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68)
죽변도서관
책 만 권을 한꺼번에 펼친 바다가
기슭의 파란까지 덮어버렸으니
일몰 이후에나 대출된다는 밤바다는
평생을 새겨도 독해 버거운
비장의 어둠일까, 이 도서관의 장서려니
갈피나 지피려고 주경야독한다는
어부들의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일생을 기대 읽는 창窓이야
시인의 일과처럼 갈짓자 행보지만
알다가도 모를 달빛을 지표 삼아
어둠으로 안내하는 사서의 직업이란
그다지 참견할 일이 못 된다
다만 그 일로 한두 시간 끙끙거리려고
삐꺽대는 목조 계단을 밟고 오른다
이 도서관이 대출하는 장서라면
파도 한 단락조차 내게는 벅찰 것이니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등대를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겠다
- 김명인(1946- ),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문학과지성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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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제 “도서관”이었겠습니다. 제 살던 곳이 아니었지만 틈만 나면 들르던 제 정성으로 치자면 제 동네나 다름없었겠습니다. “나 돌아가리 돌아가 포장마차에서/다정한 친구와 술 한 잔 걸치리 만성체증으로/더부룩한 속 단숨에 가라앉히는 비린/바다내음”(졸시 「나 돌아가리」 부분) 이미 돌아간 곳에서 돌아가겠다고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은 죽변 바다를 마당으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친구의 즉흥 때문이었겠습니다. 이후에 <항구 야경>이라는 제목의 연작으로 이어진 첫이었을 작품의 제목을 묻는 내게 잠시 뜸을 들인 친구는 이렇게 읊조렸겠습니다. ‘포장마차 쉬고(,) 술 한잔, 다시(-) 죽변항’. 돌아가기는 했어도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이 나서 월요일 아침이면 몇 산을 넘어갔다가 주말에야 다시 넘어오는 미심쩍은 행보도 한몫했겠지만, 뒤늦게라도 친구의 즉흥이 월요일 이른 새벽길에 노래로 터진 건 제 동네처럼 드나들었던 한때가 어쩌다가가 아니어서였겠습니다. 절실해서였겠습니다. “책 만 권을 한꺼번에 펼친 바다가/기슭의 파란까지 덮어버렸으니”. 눈앞에 이미 윤슬이 반짝거려서였겠습니다. 심중에 가득 그림이 꽉 차 넘쳐서였겠습니다. 일행들을 이끌고 저 아래 방파제쯤에서부터 올랐을 언덕을 다 오른 시인은 오른편에 있는 화가의 화실을 지나쳤겠습니다. 지나쳐, “오늘 밤에도 누군가”가 “켜고 앉아” “첩첩 어둠을 읽고 있”을 왼편 “등대” 아래의 그 “삐꺽대는 목조 계단”을 밟았겠습니다만, 어쩌면 시가 된 “장서”는 한때의 독자가 먼저 올라 “대출”했겠습니다. (20241030)
첫댓글 재밌는 시 산책을 해 주셨네요.
바다가 만권당이고 사서가 있고 책 대출이 이루어지는 재밌는 바다 도서관이란 인생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