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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九回 楚靈王挾詐滅陳蔡 晏平仲巧辯服荊蠻
제69회: 초영왕은 속임수로 진채(陳蔡)를 멸하고, 안영은 교묘한 변설로 초나라 대부들을 승복시켰다.
話說,陳哀公名溺,其元妃鄭姬生子偃師,已立為世子矣。次妃生公子留,三妃生公子勝。次妃善媚得寵,既生留,哀公極其寵愛,但以偃師已立,廢之無名。乃以其弟司徒公子招為留太傅,公子過為少傅,囑付招過:「異日偃師當傳位於子留。」周景王十一年,陳哀公病廢在床,久不視朝。公子招謂公子過曰:「公孫吳且長矣,若偃師嗣位,必復立吳為世子,安能及留?是負君之託也。今君病廢已久,事在吾等掌握,及君未死,假以君命,殺偃師而立留,可以無悔。」公子過以為然,乃與大夫陳孔奐商議。孔奐曰:「世子每日必入宮問疾三次,朝夕在君左右,命不可假也。不若伏甲於宮巷,俟其出入,乘便刺之,一夫之力耳。」
한편, 진애공(陳哀公)은 이름을 익(溺)이라고 했는데, 정부인 정희(鄭姬)가 낳은 아들 언사(偃師)를 이미 세자로 세웠다. 둘째 부인은 아들 공자 유(公子留)를 낳았고 셋째 부인은 공자 승(公子勝)을 낳았다. 둘째 부인이 아첨을 잘해서 총애를 받게 되어 그녀의 소생 공자 유도 진애공의 총애를 받았지만, 다만 언사가 이미 세자가 되었으므로 폐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진애공은 그 동생인 사도(司徒) 공자 초(公子招)를 공자 유(留)의 태부(太傅)로 삼고, 다른 동생 공자 과(公子過)를 소부(少傅)로 삼아 그들에게 부탁하기를, “후일에 언사가 마땅히 공자 유(留)에게 전위(傳位)하도록 하라.”고 했다. 주경왕 11년(기원전 534년)에 진애공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조정에 나가지 못했다. 공자 초가 공자 과에게 말하기를, “공손 오(吳)가 장성했으니, 만약 언사가 즉위한다면 틀림없이 아들 오(吳)를 세자로 세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찌 공자 유에게 기회가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주군의 당부를 저버리게 된다. 지금 주군께서 병든 지 오래이니 모든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주군께서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으니 주군의 명을 빌려서 언사를 죽이고 공자 유(留)를 세우면 가히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하니, 공자 과가 그러자고 했다. 이에 대부 진공환(陳孔奐)과 상의하니, 진공환이 말하기를, “세자는 매일 입궁하여 세 번 병문안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주군의 곁에 붙어 있으니 주군의 명을 빌릴 수 없습니다. 차라리 궁궐의 으슥한 길목에 무사를 매복해 놓았다가 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찔러 죽인다면 한 사내의 힘으로도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했다.
過遂與招定計,以其事託孔奐,許以立留之日,益封大邑。孔奐自去陰召心腹力士,混於守門人役數內,閽人又認做世子親隨,並不疑慮。世子偃師問安畢,夜出宮門,力士滅其火,刺殺之。宮門大亂。須臾,公子招同公子過到,佯作驚駭之狀,一面使人搜賊,一面倡言:「陳侯病篤,宜立次子留為君。」陳哀公聞變,憤恚自縊而死。史臣有詩云:「嫡長宜君國本安,如何寵庶起爭端?古今多少偏心父,請把陳哀仔細看!」司徒招奉公子留主喪即位,遣大夫于徵師以病薨赴告於楚。時伍舉侍於靈王之側,聞陳已立公子留為君,不知世子偃師下落,方在疑惑。
공손 과가 공자 초와 계책을 정하여 그 일을 진공환에게 맡기고, 공자 유(留)를 주군으로 세우는 날에 큰 고을을 봉해 주기로 했다. 진공환이 집으로 돌아가서 몰래 심복 장사를 불러 대궐 문을 지키는 수비병 속에 섞이도록 하니, 문지기가 세자를 따라온 사람인 줄 알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세자 언사가 병문안을 마친 후에 밤중에 궁궐 문을 나오니 무사가 그의 불을 꺼버리고 그를 찔러 죽였다. 궁문 앞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잠시 후 공자 초와 공자 과가 도착하여 짐짓 놀라는 척하며 한편으로는 사람을 시켜 자객을 잡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소리로 외치기를, “주군께서 병이 위중하시니, 마땅히 차자인 유(留)를 군주로 세워야 한다.” 했다. 진애공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궁궐 밖에서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고 화가 나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적장자가 군주가 되어야 나라의 근본이 안정되거늘, 어찌 서자를 총애하여 분란의 빌미를 만들었는가? 고금의 수많은 편애하는 아비들이여, 청컨대 진애공을 자세히 살펴보시오.” 했다. 사도 공자 초가 공자 유(公子留)를 상주로 삼아 장례를 치르고 즉위하게 했다. 대부 우징사(于徵師)를 초나라에 보내어 진애공이 병으로 죽었음을 알렸다. 그때 오거가 초영왕을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진나라가 이미 공자 유를 군주로 세웠다는 말을 듣고, 세자 언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바야흐로 의심하게 되었다.
忽報「陳侯第三子公子勝同姪兒公孫吳求見。」靈王召之,問其來意。二人哭拜於地。公子勝開言:「嫡兄世子偃師,被司徒招與公子過設謀枉殺,致父親自縊而死。擅立公子留為君,我等恐其見害,特來相投。」靈王詰問于徵師。徵師初猶抵賴,卻被公子勝指實,無言可答。靈王怒曰:「汝即招過之黨也!」喝教刀斧手,將徵師綁下斬訖。伍舉奏曰:「王已誅逆臣之使,宜奉公孫吳以討招過之罪,名正言順,誰敢不服?既定陳國,次及於蔡,先君莊王之績,不足道也。」靈王大悅。乃出令興師伐陳。公子留聞于徵師見殺,懼禍不願為君,出奔鄭國去了。或勸司徒招:「何不同奔?」招曰:「楚師若至,我自有計退之。」
그때 갑자기 보고하기를, “진애공의 셋째 아들 공자 승(公子勝)과 조카 공손 오(吳)가 함께 와서 뵙기를 청합니다.” 했다. 초영왕이 불러서 그들이 온 뜻을 물었다. 두 사람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절했다. 공자 승이 말하기를, “적자인 세자 언사 형님은 사도 공자 초와 공자 과가 꾸민 음모로 억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부친께서 스스로 목을 매어 돌아가시자 두 사람이 마음대로 공자 유를 군주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특별히 달려왔습니다.” 하니, 초영왕이 우징사를 추궁했다. 우징사가 처음에는 변명하며 부인하였으나, 공자 승이 구체적으로 지적하자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초영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곧 공자 초와 공자 과의 일당이구나!” 하고, 큰 소리로 도부수들을 불러 우징사를 묶어서 참수하도록 명했다. 오거가 아뢰기를, “대왕께서 이미 반역자들이 보낸 사자를 죽였으니 마땅히 공손 오(公孫吳)를 앞세워 진(陳)나라의 공자 초와 공자 과의 죄를 묻는다면 명분이 정당하고 말이 사리에 맞으니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진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채나라에까지 미친다면 선왕 초장왕이 세운 공적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초영왕이 크게 기뻐하여, 곧 군사를 일으켜 진(陳)나라를 치라고 명령했다. 공자 유(留)는 우징서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두려워하여 진(陳)나라 군주의 자리를 버리고 정나라로 달아났다. 어떤 사람이 사도 공자 초에게 권하기를, “어째서 공자 유와 함께 정나라로 달아나지 않습니까?” 하니, 공자 초가 말하기를, “만약 초나라 군사가 도착해도 나는 스스로 물리칠 계책이 있소.” 했다.
卻說,楚靈王大兵至陳。陳人皆憐偃師之死,見公孫吳在軍中,無不踴躍,咸簞食壺漿,以迎楚師。司徒招事急,使人請公子過議事。過來,坐定,問曰:「司徒云『有計退楚』,計將安出?」招曰:「退楚只須一物,欲問汝借。」過又問:「何物?」招曰:「借汝頭耳!」過大驚,方欲起身。招左右鞭捶亂下,將過擊倒,即拔劍斬其首,親自持赴楚軍,稽首訴曰:「殺世子立留,皆公子過之所為。招今仗大王之威,斬過以獻,惟君赦臣不敏之罪!」靈王聽其言詞卑遜,心中已自歡喜。
한편, 초영왕의 대군이 진(陳)나라에 도착했다.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언사(偃師)의 죽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초나라 군중에 공손오(公孫吳)가 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여 도시락과 장 항아리를 들고 초나라 군사들을 환영했다. 사도 공자 초는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사람을 시켜 일을 의논하겠다면서 공자 과를 불러오게 하였다. 공자 과가 와서 자리에 앉으면서 공자 초에게 묻기를, “사도께서 초나라 군사를 물리칠 계책이 있다고 했다는데 그 계책은 무엇입니까?” 하니, 공자 초가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를 물리치는데 오로지 한 가지 물건이 필요하다. 너에게 그것을 빌리고자 한다.” 했다. 공자 과가 다시 묻기를,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니, 공자 초가 말하기를, “네 머리를 빌려야겠다.” 했다, 공자 과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공자 초가 옆에 있던 채찍으로 공자 과를 마구 쳐서 쓰러뜨렸다. 즉시 허리에 찬 칼을 뽑아 공자 과의 머리를 베어 손에 들고 초나라 진영으로 초영왕을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호소하기를, “세자를 죽이고 공자 유를 세운 일은 모두 공자 과가 한 짓입니다. 제가 대왕의 위엄에 의지하여 공자 과의 목을 베어 바치니, 군주께서는 신의 불민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초영왕이 공자초의 공손한 말을 듣고 마음이 흡족했다.
招又膝行而前,行近王座,密奏曰:「昔莊王定陳之亂,已縣陳矣,後復封之,遂喪其功。今公子留懼罪出奔,陳國無主,願大王收為郡縣,勿為他姓所有也。」靈王大喜曰:「汝言正合吾意。汝且歸國,為寡人辟除宮室,以候寡人之巡幸。」司徒招叩謝而去。公子勝聞靈王放招還國,復來哭訴,言:「造謀俱出於招,其臨時行事,則過使大夫孔奐為之。今乃委罪於過,冀以自解,先君先太子目不瞑於地下矣。」言罷,痛哭不已,一軍為之感動。靈王慰之曰:「公子勿悲,寡人自有處分。」次日,司徒招備法駕儀從,來迎楚王入城。靈王坐於朝堂,陳國百官俱來參謁。
공자 초가 무릎걸음으로 초영왕의 자리에 가까이 가서 몰래 아뢰기를, “옛날 장왕께서 진(陳)나라의 변란을 평정하여 이미 초나라의 현으로 만들었으나, 후에 다시 봉하여 마침내 그 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지금 공자 유가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도망쳐 버리고 진나라는 주인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진나라를 거두어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으시고 다른 성씨의 소유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하니, 초영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내 뜻에 맞는다. 그대는 일단 진나라 도성 안으로 돌아가 과인을 위해 궁궐을 청소하고 내가 입궐하기를 기다리도록 하라.” 했다. 사도 공자 초가 사례하고 물러갔다. 공자 승(勝)은 초영왕이 공자 초를 풀어주어 도성 안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초영왕을 다시 찾아와 곡을 하며 호소하기를, “공자 초가 모든 음모를 꾸몄고, 일을 실행할 때에는 공자 과가 대부 진공환을 시켜서 한 것입니다. 지금 죄를 공자 과에게 넘겨 버리고 자기는 빠져나가려고 하니 돌아가신 선군과 세자께서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했다. 말을 마치고 통곡해 마지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공자 승에게 감동했다. 초영왕이 공자승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공자는 너무 슬퍼하지 말라. 과인이 따로 처분하겠다.” 했다. 다음날 사도 공자 초가 법가를 준비하고 의례를 갖추어 초영왕을 진나라 도성 안으로 모셨다. 초영왕이 진나라의 조당에 앉으니 진나라의 백관들이 모두 나와서 배알했다.
靈王喚陳孔奐至前,責之曰:「戕賊世子,皆汝行凶,不誅何以儆眾!」叱左右將孔奐斬訖。與公子過二首,共懸於國門。復誚司徒招曰:「寡人本欲相寬,奈公論不容何?今赦汝一命,便可移家遠竄東海。」招倉皇不敢措辯,只得拜辭。靈王使人押往越國安置去訖。公子勝率領公孫吳拜謝討賊之恩。靈王謂公孫吳曰:「本欲立汝,以延胡公之祀。但招過之黨尚多,怨汝必深,恐為汝害,汝姑從寡人歸楚。」乃命毀陳之宗廟,改陳國為縣。以穿封戍爭鄭囚皇頡事,不為諂媚,使守陳地,謂之陳公。陳人大失望。髯翁有詩嘆云:「本興義旅誅殘賊,卻愛山河立縣封。記得蹊田奪牛語,恨無忠諫似申公!」
초영왕이 진공환을 앞으로 불러 꾸짖기를, “세자를 죽인 것은 모두 네가 저질렀으니 너를 죽이지 않고서야 어찌 많은 사람에게 경계를 줄 수 있겠느냐?” 하고, 좌우에 소리쳐서 진공환을 끌어내어 참수한 후에 공자 과의 수급과 같이 도성 문 위에 걸어 놓으라고 했다. 다시 사도 공자 초를 꾸짖기를, “과인이 원래는 너를 관대하게 용서하고자 했으나 공론이 너를 용서할 수 없다니 어찌하겠는가? 오늘 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으니 속히 가솔들을 데리고 멀리 동해가로 옮겨가 숨어살아라.” 했다. 공자 초가 황망하여 감히 변명하지 못하고 감사의 말만을 할 뿐이었다. 초영왕이 사람을 시켜 공자 초와 그의 가솔들을 월나라로 압송하여 그곳에 살게 하였다. 공자 승이 공손 오를 데리고 초영왕에게 반역자들을 토벌해 준 은혜에 대해 감사했다. 초영왕이 공손 오에게 말하기를, “원래 내가 그대를 진나라 군주로 세워 호공(胡公)의 제사를 계속 받들게 하려고 하였으나, 공자 초와 공자 과의 일당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그대를 깊이 원망하여 해칠까 걱정된다. 그래서 그대는 잠시 나를 따라 초나라에 돌아가 있도록 하라.” 하고, 즉시 진(陳)나라의 종묘를 헐어버리고, 진나라를 초나라의 현으로 만들었다. 초영왕은 천봉술(穿封戌)이 정나라의 포로 황힐(皇頡)을 생포한 공이 있는데도 아부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여, 진나라 땅을 지키게 하고 천봉술을 진공(陳公)이라 불렀다.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실망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탄식해 이르기를, “본디 정의를 위해 역적을 치러 가서는, 오히려 남의 산하를 탐내어 현으로 만들어 버렸구나! 초장왕에게 땅을 밟았다고 소를 빼앗는다고 말했는데. 충간을 올리는 신숙시 같은 신하가 없음을 한하노라!” 했다.
靈王攜公孫吳以歸,休兵一載,然後伐蔡。伍舉獻謀曰:「蔡般怙惡已久,忘其罪矣。若往討,彼反有詞,不如誘而殺之。」靈王從其計。乃託言巡方,駐軍於申地,使人致幣於蔡,請靈公至申地相會。使人呈上國書,蔡侯啟而讀之,略云:「寡人願望君侯之顏色,請君侯辱臨於申。不腆之儀,預以犒從者。」蔡侯將戎車起行。大夫公孫歸生諫曰:「楚王為人,貪而無信。今使人之來,幣重而言卑,殆誘我也。君不可往!」蔡侯曰:「蔡之地不能當楚之一縣,召而不往,彼若加兵,誰能抗之?」歸生曰:「然則請立世子而後行。」
초영왕은 공손오를 데리고 귀국하여 군사들을 일 년 쉬게 한 뒤에 채나라를 치기로 했다. 오거가 계책을 드리며 말하기를, “채나라 군주 반(般)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이미 오래되어 그 죄를 잊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토벌하러 간다면 그가 오히려 변명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를 유인하여 죽이는 게 낫습니다.” 하니, 초영왕이 그 계책에 따라, 변경 순방을 핑계로 군사를 신(申) 땅에 주둔시키고 사자를 시켜 폐백을 전하면서 신(申) 땅에서 서로 만나기를 청했다. 초나라 사자가 국서를 채나라 군주에게 바치니, 채나라 군주가 편지를 뜯어 읽었다. 대략 이르기를, “과인이 군주의 얼굴을 보고 싶어 청하오니, 신 땅으로 왕림하여 뵙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변변치 못한 선물이나마 사자 편에 보내니 시종들을 위로하는 데 보태 쓰십시오.” 했다. 채나라 군주가 전차를 타고 길을 떠나려고 하니, 대부 공손 귀생(公孫歸生)이 간하기를, “초왕의 위인이 탐욕스럽고 신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자를 보내어 많은 폐백과 공손한 말로 초청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입니다. 주군께서 가시면 안 됩니다.” 했다. 채나라 군주가 말하기를, “채나라 땅은 초나라의 한 개 현보다 작습니다. 초영왕이 불러서 가지 않으면 그들이 군사를 몰고 올 텐데 누가 감히 그 군사를 막겠소?” 하니, 공손 귀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청컨대 세자를 세우시고 가십시오.” 했다.
蔡侯從之,立其子有為世子,使歸生輔之監國。即日命駕至申,謁見靈王。靈王曰:「自此地一別,於今八年矣,且喜君丰姿如舊。」蔡侯對曰:「般荷上國辱收盟籍,以君王之靈,鎮撫敝邑,感恩非淺。聞君王拓地商墟,方欲馳賀,使命下臨,敢不趨承。」靈王即於申地行宮,設宴款待蔡侯,大陳歌舞,賓主痛飲甚樂。復遷席於他寢,使伍舉勞從者於外館。蔡侯歡飲,不覺酕醄大醉。壁衣中伏有甲士,靈王擲杯為號,甲士突起,縛蔡侯於席上。蔡侯醉中,尚不知也。靈王使人宣言於眾曰:「蔡般弒其君父,寡人代天行討。從者無罪,降者有賞,願歸者聽。」原來蔡侯待下,極有恩禮,從行諸臣,無一人肯降者。
채나라 군주가 귀생의 말을 따라 그의 아들 유(有)를 세자로 세우고, 귀생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여 나랏일을 감독하게 한 후, 그날로 어가를 몰아 신 땅에 도착해 초영왕을 뵈었다. 초영왕이 말하기를, “지난날 이곳에서 한번 헤어진 이래 팔 년이 지났건만 군주의 풍모는 옛날과 다름이 없으니 기쁘구려!” 했다. 채나라 군주가 대답하기를, “제가 상국과 동맹하여, 대왕의 덕택으로 우리나라를 다스렸으니,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군왕께서 옛 상나라 땅을 개척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치하를 드리려고 했는데, 사자가 왔으니 감히 달려와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했다. 초영왕이 즉시 신 땅의 행궁에서 연회를 열어 채나라 군주를 접대하며 노래와 춤을 벌여놓고 주인과 손님이 실컷 술을 마시면서 즐거워하였다. 다시 술상을 침소로 옮기게 하고 오거를 시켜 채나라 시종들은 바깥 관사에 묵게 했다. 채나라 군주가 즐겁게 마시다가 저도 모르게 크게 취했다. 초영왕이 술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벽의 휘장 뒤에서 갑사들이 뛰어나와 채나라 군주를 포박하여 술상 앞에 대령시켰다. 채나라 군주가 술에 취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초영왕이 사람을 시켜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를, “채나라 반(般)은 그 부군을 시해했으므로, 과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그의 죄를 묻고자 한다. 그를 따라온 종자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항복하는 자는 상을 줄 것이고 돌아가겠다고 원하는 자는 돌려보내겠다.” 했다. 원래 채나라 군주는 시종들에게 은혜와 예절을 다했으므로 따라온 신하나 종자들은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다.
靈王一聲號令,楚軍圍裹將來,俱被擒獲。蔡侯方纔酒醒,知身被束縛,張目視靈王曰:「般得何罪?」靈王曰:「汝親弒其父,悖逆天理,今日死猶晚矣。」蔡侯嘆曰:「吾悔不用歸生之言也!」靈王命將蔡侯磔死,從死者共七十人,輿隸最賤者,俱誅不赦。大書蔡侯般弒逆之罪於版,宣布國中。遂命公子棄疾統領大軍,長驅入蔡。宋儒論蔡般罪固當誅,然誘而殺之,非法也。髯翁有詩云:「蔡般無父亦無君,鳴鼓方能正大倫。莫怪誘誅非法典,楚靈原是弒君人。」
초영왕이 한번 호령하자 초나라 군사들이 채나라 시종이 묵은 관사를 포위하여 모두 사로잡았다. 채나라 군주는 겨우 술에서 깨어 몸이 포승줄에 묶인 것을 알고, 눈을 부릅뜨며 초영왕을 노려보고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너는 부친을 죽였으니 하늘의 이치를 어겼다. 오늘 죽어도 오히려 늦었다.” 했다. 채나라 군주가 탄식하기를, “내가 귀생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구나!” 했다. 초영왕이 명하여 채나라 군주를 찢어 죽이니, 그를 따라서 죽은 자가 70여 명이었다. 가마꾼 노예까지 가장 천한 자도 모두 죽여서 용서하지 않았다. 다시 명하여 채나라 군주 반이 부군을 죽였다고 판에 크게 써서 나라 안에 선포했다. 마침내 공자 기질(公子棄疾)에게 명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거침없이 진군하여 채나라에 들어갔다. 송(宋)나라 때 유학자가 채나라 반의 죄는 마땅히 죽을죄에 해당하지만, 그러나 그를 유인하여 죽인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채나라 반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자라, 북을 울리기만 해도 능히 큰 윤리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유인하여 죽인 것이 부당한 행위라고 괴이히 여기지 말라. 초영왕도 원래는 그 임금을 죽인 자였다.” 했다.
卻說,蔡世子有,自其父發駕之後,旦晚使諜者探聽。忽報蔡侯被殺,楚兵不日臨蔡,世子有即時糾集兵眾,授兵登埤。楚兵至,圍之數重。公孫歸生曰:「蔡雖久附於楚,然晉楚合成,歸生實與載書。不若遣人求救於晉,儻惠顧前盟,或者肯來相援。」世子有從其計,募國人能使晉者。蔡洧之父蔡略,從蔡侯於申,在被殺七十人之中。洧欲報父讎,應募而出,領了國書,乘夜縋城北走,直達晉國,來見晉昭公,哭訴其事。昭公集群臣問之。荀吳奏曰:「晉為盟主,諸侯依賴以為安。既不救陳,又不救蔡,盟主之業墮矣。」昭公曰:「楚虔暴橫,吾兵力不逮,奈何?」韓起對曰:「雖知不逮,可坐視乎?何不合諸侯以謀之?」
한편, 채나라 세자 유(有)는 그 부군이 어가를 타고 초왕을 만나러 간 이후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첩자를 초나라에 보내 소식을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갑자기 보고하기를, 채나라 군주가 피살되고 초나라 군사들이 곧 채나라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세자 유가 즉시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성가퀴에 올라 초나라 군사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도착하여 채나라 도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공손 귀생이 말하기를, “채나라가 비록 오랫동안 초나라를 따랐지만,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화친을 맺을 때 이 귀생이 참석하여 서명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보내어 진(晉)나라에 구원을 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때의 회맹을 잊지 않고 있으면 혹시 우리를 구원하러 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니, 세자 유가 그 계책에 따라 백성 중에서 능히 진에 사자로 갈 만한 사람을 모집했다. 채유(蔡洧)의 부친 채략(蔡略)은 채나라 군주를 따라 신(申)에 갔다가 피살당한 70여 명 중에 있었다. 채유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모집에 응하였다. 채유가 국서를 가지고 밤을 틈타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서 북쪽을 향하여 달려가 곧바로 진(晉)에 이르러 진소공(晉昭公)을 뵙고 그간의 일을 울면서 호소하였다. 진소공이 신하들을 소집하여 그 의견을 물으니, 순오(荀吳)가 아뢰기를, “진(晉)나라는 맹주이니 제후들이 우리의 힘을 의지하여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미 진(陳)나라를 구하지 못했는데 다시 채나라를 구하지 못한다면 맹주의 자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했다. 소공이 말하기를, “초왕 웅건(熊虔)은 포악하고 전횡을 일삼는 자요. 우리 군사력이 초나라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하오?” 하니, 한기가 대답하기를, “비록 우리의 군사력이 초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보겠습니까? 어찌하여 제후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지 않으십니까?” 했다.
昭公乃命韓起約諸國會於厥憖。宋、齊、魯、衛、鄭、曹,各遣大夫至會所聽命。韓起言及救蔡之事,各國大夫人人伸舌,個個搖首,沒一個肯擔當主張的。韓起曰:「諸君畏楚如此,將聽其蠶食乎?倘楚兵由陳蔡漸及諸國,寡君亦不敢與聞矣。」眾人面面相覷,莫有應者。時宋國右師華亥在會,韓起獨謂華亥曰:「盟宋之役,汝家先右師實倡其謀,約定南北弭兵,有先用兵者,各國共伐之。今楚首先敗約,加兵陳蔡,汝袖手不發一言,非楚無信,乃爾國之欺謾也。」華亥觳觫對曰:「下國何敢欺謾,得罪主盟?但蠻夷不顧信義,下國無如之何耳。今各國久弛武備,一旦用兵,勝負未卜。不若遵弭兵之約,遣一使為蔡請宥,楚必無辭。」
진소공이 즉시 한기(韓起)에게 명하여 제후들을 궐은(厥憖) 땅에 모이도록 했다. 송(宋), 제(齊), 노(魯), 위(衛), 정(鄭), 조(曹)나라는 각기 대부들을 회맹의 장소에 보내어 진(晉)나라의 명을 받들어서 모였다. 한기가 채나라를 구원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자 각국의 대부들은 모두 혀를 내 두르고 하나 같이 머리를 흔들며 한 사람도 기꺼이 자기의 주장을 말하지 않았다. 한기가 말하기를, “여러분이 초나라를 이같이 두려워하니 앞으로 초나라에 잠식되지 않겠소? 만약에 초나라 군사가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잠식하고 여러 나라를 삼키려 한다면, 우리 군주께서는 중원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실 것이오.” 했다. 여러 사람이 서로 쳐다보고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송나라의 우사 화해(華亥)가 회합에 참석했는데, 한기가 오직 화해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송나라 땅에서 맺은 미병지회에서 그대의 부친 화원이 그 계책을 앞장서서 주장했소. 그때 남북이 싸움을 그치고, 먼저 군사를 움직인 나라는 각국이 함께 정벌하기로 약정했소. 지금 초나라가 먼저 미병지회의 약속을 저버리고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공격했는데, 그대들은 팔짱만 끼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니 초나라만 신의가 없는 게 아니라 그대의 송나라도 중원의 제후국들을 속인 것이오.” 했다. 화해가 벌벌 떨며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속여서 맹주인 진(晉)나라에 죄를 얻으려 하겠습니까? 단지 남쪽 오랑캐 나라가 신의를 저버리니 우리나라는 어찌하는 수가 없을 뿐입니다. 지금에 각국은 군사 대비가 느슨하여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승부를 점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싸움을 그치자는 미병지회의 맹약을 지켜 채나라를 용서하라고 하면 초나라도 반드시 우리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韓起見各國大夫俱有懼楚之意,料救蔡一事,鼓舞不來,乃商議修書一封,遣大夫狐父,逕至申城,來見楚靈王。蔡洧見各國不肯發兵救蔡,號泣而去。狐父到申城將書呈上,靈王拆書看之,略云:「日者,宋之盟,南北交見,本以弭兵為名。虢之會,再申舊約,鬼神臨之。寡君率諸侯恪守成言,不敢一試干戈。今陳蔡有罪,上國赫然震怒,興師往討,義憤所激,聊以從權。罪人既誅,兵猶未解,上國其何說之辭?諸國大夫執政,皆走集敝邑,責寡君以拯溺解紛之義,寡君愧焉!猶懼以徵發師徒,自干盟約,遣下臣起合諸大夫共此尺書,為蔡請命。倘上國惠顧前好,存蔡之宗廟,寡君及同盟,咸受君賜,豈惟蔡人。」
한기가 각국의 대부들이 초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채나라를 구하는 일에 용기를 내게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그들과 상의해 편지 한 통을 써서 대부 호보(弧父)를 신성(申城)에 보내서 초영왕에게 전하게 했다. 채유는 각국의 대부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채나라를 구원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채나라로 돌아갔다. 호보가 신성에 이르러 초영왕에게 편지를 바치자 초영왕이 겉봉을 뜯고 읽었다.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 송나라에서 남북이 모여 회맹한 것은 본디 전쟁을 그치자는 명분이었습니다. 후에 괵(虢) 땅에서 모여 그 약속을 다시 확인하고 천지신명께 맹세했습니다. 우리 주군께서 제후들을 거느리고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키자고 언약하여 감히 한 번도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陳)나라와 채나라가 죄를 지었다 하여 초나라 군주께서 진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니 의분을 느낀 것은 잠시 이해할 수 있겠으나, 죄인들을 이미 죽이고도 군사들을 해산하지 않는 것은 무슨 말로 설명할 것입니까? 정사를 담당하는 제후국의 대부들이 모두 진(晉)나라에 모여서, 물에 빠진 나라를 건져 주고, 나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의무를 우리 주군에게 따지니, 우리 주군께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국이 군사들을 징발하는 것은 맹약을 위반하는 결과가 될까 두려워서, 소신 한기를 보내어 열국의 대부들을 모아 채나라의 구명을 위해 이 편지를 써서 바치게 하셨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옛날의 우호 관계를 생각하시면 채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존해 주고 우리 진(晉)나라와 동맹관계가 지속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찌 채나라 사람들만이 바라는 일이겠습니까?” 했다.
書末,宋齊各國大夫,俱署有名字。靈王覽畢笑曰:「蔡城旦暮且下,汝以空言解圍,以三尺童子待寡人耶?汝去回復汝君,陳蔡乃孤家屬國,與汝北方無與,不勞照管。」狐父再欲哀懇,靈王遽起身入內,亦無片紙回書。狐父怏怏而回。晉君臣雖則恨楚,無可奈何。正是:「有力無心空負力,有心無力枉勞心。若還心力齊齊到,涸海移山孰敢禁!」蔡洧回至蔡國,被楚巡軍所獲,解到公子棄疾帳前。棄疾脅使投降,蔡洧不從,乃囚於後軍。棄疾知晉救不至,攻城益力。歸生曰:「事急矣!臣當拼一命,逕往楚營,說之退兵。萬一見聽,免至生靈塗炭。」
편지의 끝에 송나라와 제나라 등 각국 대부들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었다. 초영왕이 보고 나서 웃으며 말하기를, “채나라 도성은 아침저녁에 함락될 것인데, 너희들이 포위를 풀라고 헛소리를 하니 과인을 삼척동자로 여기느냐? 너는 돌아가 너의 군주에게 진(陳)나라와 채나라는 초나라의 속국이 될 것이며, 너희들 북방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 나서지 말라고 전해라.” 했다. 호보가 다시 간절하게 청을 드리려고 했으나, 초영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궁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아무런 답장도 주지 않았다. 호보가 불만스럽게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진소공과 신하들은 초나라에 분노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야말로, “힘은 있으나 마음이 없으니 그 힘을 쓸 수가 없고, 마음이 있다 한들 힘이 없으니 그 노력이 헛되도다! 만약에 마음과 힘을 다 갖추고 있다면, 바다를 마르게 하고 산을 옮긴다 한들 누가 막겠는가?” 하는 것과 같았다. 채유가 채나라로 돌아왔으나 초나라 순찰병에게 잡혀서 공자 기질의 군막 앞으로 끌려갔다. 기질이 위협하여 투항을 권했으나 채유는 듣지 않았다. 그래서 후군에 갇히었다. 기질은 진(晉)나라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채나라 도성에 대한 공세를 더욱 세차게 했다. 공손 귀생이 말하기를, “사태가 급합니다. 신이 마땅히 목숨을 걸고 초나라 진영으로 가서 군사를 물리도록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을 받아들인다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했다.
世子有曰:「城中調度,全賴大夫,安可舍孤而去?」歸生對曰:「殿下若不相舍,臣子朝吳可使也。」世子召朝吳至,含淚遣之。朝吳出城往見棄疾,棄疾待之以禮。朝吳曰:「公子重兵加蔡,蔡知亡矣。然未知罪之在也。若以先君般失德,不蒙赦宥,則世子何罪?蔡之宗社何罪?幸公子憐而察之!」棄疾曰:「吾亦知蔡無滅亡之道,但受命攻城,若無功歸報,必得罪矣。」朝吳曰:「吳更有一言,請屏左右。」棄疾曰:「汝第言之,吾左右無妨也。」
세자 유(有)가 말하기를, “성안의 모든 일은 전부 대부에게 의지하는데 어찌 나를 버리고 가려고 하십니까?” 하니, 귀생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저를 보내지 않으시면 제 아들 조오(朝吳)가 사자로 갈 수 있습니다.” 했다. 세자 유가 조오를 불러 눈물을 머금고 보냈다. 조오가 성 밖으로 나가 공자기질을 만나니, 기질이 조오를 예로써 대했다. 조오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대군으로 채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채나라가 멸망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국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선군 반(般)이 부군을 시해한 실덕으로 용서받지 못해 죽었다면, 세자에게는 무슨 죄가 있으며, 또한 채나라의 종사에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부디 공자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헤아려 주십시오.” 하니, 공자 기질이 말하기를, “나 역시 채나라가 망해야 할 정도의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만 군왕의 명을 받들어 성을 공격할 뿐이라 만약에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반드시 죄를 얻을 것이오.” 했다. 조오가 말하기를, “이 조오가 따로 한 말씀 드리겠으니 주위 사람을 물리쳐 주십시오.” 하니, 기질이 말하기를, “그대는 그냥 말하시오. 내 주위 사람은 들어도 무방하오.” 했다.
朝吳曰:「楚王得國非正,公子寧不知之?凡有人心,莫不怨憤!又內竭脂膏於土木,外竭筋骨於干戈,用民不恤,貪得無厭,昔歲滅陳,今復誘蔡。公子不念君讎,奉其驅使,怨黷方作,公子將分其半矣!公子賢明著譽,且有『當璧』之祥,楚人皆欲得公子為君,誠反戈內向,誅其弒君虐民之罪,人心響應,誰能為公子抗者!孰與事無道之君,斂萬民之怨乎?公子倘幸聽愚計,吳願率死亡之餘,為公子先驅。」棄疾怒曰:「匹夫敢以巧言離間我君臣!本該斬首,姑寄汝頭於頸上,傳語世子,速速面縛出降,尚可保全餘喘也。」叱左右牽朝吳出營。
조오가 말하기를, “초나라 왕이 부정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공자께서 어찌 모르겠습니까? 무릇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망하고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또 나라 안으로는 토목공사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나라 밖으로는 전쟁에 백성들의 근골이 다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부리기만 하고 돌보지 않으며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지난해에는 진(陳)나라를 멸하더니 지금은 다시 채나라 군주를 유인하여 죽였습니다. 공자께서는 시해당한 주군의 원수를 갚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명을 받들어 남의 원한을 사는 더러운 짓만 하시니, 공자께서는 그 잘못의 반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현명하다고 소문났으며 또한 옛날에 벽옥 앞에 섰던 상서로움도 있어 초나라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실로 창끝을 안으로 돌려서, 부왕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괴롭힌 죄를 지은 초나라 왕을 주살한다면 백성들의 인심이 호응할 것이니 누가 능히 공자님을 대항하겠습니까? 무도한 임금을 섬기는 것과 백성들의 원한을 거두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공자께서 만일 저의 어리석은 계책을 들으신다면 이 오(吳)도 죽음에 처한 채나라 백성을 이끌고 공자님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했다. 공자 기질이 듣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필부가 감히 교묘한 말로 군신 간을 이간시키는구나! 마땅히 참수해야 하나 잠시 너의 목을 붙여 두겠으니 세자에게 빨리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성을 나와서 항복하여 목숨이나마 보전하라고 전해라!” 하고, 좌우에 소리 질러 조오를 진영 밖으로 끌어냈다.
原來當初楚共王有寵妾之子五人:長曰熊昭,即康王﹔次曰圍,即靈王虔﹔三曰比,字子干﹔四曰黑肱,字子晳﹔末即公子棄疾也。共王欲於五子之中,立一人為世子,心中不決,乃大祀群神,奉璧密禱曰:「請神於五人中,擇一賢而有福者,使主社稷。」乃以璧密埋於太室之庭中,暗記其處,使五子各齋戒三日後,五更入廟,次第謁祖。視其拜當璧處者,即神所選立之人矣。康王先入,跨過埋璧,拜於其前。靈王拜時,手肘及於璧上。子干子晳,去璧甚遠。棄疾時年尚幼,使傅母抱之入拜,正當璧紐之上。共王心知神佑棄疾,寵愛益篤。
원래 죽은 초공왕에게는 사랑하는 첩의 아들 다섯 명이 있었다. 맏이는 웅소(熊昭) 즉 강왕(康王)이고, 둘째는 공자 위(圍)로써 즉 영왕 웅건(熊虔)이며, 셋째는 자가 자간(子干)인 공자비(公子比)이고, 넷째는 자가 자석(子晳)인 흑굉(黑肱)이며, 막내가 바로 공자 기질(公子棄疾)이었다. 초공왕이 다섯 아들 중에 한 사람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마음속으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여러 조상신을 제사하는 큰 제사 때에 벽옥을 받들고 기도하기를, “원하옵건대 아들 다섯 중 현명하고 복이 있는 자 한 명을 택하여 사직의 주인이 되게 해 주옵소서!” 했다. 그리고 벽옥을 몰래 태묘의 뜰 안에 묻어 놓고 마음속으로 그 장소를 기억한 다음, 다섯 아들들을 각각 목욕재계한 3일 후 오경(새벽 4시쯤)에 태묘로 불러 순서대로 조상에게 참배하도록 했다. 벽옥이 묻혀 있는 곳에서 절을 올리는 아들이 곧 조상신이 선택하여 세자로 세울 사람이었다. 강왕 곧 웅소가 먼저 들어와 벽옥이 묻힌 곳을 지나쳐 조상 앞에서 절을 올렸다. 영왕 곧 웅건이 절을 할 때 그 손과 팔꿈치가 벽옥이 묻힌 자리에 미쳤다. 자간과 자석은 벽옥이 묻힌 곳에서 멀리 떨어졌다. 기질은 그때 나이가 아직 어려 보모가 안고 들어와 절을 올리게 했는데, 벽옥 끈 위에 엎드려 절을 했다. 초공왕은 마음속으로 조상신이 기질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여 기질을 더욱 사랑했다.
因共王薨時,棄疾年尚未長,所以康王先立,然楚大夫聞埋璧之事者,無不知棄疾之當為楚王矣。今日朝吳說及「當璧」之祥,棄疾恐此語傳揚,為靈王所忌,故佯怒而遣之。朝吳還入城中,述棄疾之語。世子有曰:「國君死社稷,乃是正理。某雖未成喪嗣位,然既攝位守國,便當與此城相為存亡,豈可屈膝讎人,自同奴隸乎?」於是固守益力。自夏四月圍起,直至冬十一月,公孫歸生積勞成病,臥不能起,城中食盡,餓死者居半,守者疲困,不能禦敵。楚師蟻附而上,城遂破。世子端坐城樓,束手受縛。
초공왕이 죽었을 때는 기질이 아직 장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강왕이 먼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 대부들은 벽옥을 묻은 일을 알고 초나라 왕이 될 사람은 기질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조오(朝吳)가 ‘당벽(當璧)’의 상서로움을 말하자 기질은 이 말이 퍼져서, 초영왕이 시기할까 두려워해서 거짓으로 화를 내는 체하며 조오를 쫓아내 버렸다. 조오가 다시 채나라 도성으로 돌아와 기질의 말을 전하자 세자 유가 듣고 말하기를, “나라의 군주는 사직과 함께 죽어야 하는 게 바른 도리입니다. 내가 비록 주군의 상을 치르지 못하고 아직 군위를 잇지 못했으나 섭정으로 나라를 지키니, 마땅히 이 성(城)과 존망과 같이 해야 하겠습니다. 어찌 원수에게 무릎을 꿇고 스스로 그의 노예가 되겠습니까?” 하고, 이에 성을 지키기에 더욱 힘썼다. 여름 4월에 포위가 시작되어 겨울 11월에 이르기까지 저항을 계속하다가, 공손 귀생은 피로가 쌓여 병이 들어 자리에 눕더니 결국은 일어나지 못했다. 성안의 식량이 다하여 굶어 죽은 사람이 반이나 됐다. 지키는 사람이 피곤하여 적을 막을 수가 없었다. 초나라 군사들이 개미떼 같이 성벽에 기어올라 마침내 채나라 도성이 함락되었다. 세자 유는 성루에 단정히 앉아 손이 묶였다.
棄疾入城,撫慰居民﹔將世子有上了囚車,并蔡洧解到靈王處報捷。以朝吳有當璧之言,留之不遣。未幾,歸生死,朝吳遂留事棄疾。此周景王十四年事也。時靈王駕已回郢,夢有神人來謁,自稱九岡山之神,曰:「祭我,我使汝得天下。」既覺大喜,遂命駕至九岡山。適棄疾捷報到,即命取世子有充作犧牲,殺以祭神。申無宇諫曰:「昔宋襄用鄫子於次睢之社,諸侯叛之。王不可蹈其覆轍!」靈王曰:「此逆般之子,罪人之後,安得比於諸侯?正當六畜用之耳。」申無宇退而嘆曰:「王汰虐已甚,其不終乎!」遂告老歸田,去訖。
공자 기질이 채나라 도성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세자를 함거에 실어 채유와 함께 끌고 가서 초영왕에게 승전을 보고하게 했다. 조오는 당벽(當璧)에 대한 말 때문에 머물러 두고 보내지 않았다. 얼마 후에 귀생이 죽고, 조오는 마침내 초나라 진영에 머물러 기질을 섬겼다. 이것은 주경왕 14년(즉 기원전 531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초영왕은 어가를 타고 영(郢)으로 이미 돌아왔다. 어느 날 꿈속에서 신인이 나타나 초영왕을 뵙고, 자칭 구강산(九岡山)의 신이라면서 말하기를. “나를 제사하면 내가 그대에게 천하를 얻게 해주겠다.” 했다. 초영왕이 잠에서 깨어나 크게 기뻐하며, 즉시 어가를 몰아 구강산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공자 기질이 보낸 승전보가 이르러 즉시 채나라 세자 유를 희생으로 삼아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신무우가 간하기를, “옛날에 송양공이 증자(鄫子)를 죽여 수수(睢水)의 물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자 제후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왕께서는 수레가 뒤집힌 자리를 밟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이 자는 부왕을 죽인 반(般)의 아들이다. 죄인의 자식인데, 어찌 제후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짐승을 대신해서 희생으로 쓰겠다.” 했다. 신무우가 물러 나와 한탄하기를, “왕의 포학이 이미 심하니 어찌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즉시 늙었다고 고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蔡洧見世子被殺,哀泣三日。靈王以為忠,乃釋而用之。蔡洧之父,先為靈王所殺,陰懷復讎之志,說靈王曰:「諸侯所以事晉而不事楚者,以晉近而楚遠也。今王奄有陳蔡,與中華接壤,若高廣其城,各賦千乘,以威示諸侯,四方誰不畏服?然後用兵吳越,先服東南,次圖西北,可以代周而為天子。」靈王悅其諛言,日漸寵用。於是重築陳蔡之城,倍加高廣,即用棄疾為蔡公,以酬其滅蔡之功。又築東西二不羹城,據楚之要害,自以天下莫強於楚,指顧可得天下。召太卜將守龜卜之,問:「寡人何日為王?」太卜曰:「君既已稱王矣,尚何問?」
채유는 세자 유가 피살되는 것을 보고, 3일을 통곡했다. 초영왕이 충신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석방하여 벼슬을 내렸다. 채유의 아버지 채략(蔡略)은 옛날 채나라 군주 반(盤)이 초영왕에게 유인되어 살해될 때 따라가 죽었으므로, 마음속으로 복수를 결심하고, 초영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제후들이 진(晉)나라를 받들고, 초나라를 따르지 않는 것은, 진나라는 가깝고 초나라는 멀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문득 진채(陳蔡) 두 나라를 얻게 되어 중원의 나라들과 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두 나라의 성을 높고 넓게 쌓고 각 성에 전차 천 대씩을 주둔시켜 위엄을 제후들에게 과시하면 사방에서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 오월(吳越)에 군사를 보내 먼저 동남쪽을 평정하고 다음에 서북을 도모한다면, 가히 주나라를 대신하여 천자가 될 것입니다.” 했다. 초영왕이 채유의 아첨하는 말에 기뻐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이에 진채(陳蔡)의 성을 증축하여 두 배나 높고 넓게 하고, 즉시 공자 기질을 채공(蔡公)에 봉하여 채나라를 멸한 공을 보상하였다. 또 동서로 두 개의 부갱성(不羹城)을 축성하고 초나라의 요해지로 삼아, 이로써 세상에서 초나라를 당할 나라는 없으며 손꼽아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초영왕이 태복을 불러 거북 껍데기로 점을 치라고 하면서 묻기를, “과인이 언제 왕이 되겠는가?” 하니, 태복이 말하기를, “주군께서는 이미 왕을 칭하시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왕을 묻습니까?” 했다.
靈王曰:「楚周並立,非真王也。得天下者,方為真王耳。」太卜爇龜,龜裂。太卜曰:「所占無成。」靈王擲龜於地,攘臂大呼曰:「天乎,天乎!區區天下,不肯與我,生我熊虔何用?」蔡洧奏曰:「事在人為耳,彼朽骨者何知。」靈王乃悅。諸侯畏楚之強,小國來朝,大國來聘,貢獻之使,不絕於道。就中單表一人,乃齊國上大夫晏嬰,字平仲,奉齊景公之命,修聘楚國。靈王謂群下曰:「晏平仲身不滿五尺,而賢名聞於諸侯。當今海內諸國,惟楚最盛,寡人欲恥辱晏嬰,以張楚國之威,卿等有何妙計?」
초영왕이 말하기를, “초나라와 주나라가 병립하였으니 진짜 왕은 아니다. 천하를 얻은 자가 진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니, 태복이 거북 등껍질을 구워서 갈라지게 했다. 태복이 말하기를, “점괘에 따르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했다. 초영왕이 거북 등껍질을 땅에 던지고 팔을 걷어붙이며 크게 외치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구구한 천하를 저에게 주지 않으면서 이 웅건을 태어나게 하여 어디에 쓸 것입니까?” 했다. 채유가 아뢰기를, “일이란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거북의 썩어빠진 뼈다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니, 이에 초영왕이 기뻐했다. 제후들은 초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작은 나라는 군주가 직접 오고, 큰 나라는 사절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려는 사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 사절 중에 제나라 상대부 안영(晏嬰)도 있었다. 안영은 자가 평중(平仲)이었다. 안영이 제경공의 명을 받들어 초나라에 수호 사절로 오게 되었다. 초영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안평중은 키가 다섯 자에 미치지 못하나 어진 이름이 제후들에게 알려져 있소. 지금 천하에서 초나라가 가장 강성한데, 과인이 안영을 욕보여 초나라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경들은 무슨 좋은 계책이 없소?” 했다.
太宰薳啟疆密奏曰:「晏平仲善於應對,一事不足以辱之,必須如此如此。」靈王大悅。薳啟疆夜發卒徒於郢城東門之傍,另鑿小竇,剛剛五尺,吩咐守門軍士:「候齊國使臣到時,卻將城門關閉,使之由竇而入。」不一時,晏嬰身穿破裘,輕車羸馬,來至東門。見城門不開,遂停車不行,使御者呼門。守者指小門示之曰:「大夫出入此竇,寬然有餘,何用啟門?」晏嬰曰:「此狗門,非人所出入也!使狗國者,從狗門入﹔使人國者,還須從人門入。」使者以其言,飛報靈王。王曰:「吾欲戲之,反被其戲矣。」乃命開東門,延之入城。
태재 원계강이 몰래 아뢰기를, “안평중은 상대방의 말에 응대를 잘하는 사람이니 한 가지 일로 그를 욕보이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이러저러해야 합니다.” 하니, 초영왕이 크게 기뻐했다. 원계강이 밤에 병졸들을 선발하여 영성(郢城) 동문 옆 성벽에 따로 겨우 다섯 자쯤의 조그만 구멍을 뚫고,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분부하기를, “제나라의 사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성문을 굳게 닫고, 그를 저 구멍을 통해 들어오게 해라.” 했다. 오래지 않아, 안영이 찢어진 갖옷을 입고 야윈 말이 끄는 가벼운 수레를 타고 영성의 동문에 도착했다. 영도의 성문이 열리지 않은 것을 보고 수레를 세우고, 마부를 시켜 문지기를 부르게 했다. 문지기가 조그만 문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대부께서는 저 구멍으로 출입하여도 여유가 있습니다. 어찌 구태여 문을 열겠습니까?” 하니, 안영이 말하기를, “저것은 개구멍이지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 아니다. 만일 개가 사는 나라라면 개 문으로 들어가겠지만, 만일 사람이 사는 나라라면 사람이 다니는 문으로 들어가야만 되겠다.” 했다. 그 말을 초영왕에게 전하니, 초영왕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희롱하려다가 도리어 우리가 그에게 희롱을 당했다.” 하고, 동문을 열어 그를 맞아들이라고 명했다.
晏子觀看郢都城郭堅固,市井稠密,真乃地靈人傑,江南勝地也。怎見得宋學士蘇東坡有詠《荊門》詩為證:「游人出三峽,楚地盡平川。北客隨南廣,吳檣開蜀船。江侵平野斷,風掩白沙旋。欲問興亡意,重城自古堅。」晏嬰正在觀覽,忽見有車騎二乘,從大衢來,車上俱長軀長鬣,精選的出色大漢,盔甲鮮明,手握大弓長戟,狀如天神,來迎晏子,(欲以形晏子之短小。)晏子曰:「今日為聘好而來,非為攻戰,安用武士!」叱退一邊,驅車直進。將入朝,朝門外有十餘位官員,一個個峨冠博帶,濟濟彬彬,列於兩行。
안자(안영)가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성곽이 견고하고 거리는 조밀하여 참으로 땅의 영령이 인걸이 되는, 강남의 빼어난 곳이었다. 어떻게 알겠는가. 송나라 학사 소동파가 지은 《형문(荊門)》시가 증거가 된다. “나그네가 장강 삼협을 나서니, 초나라 땅은 모두 평평한 하천이다. 북쪽의 손님들은 남쪽의 넓은 땅으로 모여들고, 오나라의 돛배는 서촉으로 향한다. 강물은 흘러 평야을 가르고, 바람은 백사장을 맴도는데, 흥망의 뜻을 물으려 하니, 겹겹의 성은 옛날부터 견고하구나.” 했다. 안영이 풍물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차 두 대가 큰길을 따라 달려왔다. 전차 위에는 뽑아서 보낸 덩치가 크고 수염을 길게 기른 사내들이 투구와 갑옷을 선명하게 입고 손에는 큰 활과 긴 창을 잡고 마치 천신과 같이 안영을 맞이했다. (그것은 체구가 작은 안영을 드러내려는 수작이었다.) 안자가 말하기를, “오늘 내가 초나라에 사절로 온 것은 서로 싸우러 온 것이 아닌데, 어찌 무사들을 쓴단 말인가?” 하고, 소리쳐 한쪽으로 물러서게 하고 마차를 몰아 곧바로 나아갔다. 이윽고 안영이 초나라 조정에 도착하자, 조문 밖에 십여 명의 관원이 사람마다 모두 높은 관에 넓은 띠를 두른 쟁쟁한 인재들인데, 두 줄로 열을 지어 서 있었다.
晏子知是楚國一班豪傑,慌忙下車。眾官員向前逐一相見,權時分左右敘立,等候朝見。就中一後生,先開口問曰:「大夫莫非夷維晏平仲乎?」晏子視之,乃鬥韋龜之子鬥成然也,官拜郊尹。晏子答曰:「然。大夫有何教益?」成然曰:「吾聞齊乃太公所封之國,兵甲敵於秦楚,貨財通於魯衛。何自桓公一霸之後,篡奪相仍,宋晉交伐,今日朝晉暮楚,君臣奔走道路,殆無寧歲?夫以齊侯之志,豈下桓公,平仲之賢,不讓管子,君臣合德,乃不思大展經綸,不振舊業,以光先人之緒,而服事大國,自比臣僕,誠愚所不解也。」
안자는 그 사람들이 초나라의 호걸들이라는 것을 알고 황망히 수레에서 내렸다. 관원들이 앞으로 와서 일일이 서로 인사한 후에 잠시 좌우로 나누어 서서 조현(朝見)을 기다렸다. 그사이에 한 젊은이가 안영에게 묻기를, “대부께서는 이유(夷維) 땅의 안평중이 아니십니까?” 했다. 안자가 보니 그 사람은 투위구(鬪韋龜)의 아들 투성연(鬪成然)이었다. 그의 벼슬은 교윤(郊尹)이었다. 안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대부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실는지요?” 하니, 투성연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제나라는 태공께서 봉해진 나라라 군사는 진(秦)나라와 초나라와 겨룰만하고 재화는 노(魯)와 위(衛) 두 나라에서 유통될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환공(齊桓公)께서 한번 패업을 이룬 뒤에는 그 후손들이 서로 군위를 찬탈하고 송나라와 진(晉)나라가 번갈아서 정벌을 하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아침에는 진(晉)나라 저녁에는 초나라를 섬기느라 군신들이 분주히 도로를 오가서 거의 편안할 날이 없게 되었습니까? 대저 제나라 군주의 포부는 환공에 못지않고, 안평중의 현명함은 관중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군주와 신하가 힘을 합하여 경륜을 크게 펼칠 생각을 하지 않고 옛날의 업적을 떨쳐서 선인들의 전통을 빛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국에 복종하여 받들며 스스로 신하라고 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했다.
晏子揚聲對曰:「夫識時務者為俊傑,通機變者為英豪。夫自周綱失馭,五霸迭興,齊晉霸於中原,秦霸西戎,楚霸南蠻,雖曰人材代出,亦是氣運使然。夫以晉文雄略,喪次被兵﹔秦穆強盛,子孫遂弱﹔莊王之後,楚亦每受晉吳之侮﹔豈獨齊哉?寡君知天運之盛衰,達時務之機變,所以養兵練將,待時而舉。今日交聘,乃鄰國往來之禮,載在王制,何謂臣僕?爾祖子文,為楚名臣,識時通變,倘子非其嫡裔耶?何言之悖也。」成然滿面羞慙,縮頸而退。
안자가 소리를 높여 대답하기를, “무릇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을 준걸이라 하고, 기회와 변화에 따라 일을 성취하는 사람을 영웅호걸이라 합니다. 주나라가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자 다섯 패자(霸者)가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제나라와 진(晉)나라는 중원에서 패업을 이루었고 진(秦)나라는 서융에서 패업을 이루었으며, 초나라는 남만에서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비록 인재가 이어서 일어났지만 그것은 천지의 기운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대저 진문공(晉文公)은 웅대한 지략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가 죽자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졌으며, 진목공(秦穆公)은 강성했지만 그 자손들은 미약해졌으며, 초장왕의 후손들 역시 진(晉)나라와 오나라로부터 수모를 받고 있습니다. 어찌 홀로 제나라만 그렇겠습니까? 저희 군주께서는 천운의 성쇠를 알고 계시며, 시무의 요체와 변화에 달통하여 군사를 기르고 장수들을 훈련하며 때가 되면 포부를 펴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친선사절을 서로 교환하여 이웃 나라에 왕래하는 예의는 천자가 정한 법도이니 어찌 신하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조부 자문(子文)은 초나라의 이름난 신하여서 시무를 알고 변화에 통한 분이었습니다. 그대는 혹시 그의 적손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어찌 그런 거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했다. 투성연이 얼굴 가득히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목을 움츠리며 물러갔다.
須臾,左班中一士問曰:「平仲固自負識時通變之士,然崔慶之難,齊臣自賈舉以下,效節死義者無數,陳文子有馬十乘,去而違之,子乃齊之世家,上不能討賊,下不能避位,中不能致死,何戀戀於名位耶?」晏子視之,乃楚上大夫陽匄字子瑕,乃穆王之曾孫也。晏子即對曰:「抱大節者,不拘小諒﹔有遠慮者,豈固近謀?吾聞君死社稷,臣當從之。今先君莊公,非為社稷而死﹔其從死者,皆其私暱。嬰雖不才,何敢廁身寵幸之列,以一死沽名哉?且人臣遇國家之難,能則圖之,不能則去之。吾之不去,欲定新君,以保宗祀,非貪位也。使人人盡去,國事何賴?況君父之變,何國無之?子謂楚國諸公在朝列者,人人皆討賊死難之士乎?」
잠시 후에 왼쪽 반열에서 한 사람이 묻기를, “안평중은 스스로 시무를 알고 변화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최저와 경봉의 변란에 제나라 신하 가거(賈擧) 이하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절의를 지키고 진문자(陳文子; 陳須無)는 말과 수레 열 대도 버리고 나라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제나라의 대대로 내려온 집안이면서 위로는 능히 역적들을 토벌하지도 못하고 아래로는 벼슬을 버리고 몸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목숨을 끊지도 않았으니 그것은 그대가 벼슬에 연연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안자가 보니 그 사람은 초나라의 상대부 양개(陽匄)였다. 자는 자하(子瑕)라 하고 곧 목왕의 증손이었다. 안자가 즉시 대답하기를, “큰 절개를 품고 있는 자는 사소한 진실에 구애되지 않으며, 먼 앞의 일을 걱정하는 자가 눈앞의 일에 매달리겠습니까? 내가 들으니 군주가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는 마땅히 그 뒤를 따라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선군이신 초장공께서 사직을 위하다가 돌아가신 것이 아닌데, 그때 따라 죽은 사람들은 모두 사사로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안영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감히 몸을 측간 곁에 두어 총신의 대열에 서서 목숨을 바쳐 그 이름을 사겠습니까? 이 사람은 신하된 자로써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 때 능히 능력이 있으면 남아서 위난을 극복하고 능력이 없으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새 군주를 정하고 종묘사직을 보전하자고 함이었지, 벼슬을 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위난에 처해 있는데 사람마다 모두 가버린다면 나라의 일은 누가 처리할 수 있으며, 더욱이 군주가 바뀌는 변란은 어느 나라엔들 없겠습니까? 그대는 초나라 조정에 서 있는 대신들이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역적을 토벌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했다.
這一句話,暗指著楚熊虔弒君,諸臣反戴之為君,但知責人,不知責己。公孫瑕無言可答。少頃,右班中又一人出曰:「平仲!汝云『欲定新君,以保宗祀』,言太誇矣。崔慶相圖,欒、高、陳、鮑相并,汝依違觀望其間,並不見出奇畫策,無非因人成事。盡心報國者,止於此乎?」晏子視之,乃右尹鄭丹字子革。晏子笑曰:「子知其一,未知其二。崔慶之盟,嬰獨不與。四族之難,嬰在君所。宜剛宜柔,相機而動,主於保全君國,此豈旁觀者所得而窺哉?」左班中又一人出曰:「大丈夫匡時遇主,有大才略,必有大規模。以愚觀平仲,未免為鄙吝之夫矣。」晏子視之,乃太宰薳啟疆也。
이 한마디는 은연중에 지금 초영왕 웅건이 어린 임금을 죽였으나 오히려 여러 신하가 그를 초왕으로 추대한 일을 가리키며, 단지 남의 잘못만을 알며 자기들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을 나무란 것이었다. 공손 하(양개)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오른쪽 반열에서 다시 한 사람이 나와서 말하기를, “평중! 그대가 말하기를 ‘새 군주를 정하고 종묘사직을 보전하고자 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너무 과장한 말이 아닌가? 최저와 경봉이 작당하여 변란을 일으키고 또 난(欒), 고(高), 진(陳), 포(鮑)씨가 서로 싸울 때 그대는 그 사이에서 우물쭈물 관망만 했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힘으로 일을 이룬 게 아닌가? 온 마음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데 그쳤소?” 했다. 안자가 보니 그는 우윤(右尹) 정단(鄭旦)으로 자를 자혁(子革)이라고 했다. 안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최저와 경봉이 같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이 안영은 홀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소. 네 가문의 사람들이 서로 싸울 때 이 안영은 우리 군주 곁에 있었소. 혹은 강하게 혹은 부드럽게 대처하여 기회를 보아 움직여 군주와 나라를 보전하는 데 주력했으니, 이것이 어찌 방관했던 사람이 엿보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겠소?” 했다. 그러자 왼쪽 반열에서 또 한 사람이 나와 말하기를, “대장부가 시국을 바로잡고 주군을 잘 모시려면 큰 재주와 지략을 갖추고 반드시 규모가 커야 하거늘 이 어리석은 사람이 안평중을 보기에는 한낱 인색한 사람에 불과하오!” 했다. 안자가 보니 그는 태재 원계강이었다.
晏子曰:「足下何以知嬰鄙吝乎?」啟疆曰:「大丈夫身仕明主,貴為相國,固當美服飾,盛車馬,以彰君之寵錫。奈何敝裘羸馬,出使外邦,豈不足於祿食耶?且吾聞平仲,少服狐裘,三十年不易。祭祀之禮,豚肩不能掩豆,非鄙吝而何?」晏子撫掌大笑曰:「足下之見,何其淺也!嬰自居相位以來,父族皆衣裘,母族皆食肉,至於妻族,亦無凍餒。草莽之士,待嬰而舉火者,七十餘家。吾家雖儉,而三族肥,身似吝,而群士足。以此彰君之寵錫,不亦大乎?」
안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 안영을 인색한 사람이라고 하십니까?” 하니, 원계강이 말하기를, “대장부는 밝은 임금을 모시고 상국이 되어 귀하게 되면 당연히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거마를 장식하여 군주에게 받은 은혜를 널리 알려야 됩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찌하여 헤어진 갖옷을 입고 여윈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사신으로 외국에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것은 녹봉이 충분하지 않아서입니까? 또 내가 들으니 안평중이라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입기 시작한 갖옷을 30년이 되어도 바꾸지 않고, 제사를 지낼 때 돼지 다리 하나도 제사상에 올리지 못하게 한다니, 이것은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닙니까?” 했다. 안자가 박장대소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식견이 어찌 그리 천박합니까? 이 안영은 제나라 재상의 자리에 앉은 이래로 우리 안씨 족속들에게 모두가 갖옷을 입게 하였고, 외가 쪽에는 모두 고기를 먹게 했으며, 또한 처족에 이르기까지 춥고 배고프지 않게 했습니다. 민간의 선비들 중에도 이 안영을 기다려서 횃불을 들 사람들이 칠십여 호나 있습니다. 우리 집은 비록 검소하나 삼족(부·모·처족)들은 모두가 풍족하게 살고 있으며, 내 몸에는 아끼지마는 여러 선비는 흡족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군주의 은혜를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言未畢,右班中又一人出,指晏子大笑曰:「吾聞成湯身長九尺,而作賢王﹔子桑力敵萬夫,而為名將。古之明君達士,皆由狀貌魁梧,雄勇冠世,乃能立功當時,垂名後代。今子身不滿五尺,力不勝一雞,徒事口舌,自以為能,寧不可恥!」晏子視之,乃公子真之孫,囊瓦字子常,見為楚王車右之職。嬰乃微微而笑,對曰:「吾聞秤錘雖小,能壓千斤﹔舟漿空長,終為水役。僑如身長而戮於魯,南宮萬絕力而戮於宋,足下身長力大,得無近之?嬰自知無能,但有問則對,又何敢自逞其口舌耶?」囊瓦不能復對。
안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오른쪽 반열에서 한 사람이 나오더니 안영을 가리키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성탕(成湯)은 키가 아홉 자로 어진 임금이 되었고, 진(秦)나라의 자상(子桑;公孫枝)은 힘이 만 명의 사내를 감당할 수 있어서 명장이 되었소. 옛날의 명군이나 이치에 밝은 선비들은 모두가 신체가 큼직하고, 빼어난 용기는 세상에 제일이었으며, 당시에 능히 공을 세우고 후대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지금 그대의 키는 다섯 자가 되지 않고, 힘은 닭 한 마리도 잡지 못할 정도인데 헛되이 입으로 스스로 능하다고 하니 정녕 부끄러운 줄 모르시오?” 했다. 안자가 보니, 그 사람은 공자 진(公子眞)의 손자인 낭와(囊瓦)로 자를 자상(子常)이라고 했다. 그는 초영왕의 차우장군 직책을 맡고 있었다. 안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저울추는 비록 작으나 능히 천근을 누르며, 배의 삿대는 헛되이 길지만 끝내 물일을 합니다. 숙손교여(叔孫僑如)는 키가 컸지만 노나라에서 죽임을 당했고, 남궁만(南宮萬)은 힘이 빼어났으나 송나라에서 죽임을 당했소. 그대도 키가 크고 힘이 세니 그들과 비슷하게 되지 않겠소? 이 안영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알고 있으나, 다만 묻기에 대답할 뿐이며, 어찌 내가 감히 변설로 자부하겠소?” 하니, 낭와가 다시 대답하지 못했다.
忽報:「令尹薳罷來到。」眾人俱拱立候之。伍舉遂揖晏子入於朝門,謂諸大夫曰:「平仲乃齊之賢士,諸君何得以口語相加?」須臾,靈王升殿,伍舉引晏子入見。靈王一見晏子,遽問曰:「齊國固無人耶?」晏子曰:「齊國中呵氣成雲,揮汗成雨,行者摩肩,立者並跡,何謂無人?」靈王曰:「然則何為使小人來聘吾國?」晏子曰:「敝邑出使有常典,賢者奉使賢國,不肖者奉使不肖國,大人則使大國,小人則使小國。臣小人,又最不肖,故以使楚。」楚王慙其言,然心中暗暗驚異。使事畢,適郊人獻合歡橘至,靈王先以一枚賜嬰,嬰遂帶皮而食。
갑자기 보고하기를, “영윤 원파(薳罷)께서 오십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손을 모으고 서서 그를 기다렸다. 곧 오거가 원파와 같이 조문을 들어오더니 안자에게 읍을 하고, 여러 대부에게 말하기를, “안평중은 제나라의 어진 선비인데 여러분은 어찌하여 쓸데없는 말로써 무례를 범하십니까?” 했다. 잠시 후 초영왕이 전당에 오르자, 오거가 안자를 인도하여 초영왕을 접견하게 했다. 초영왕이 안자를 한번 보더니 갑자기 묻기를, “제나라에는 본디 사람이 없는가?” 하니, 안자가 말하기를, “제나라에는 사람들이 숨을 쉬면 구름이 되고 땀을 뿌리면 비가 됩니다. 길을 걸으면 어깨가 부딪치고 서 있으면 서로 발자취를 밟게 될 정도로 사람이 많은데 어찌 사람이 없다 하십니까?” 했다. 초영왕이 말하기를,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같이 작은 사람을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가?” 하니, 안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사신을 보낼 때 적용하는 법이 있습니다. 어진 사람은 어진 나라에, 불초한 사람은 불초한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대인은 대국에 소인은 소국에 사신으로 보냅니다. 신은 소인이며 또한 가장 불초한 사람이라 초나라에 사신으로 왔습니다.” 했다. 초영왕이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마음속으로 놀라기도 하였다. 접견 의식이 끝나자 마침 성밖에 사는 백성이 합환귤(合歡橘)을 바쳤다. 초영왕이 먼저 귤 한 개를 안영에게 주었다. 안영이 곧 껍질째 귤을 먹었다.
靈王鼓掌大笑曰:「齊人豈未嘗橘耶?何為不剖?」晏子對曰:「臣聞『受君賜者,瓜桃不削,橘柑不剖。』今蒙大王之賜,猶吾君也,大王未嘗諭剖,敢不全食?」靈王不覺起敬,賜坐命酒。少頃,武士三四人,縛一囚從殿下而過。靈王遽問:「囚何處人?」武士對曰:「齊國人。」靈王曰:「所犯何罪?」武士對曰:「坐盜。」靈王乃顧謂晏子曰:「齊人慣為盜耶?」晏子知其故意設弄,欲以嘲己,乃頓首曰:「臣聞『江南有橘,移之江北,則化而為枳。』所以然者,地土不同也。今齊人生於齊,不為盜,至楚,則為盜,楚之地土使然,於齊何與焉?」
초영왕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제나라 사람들은 어찌 귤을 맛보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껍질도 벗기지 않는가?”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신은 듣기에 ‘군주로부터 하사받은 참외나 복숭아는 깎지 않으며 귤은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내리신 귤은 저의 군주가 하사하신 것과 같습니다. 대왕께서 저에게 껍질을 까서 먹으라고 하지도 않으셨는데 감히 모두 먹지 않겠습니까?” 했다. 초영왕은 모르는 사이에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서 안영에게 자리를 권하고 술을 내오게 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얼마가 지나자 무사 서너 명이 포승줄에 묶인 죄수 한 사람을 끌고 전당 밑을 지나갔다. 초영왕이 갑자기 무사들에게 묻기를, “죄수는 어디 놈이냐?” 하니, 무사가 대답하기를, “제나라 사람입니다.” 했다. 초영왕이 말하기를, “무슨 죄를 지었느냐?” 하니, 무사가 대답하기를, “남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했다. 초영왕이 안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제나라 사람들은 다 도적질하는 버릇이 있는가?” 했다. 안자는 그 말이 일부러 조롱하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짐작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강남의 귤나무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변화하여 탱자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은 토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서 살 때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으나 초나라에 와서 도둑이 되었습니다. 초나라의 풍토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지, 제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했다.
靈王嘿然良久,曰:「寡人本將辱子,今反為子所辱矣。」乃厚為之禮,遣歸齊國。齊景公嘉晏嬰之功,尊為上相,賜以千金之裘,欲割地以益其封,晏子皆不受。又欲廣晏子之宅,晏子亦力辭之。一日,景公幸晏子之家,見其妻,謂晏子曰:「此卿之內子耶?」嬰對曰:「然。」景公笑曰:「嘻!老且醜矣!寡人有愛女,年少而美,願以納之於卿。」嬰對曰:「人以少姣事人者,以他年老惡,可相託也。臣妻雖老且醜,然向已受其託矣,安忍倍之?」景公嘆曰:「卿不倍其妻,況君父乎?」於是深信晏子之忠,益隆委任。
초영왕이 한참 말없이 있다가 말하기를, “과인이 본시 경을 욕보이려고 했으나 지금 도리어 경에게 욕을 당했소.” 하고, 이에 안영에게 예를 다하여 제나라로 돌려보냈다. 제경공은 안영의 공로를 높이 사서 그의 벼슬을 상상(上相)으로 높이고 천금의 갖옷과 땅을 떼어 안영의 봉읍을 넓혀 주려고 했지만, 안자는 모두 받지 않았다. 또 안자의 집을 크게 넓혀 주려 했지만 안자는 역시 굳이 사양하였다. 하루는 제경공이 안자의 집에 갔다가 그의 처를 보고 나서 안자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경의 아내요?”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 참으로 늙고 못 생겼소! 과인에게 사랑하는 딸이 있는데 나이가 젊고 예쁘오. 경에게 시집을 보내도록 하겠소.”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여인이 젊어서 아름다울 때 한 남편만을 섬기는 이유는 그녀가 늙고 추해졌을 때 남편에게 의지하고자 해서입니다. 신의 처가 비록 늙고 추하지만 옛날에 이미 나를 섬겨서 그 부탁을 받았으니 어찌 차마 그녀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제경공이 듣고 탄식하기를, “경이 아내를 버리지 않은데 하물며 그 임금을 버리겠소?” 했다. 이에 안자의 충성을 깊이 믿어서 더욱 융숭하게 정사를 맡겼다.
要知後事,且看下回分解。
뒷 이야기를 알고 싶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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