불렸다
이 다리는 일제 때(1936년) <대경성지도>에도 나타나 있지만 다리 명칭은 없었다. 2000년대 중반에 서울시가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현재 자리에 새로 다리를 놓고, 옛 다리 명칭을 따서 이름을 마전교라고 지었다
⑫ 나래교 : 종로구 종로5가 321번지~중구 방산동 19번지
- 나래는 날개인데, 다리 주변의 의류상가들이 세계 패션의 1번지로 힘껏 비상하라는 의미로 명명.
나래교는 나비의 힘찬 나래짓을 이미지화 하고, 3차원 아치와 케이블로 나비의 형상화를 유도한 데서 유래된 다리이름이다..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으로 동대문 의류상권이 세계 패션 1번지로 비상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으나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200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길이 22.8m, 폭 6m 규모의 이다리는 차량은 다닐 수 없고, 오직 사람만 통행할 수 있다. 구조물은 나비 날개 모양이다.
⑬ 버들다리 (전태일 다리) : 종로구 종로5가 319번지~중구 을지로6가 17번지(동대문종합시장~국립중앙의료원)
-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다는 데에서 유래된 명칭.
보행자의 이동 편리를 위해 차도와 보도를 분리하여 그늘을 만든 퍼걸러(pergola)를 설치함으로써 도심 속의 정원을 연출하였다. 이 다리 이름은 전일에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이 다리는 청계천이 복원되던 2005년 9월 30일에 폭 17m, 길이 23.3m로 준공되었다.
이 다리 명칭은 버들다리 근처에서 분신하여 노동권 보장에 헌신한 전태일(全泰壹 / 23세)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2012년 11월 1일부터 ‘전태일 다리’라고 병용하여 부르게 되었다.
이 다리 부근의 평화시장 앞은 평화시장 피복 공장 재단사로 일하다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을 한 ‘전태일(全泰壹) 거리’이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재단사 전태일 열사가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하여 국립의료원을 거쳐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오후 10시경에 숨졌다.
전태일 열사는 “기업주는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 15, 16세의 어린아이들이 일요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씩 혹사당하고 있으니 당국은 이런 사태를 시정해 달라”고 호소하고, 미리 준비했던 휘발유로 「근로 기준법 해설」이란 책을 태우려다 제지를 받자 자기 몸에 불을 붙여 분신 자살하였다.
정부에 연소 근로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시켜줄 것을 누차 요구하던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을 함으로써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⑭ 오간수교(五間水橋) : 종로구 율곡로 (종로6가)~중구 장충단로(을지로6가)
- 청계천의 물이 한양도성의 오간수문(五間水門)을 빠져 나가는 곳에 설치한 다리
청계천 물줄기가 한양도성을 빠져 나가는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五間水橋]라고 불렸다. 조선 초에 한양도성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 문을 만들고, 그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불렀다.
이 수문은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쌓을 때 창건한 듯 하나 확실하지 않다. 처음에는 수문이 3개였으나 1421년(세종 3년)에 장마로 개천이 범람하자 1년 뒤에 추가로 2개를 더 만들어 5개가 되었다.
오간수문에 쇠창살을 두는 등 경비를 강화했음에도 죄인들이나 외부인들이 몰래 출입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조선초 명종 때 유명했던 도적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올 때나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오간수문을 이용했다
일제의 통감정치를 받던 1907년(융희 원년)에 당시 한성부의 유맹(劉猛) 토목국장이 청계천 물줄기를 원활하게 흐르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오간수문을 헐었고, 1년 뒤에 일제는 오간수문 근처의 성벽마저 철거했다. 이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 다리를 놓고, 이름을 ‘오간수교(五間水橋)’라 칭했다.
서울시에서 2000년대에 진행한 청계천 복원공사 때 교통문제로 전일의 오간수문을 복원하지 못하고, 철근 콘크리트로 지금의 오간수교를 놓았다. 그 대신에 오간수교 북측 벽면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 2시간여의 답사 일정으로는 청계천 하류의 맑은내다리~두물다리까지 7개 교량을 답교할 수 가 없어서 모전교~오간수교까지만 계획했습니다.
첫댓글 좋은답방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