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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상식들... ◀ 스크랩 18세기 조선은 얼마나 가난했나? (중국, 일본과 비교)
상심 추천 0 조회 61 14.11.25 17: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과 중국의 비교

 

식생활

청나라 :  외진 마을의 가난한 집이라도 보통 여러 칸 크기의 광을 소유하고 있고 그 안에는 여러 가마니의 곡식을 저장하고 있다. (박제가 북학의)

 

조선 : 백성들 중 하루 2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집은 10가구 중 1~2가구에 불과하다. 

구황작물로 비축해놓은 곡식이라곤 옥수수 몇자루와 마늘 수십개가 전부다. (박제가 북학의)

 

 

 

의복 수준

청나라 :  중국의 백성들은 대부분 비단옷을 입고 담요에서 잠을 자고 침상과 탁자를 구비해 놓고 산다. 

농사꾼이라도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박제가 북학의)

 

조선 : 농부들은 1년에 무명옷 한벌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나서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살아간다.

아이들은 겨울에도 벌거숭이가 되기 일쑤고 신발도 신지 못한다. 한둘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다. (박제가 북학의)

 

 

 

주거 수준

청나라 : 일반 백성이 사는 집들은 모두 하나 같이 크고 반듯한 벽돌로 지어졌다. (박지원 열하일기)

 

조선 :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초가집이 대부분인 백성들의 집은 무너지기 쉽고 불에 타기 쉽다. 

조선도 하루 빨리 벽돌을 널리 활용해야 될 것이다.

온돌의 경우 잘못된 설계 때문에 땔감의 낭비가 심하고 고루 따뜻하지 못하며 연기가 아궁이 밖으로 거꾸로 나오기 일쑤다.  (박지원 열하일기)

 

 

여인들의 생활

청나라 : 변방의 시골여자라도 얼굴에 분가루를 바르고 머리에는 꽃장식을 하고 긴옷에 수를 놓은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박제가 북학의)

 

조선 : 젊은 여자도 맨발로 다니기 일쑤요 그 행색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새옷이라도 걸치는 날에는 혹시 기생이 되지 않았나 의심부터 한다. (박제가 북학의)

 

 

상업·유통업 수준

청나라 : 아무리 변방 오지의 첩첩산중이라도 수레가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런 이유로 유통업이 발전하고 백성들은 재산이 풍족해질 수 있다. (박지원 열하일기)

 

조선 : 경상도 사람들은 새우를 모르고 평안도 사람들은 감과 감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한다.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 정어리를 거름으로 줄 정도로 흔하지만 한양 사람들은 구경도 할 수도 없다. 

이 모든 이유가 수레가 없기 때문이다. (박지원 열하일기)

 

 

촌락의 발달 정도

청나라 : 중국은 도시와 시골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양자강 이남 오촉민월과 같은 외딴 시골 동네만 하더라도 번화한 도회지에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한다.  (박제가 북학의)

 

 

조선 : 도성에서 몇 리 밖으로만 나가도 시골티가 물씬난다. 

재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여 물자가 부족하고

학문은 과거시험만을 위해 존재하고 일반 백성들은 견문을 넓힐 방도가 전혀 없고 재능을 발견하고 식견을 트이게 할수도 없다. (박제가 북학의)

 

 

 

조선과 일본의 비교 : 조선 통신사, 김인겸의 저서 '일동장유가'

 

1764년 1월 22일 오사카

100만채는 있다고 생각되는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굉장하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의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사치스러움은 비정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40 km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의 10000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2천년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1764년 1월 28일 쿄토

발전도에 있어서는 오사카에는 미치지 않는다.

그래도 왜왕이 사는 수도로서 매우 사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산의 모습은 장엄하고 강은 평야를 둘러싸고 흐르고 비옥한 농지가 광할하게 퍼져 있다.

이 풍부한 낙원을 왜인이 소유하고 있다.

분하다.

분하다.

이 개와 같은 왜인을 모두 소탕하고 싶다.

 

이 토지를 조선의 영토로 하고, 조선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

 

 

1764년 2월 3일 나고야

거리의 번영, 아름다움은 오사카와 같다.

굉장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인구가 많음, 토지의 풍부함, 가옥의 사치스러움 등은

중국의 중심지에도 없는 풍경이다.

사람들의 용모도 아름답다.

특히 여성이 아름답다.

나고야의 미인이 길을 걷는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 일원은 나고야의 미인을 한 명도 놓칠세라 머리를 좌우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1764년 2월 16일 에도(도쿄)

좌측에는 집이 줄지어 있고 우측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비옥한 토지가 광할하게 퍼지고 있다.

누각이나 저택의 사치스러움, 사람들의 활기참, 남녀의 화려함, 성벽의 아름다움, 교량과 배

모두가 오사카와 같이 뛰어나다.

이 훌륭함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나고야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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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가 살던 당시까지 조선 사회는 외국 문화에 대해서는 굳게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고, 지식인들은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풍조 속에서 공리공론만 일삼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정작 백성들의 현실은 외면하고 있었다. 박제가는 북경 사행을 통해 당시 조선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정리해서 이 책을 지었다. 《북학의》에 논술된 국내상업 및 외국무역의 장려, 수입금지, 수출장려, 은의 해외 유출 금지, 물가의 평준화, 대량생산, 제품 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의 강화 등에 대한 견해는 근대 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사상과 경향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학의》의 서문을 지은 서명응은 "이 책이 채택되어 현실에서 쓰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녕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조정에서 모범이 될 책을 편찬할 때에 저 솔개 개미가 미래를 예견하는 구실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며 이 책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고, 저자의 스승이었던 박지원도 서문을 통해 저자의 적극적인 북학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북학의》는 이후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에서 하나의 시대 사상으로서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 박제가 말고도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 '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 그룹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청 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사회의 문을 열어 이용후생을 통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부국을 외쳤다. 건축 자재로서 벽돌을 사용할 것과 교통 수단으로서 수레와 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것, 비활동적이었던 한복을 개량하고 대외 무역을 확대하자는 이들의 사상 배경에는 당시 사농공상으로 서열화되어 있던 직업의 귀천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상공업을 진흥시키자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박제가는 지나치게 중국 문명을 찬양한 나머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 감각을 규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이후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그만 조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자기는 너무 거칠다"(자瓷편), "우리 나라는 1천 호가 사는 마을에서도 반듯해서 살 만한 집이 한 채도 없다"(궁실宮室편), "우리 나라의 의술은 정말 믿을 수 없다"(약藥편) 등, 《북학의》곳곳에는 중국 문화에 대한 칭찬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 나열되어 있는데, 조선에 대해 거의 일방적이기까지 한 비하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조선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로까지 비약된다. 더욱이 "본래 사용하는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만 '오랑캐'라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1]고까지 외치는 대목에서는 '북학의 선구자'로서뿐 아니라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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