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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고석(계속)
<백암산> 1984년 박고석作 캔버스에 유채 50×60.6cm
“이중섭 선생이 전쟁 때 부산 저희 집에 와 계셨어요. 추워서 땔감이 없어 불을 못 때는데, 박(고석)선생이 ‘양심 있는 인간이면 중섭이 방에 연기라도 내보라우’ 하며 버럭 화를 내요. 형편도 모르고 화부터 내는 남편이 미워 이 선생이 먹다버린 땅콩껍질, 가족에게 쓰다 구긴 편지, 은박지 그림들을 쓸어모아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폈지요. 그림까지 태우는 건 아니었는데, 지금도 그게 늘 죄스러워요.”
<용두암> 1986년 박고석作 캔버스에 유채 50×60.6cm
박고석의 아내 김순자는 남편을 “몽골에서 온 손님”이라고 했다. 살림 쪼들리는 줄 모르고 동료 화가들만 챙기니, “태생은 평양인데 먼 나라에서 온 사람마냥 물정모르는 남자”였다는 뜻이다. “장욱진, 한묵, 이중섭 선생까지 다 모이면 남편이 ‘술 받아 오라우!’ 해요. 외상값이 많아 겨우 사정해서 노란 알루미늄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오면 내 고무신에 술을 따라서는 취하도록 마셨지요. 오드리 헵번 타령들을 하면서요. 얼마나 약이 오르는지. 지금 생각하면 별세계에서 살았던가 싶어요(웃음).”
<울산 바위> 1992년 박고석作 캔버스에 유채 65.1×100cm
건축가 김수근의 누나로, 이화여대를 나오고도 그림 그리는 남편을 위해 도시락 장사도 마다하지 않던 아내 김순자는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도 산에서 살던 때”라고 했다. “남편 말년에 설악산에 들어가 2년 살았어요. 평생 살면서도 손님이지 내 남편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그땐 정말 행복했어요. 온전히 내 사람이었으니까요.”
박고석 사진 앞에 김순자 여사가 서있다.
*이기진 왈
위에서부터 찬찬히 읽어내려오다가
미술계에서 이중섭의 존재감도 엿볼 수도 있었고 순종하는 조선의 아내 스토리를 읽고는 어떤 분일까 생각을 했는데 철윤이가 친절하게도 사진까지 올려줬네.(幸せ)
...
모두들 참 모진 세월을 잘 견뎌왔다.
더이상은 그런 험한 시절을 후대에 남겨서는 안될텐데...
☆ 이성자(李聖子 1918~2009)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現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가 유화, 목판화를 비롯해 도자기 등 모든 조형작품에 동양적 향취와 이미지를 담은 방대한 규모의 작품을 꾸준히 제작, 한국적 사상과 시정을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 속에 합류시키는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는 물론 세계전역에 걸쳐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혀온 원로이다. 진주시 충무공동에 이성자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눈덮힌 보지라르 거리> 1956년 이성자作 캔버스에 아크릴 73×116cm
1950년, 그의 나이 서른 둘. 결혼생활 12년 만에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면서 당시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인 세 아들과 생이별을 했다. 외로움과 절망의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피하기 위해서는 “더 멀리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친지를 통해 알게 된 외교관의 도움으로 그는 이듬해 ‘무일푼, 무명의 처지로, 불어도 모르지만’ 프랑스로 떠났다. 이성자는 1938년 일본 짓센 여자대학에서 가정학과를 졸업하였으나 1951년 파리로 건너가 의상 디자인을 공부하다가 1953년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눈덮힌 보지라르 거리>는 ‘보자르 살롱전’에 입선한 그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은 다락방에서 내려다 본 풍경으로, 화면은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뉜다. 하단은 눈이 내린 거리의 모습을 대부분 밝은 흰색조로 채운 반면, 상단은 멀찍이 보이는 아파트들을 적갈색 등의 무겁고 어두운 색채를 사용해 그렸다. 이로인해 위와 아래는 원근감의 대비뿐만 아니라 강한 색채 대비를 이루면서 전체적으로 묵직한 인상을 준다. 좌측 하단에 그려진 겨울 나목은 단조로운 분위기를 피함과 동시에 겨울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층 실감나게 전하며, 동시에 두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도 하고 있다.
아크릴 물감-수채 물감과 유화 물감의 특성을 모두 가졌고 투명과 불투명 효과를 모두 내면서 물에 풀어서 사용하여 유화물감에 비해 사용이 간편하고 내구성이 강하며 건조시간이 짧다.
<천사의 땅> 1958년 이성자作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 박래현(1920~1976)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 호남에 방대한 토지를 갖고있던 가족을 따라 6살 때 군산으로 이주했다. 1944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의 일본화과를 졸업하였고, 1940년 선전(鮮展)에서 특선을 받기도 하였다. 일본 미술학교를 졸업한 박래현과 청각장애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김기창의 연애사는 ‘미술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당시 선전의 추천작가였던 김기창에게 인사를 하러 간 게 인연이었다. 훤칠한 김기창의 외모에, 종아리가 예쁜 박래현에 서로 반했지만, 청혼은 여자가 먼저했다. 가진게 없어 주저하던 남자는 “결혼 후에도 화가로서 살 수 있게 해달라”며 사랑 고백을 한 박래현에 푹 빠졌다. “각자의 예술세계를 인정하되 간섭은 하지말자”는 약속과 함께 1946년 남산 민속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박화백은 1956년 대한미술협회전과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1957년 서울문리사범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작업실에 나란히 앉은 김기창 · 박래현 부부
<달밤> 1953년 박래현作 종이에 수묵채색 76.3×59cm 개인소장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걸려있다. 하나는 둥근 보름달이고 다른 하나는 얇은 초승달이다. 그리고 숲 속 나무 위에는 부엉이가 앉아있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부엉이와 나무와 숲의 형태가 모호하게 처리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나무와 숲은 추상화와도 비슷하다. 1950년대 당시 박래현은 동양화의 추상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형태와 색채에서 새로운 혁신을 모색함으로써 동양화의 현대화를 추구하였다.
<노점> 1956년 박래현作 수묵에 담채 267×210cm 국립현대미술관
우향(雨鄕)은 광복 이후에는 일본색에서 탈피하여 현대적 한국화를 창조하기위해 수묵채색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서양의 추상미술과 결합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노점>은 바로 그 실험의 결과물이다.
큰 면으로 과감하게 분할된 추상적 형태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 등은 박래현이 특히 입체주의에 매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커다란 화면의 전면을 차지하고 굳건하데 서있는 갈색 피부의 이국적 여인들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닮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노점에 좌판을 벌인 아줌마, 한 손으로 아이를 업고 다른 손으로는 생선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 자기 몸집만큼 큰 옥수수 바구니를 거뜬히 들고 있는 건장한 여인들은 어쩌면 화가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란 중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가였지만, 동시에 네 자녀의 어머니이자, 일찍이 청력을 잃은 남편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친 지극한 내조형 아내였던 것이다.
<이른 아침> 1956년 박래현作 종이에 수묵채색 238×179cm 개인소장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디면서 목을 빼고 나아가고 있는 여인들의 시선이 만들어내는 수평적 선의 흐름은 화면 중앙의 여인이 들고 있는 달걀 꾸러미와 함지박들의 선들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반면 화면 중앙에 여인의 등 뒤에 업힌 채 잠들어있는 아이의 뒤로 젖혀진 머리와 팔, 다리의 선은 여인의 팔과 십자로 교차된다. 그리고 걷지 않으려는 듯 뒤로 몸을 뺀 큰 아이의 다리와 팔, 그를 움켜쥔 여인의 팔과 포대기의 선이 마들어내는 대각선은 화면 전체의 수평적 구성에 강한 긴장감과 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등에 업힌 아이의 뒤로 젖혀진 고개와 가지 않으려고 때를 쓰는 큰 아이의 모습은 생계를 위해 잠이 덜 깬 아이들까지 데리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시장을 향하고 있는 전쟁 전후 서민들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회고> 1957년 박래현作 종이에 수묵채색 204.7×180.5cm
기존의 사실적 묘사방법에서 벗어나 대상을 해체해 평면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한복을 입은 가체머리 여인과 청자향로 등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전통적인 소재를 그렸고 청회색과 흑회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裸女> 1960년 박래현作 종이에 수묵담채 202×99.5cm
대담한 선이 강조된 기하학적 형태분석과 단순한 색채 속에서도 섬세함과 여성스러움이 묻어난다. 반추상화에서 완전한 추상화로 넘어가기 전의 과도기적 위치에 자리한 작품이다.
☆천경자(千鏡子 1924~2015)
전남 고흥 출생.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 혼담이 오가자 시집가기 싫어 다듬잇돌 위에 앉아 미친 시늉을 했다. 1940년 17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던 이 무렵 본명이던 옥자(玉子)를 버리고 경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자신에게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생 이철식과 1944년 결혼하였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 전남 모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런 태도 때문에 천경자는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간다. 천경자는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여행을 즐겼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 작품 모음
https://photos.app.goo.gl/N9tSUDyhPDEsgkNB8
<노부> 1943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117×147cm
동경 여자미술 전문학교에서 재학시절이던 1943년 19살이던 천경자가 외할머니를 모델로 그린 졸업작품이다. 그림은 일본 선생에게 배웠으나, 화제와 내용은 처음으로 한국화의 위상을 자리 잡게한 ‘작은 독립선언서’ 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해방을 맞기전인 1944년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생태> 1951년 천경자作 한지위에 채색 51.5×87cm 서울시립 미술관
35마리의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 작품은 한국전쟁시절에 ‘천경자’라는 존재감을 화단에 알린 충격적 작품이다. 뱀들이 한데 엉켜 우글거리는 모습에 저절로 소름이 오싹 끼친다. 그녀는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에 하나있던 여동생 ‘옥희’를 세상에서 떠나보냈다. 그리고 유학 중에 만나 결혼한 남자와도 행적을 확인할 바 없이 헤어져야 했다. 생애 첫 괴멸을 맞던 당시에 그녀는 이 징그러운 뱀들의 또아리를 보았다.
<청춘의 문> 1968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145×89cm 국립 현대미술관
이 작품에 등장한 여인은 헐리우드의 전설적 배우 故그레타 가르보인데, 작품을 잘 보면 그레타 가르보의 얼굴이 목하고 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보랏빛의 색종이에 그려진 얼굴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이 장치로 인해 평범해 보일 수도 있는 인물화를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바꾸었다. 이러한 구성은 ‘과연 종이 뒤의 진짜 얼굴은 어떨까?’하는 궁금증이 들게 한다. 작품의 여인은 그레타 가르보가 된 것 같은 몽상의 세계에 빠진 것은 아닐까?
<이디오피아의 여인들> 1974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33.4×24.2cm
백인계 햄족(북부 아프리카)과 셈족(중동지방)과 아프리카 원주민 흑인과 혼혈을 이루면서 독특한 생김새와 문화를 형성한 것이 이디오피아人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도 검기보다는 황갈색에 가깝다. 키가 훤칠한 미인이 거리에서 눈에 자주 띄는데 화장을 하지 않은 이디오피아 여성들의 구릿빛 자연 건강미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 기억의 슬픈 22페이지> 1977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43.5×36cm 서울 시립미술관
50대에 작가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그렸다는 작품이다. 22페이지라는 명제는 첫딸을 낳은 22세 때 모습을 그렸음을 알려준다. 이후 한 명의 아들도 얻게 되지만, 얼마 안 가 부부사이는 틀어져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우수가 짙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은 아니다. 오히려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강한 의지를 느끼게 된다. 비록 슬픔을 숨길 수는 없지만, 그것을 과격하게 표출하기보다는 삶의 어떤 어려움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듯이 보인다. 머리 위의 뱀은 네 명의 자식들을 나타내었다고도 한다. 서울 시립미술관에 93점의 작품 기증을 할 때도 유독 이 작품이 건네질 때 ‘그림을 어루만지며 북받치는 울음을 참기 힘들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미인도> 79년 10·26사태 이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정부에서 압류한 이후 1980년 문화공보부가 관리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작품을 본(1991년) 천경자 화백이 “내가 그린 작품이 아니라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진위 논란이 시작되었다. 화가 본인은 가짜라 하고 나중에 ‘내가 돈을 받고 위작을 만들었다(1999년)’라는 사람까지 나왔지만 그 그림을 소장 중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화랑협회 등의 검증 결과를 가지고 연이어 ‘진품’이라고 하는 판정을 내렸고 이에 천경자 화백은 ‘자기 작품도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 나간 화가’로 만들어 버리는 우리나라 미술계에 실망하고 절필을 선언한다. 이어 한국 미술계는 물론 한국 땅마저 떠나버린다.(1998년) 뉴욕으로 떠난 후 8년만에 잠시 귀국해 “내 그림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며 작품 93점을 서울 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다시 떠났다.
-1991년 4월 어느 날 저녁 천경자 화백이 다짜고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자택 겸 화실인 압구정동 아파트로 급히 올 수 있냐고 했다. 천 화백은 “가짜 그림이 이렇게 내가 그린 진짜 그림으로 둔갑하여 다닌다.”며 속칭 ‘미인도’라 불리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그림의 포스트를 앞에 두고 격노했다. 당시 그는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나? 나는 결코 이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또 (자신이 직접 그린) 다른 잡지 표지의 그림들을 모두 내보이면서 “나는 절대 머릿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는다.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다르다. 작품 사인과 표시 연도도 내 것이 아니다”라며 견딜 수 없어했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황금비> 1982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34×46cm
화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천경자 자신은 자신의 감성을 한 마디로 ‘한恨’이란 표현을 하였다. <황금비>는 머리의 화관인지 배경인지 모를 정도로 공간이 불분명하다. 여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이 동공이 열려 정신이 환상의 나라로 간 듯한 느낌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극복을 위한 작가 자신의 몸부림인 듯하다.
천경자의 여인상들은 항상 머리에 화려한 꽃을 달고 있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미친 여인들에서 착상한 것이다. 미쳤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 타인에 의해 억압되어 이성적 통제 기능이 상실된 것이며, 상대를 굴복시키지 않고 스스로를 자학하고 고통을 감내하다 생긴 착하고 슬픈 질병이다. 천경자는 미친 여자들에게서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누가 울어> 1988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79×99cm
화가 천경자가 가장 아끼던 작품으로 황홀하면서도 슬픈 느낌이 묘사되었다.
<막은 내리고> 1989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41×31.5cm 개인소장
여행 풍물화로서, 작가가 한때 몰두했던 주제인 ‘여인상’을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두명의 여인은 원주민 무용수 같은데 아마 공연을 막 끝낸 직후일 것이다. 머리에 화려한 화관을 쓰고 꽃목걸이를 건 두 여인들의 손에는 꽃들이 잔뜩 쥐어져 있고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있어 얼핏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보이지만, 짙은 화장 뒤로 깊게 파인 눈과 눈 사이와 광대뼈는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무언가 쓸쓸한 감정을 숨기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중들에게는 인기를 얻었지만 정작 스스로는 외로웠던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녀와 바나나> 1993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31.5×40.8cm
생전에 그녀의 어머니는 천경자가 남으로부터 피해나 수모를 당할 때마다 “나나 니나 전생에 황후였는가 보다. 그런 사람이 다시 태어나면 않좋단다.”라는 말로 위로해주곤 했다. 이 말은 삶의 고난이 심해지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천경자는 힘들 때마다 자신이 전생에 어느 왕조의 황후였다는 상상을 하며, 현실의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세상에 저항하곤 했다.
-천경자 평전: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中에서
<황혼의 통곡> 1995년 천경자作 종이에 채색 96×129cm 서울 시립미술관
☆ 김창렬(1929~ )
평안남도 맹산 출생.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붓글씨를 통해 회화를 접했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해야했던 그는 경찰학교에 지원하였고, 1961년 까지 경찰생활을 지속하였다. 경찰생활 중에도 그는 미술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경찰생활을 그만두고 수도권일대의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세계무대로 눈을 돌렸다. 1961년 파리 비엔날레,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하였고, 1966년 록펠러 재단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다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인생의 반려자인 마르틴느 질통을 만났다. 1972년 파리의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Event of Night>으로 본격적인 데뷔를 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물방울을 소재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
<현상> 1971년 김창렬作 캔버스에 유채 150×150cm
음울한 회색 형상이 색면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작품으로, 물방울 그림에서 보게 될 기법의 전조가 되었다.
<Water Drop> 김창렬作
<해체> 1985년 김창렬作 캔버스에 유채 300×250cm
한자의 기본 점획과 물방울을 그렸다.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별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 물방울이라는 모티브로 40년 이상 작품 활동을 해온 것은 놀라운 신화적 사건이다. 한국에서 물방울 그림이 신화적 존재가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신화에서 탈피하여 세계 현대 미술사적 견지에서 정리할 단계라고 본다.
<회귀> 2009년 김창렬作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선생님, 물방울 외에 다른 것들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다른 걸 그릴 여력이 없는걸요. 피카소는 새로운 아내를 맞을 때마다 그림 경향을 바꾸었는데, 나는 평생 한 여자와만 살았으니 그림을 바꿀 기회도 없었고요.”
<Event of Night> 1972년 김창렬作 캔버스에 유채 162×162cm 작가소장
1971년 프랑스 외곽의 마굿간에서 생활하던 김창렬은 “이른 아침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물을 받다가 캔버스에 크고 작은 물방울이 튀었다. 캔버스 뒷면에 뿌려진 그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이 나는 그림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시작하게 됐다”고 물방울 작업의 계기를 회상했다. 구순의 노화가에게 물방울의 의미를 물으면 그의 대답은 언제나 ‘아무런 의미 없음’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저 슬며시 한국전쟁시기, 참혹한 전쟁터에서 스러져간 어리고 순수했던 그의 친구들을 떠올린다고 이야기 한다.
<Water Drops> 김창렬作
☆이우환(李禹煥 1936~ ) 경상남도 함안 출생. 1956년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에 들어갔지만 그해 여름에 숙부의 병문안 차 일본에 갔다가 그대로 일본에 정착, 서울대를 중퇴하고 니혼대학 철학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동양의 전위미술 운동인 모노하(物派)를 이끌며,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 동향을 주도한 작가 중 한사람으로 평가된다. 아시아 현대작가로는 처음으로 파리 국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구겐하임, 베르사이유궁전 등 세계 주요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수십년간 유럽과 일본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와 일본, 독일의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점으로부터> 1973년 이우환作 캔버스에 석채(石彩) 194×259cm
점(點)은 시작이요, 끝이다. 점을 우선 찍어야, 선으로 이어가는 것이나 면으로 펼쳐가는 일이 가능하다. 그렇게 점은 조형요소의 기본이자 근간을 이룬다. 푸른 점 하나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르는 점들이, 농담을 달리해 서서히 옅어지며 여백으로 번져간다. 붓으로 무심히 툭 찍은 것 같지만 이는 그렇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일 뿐, 화폭 뒤덮은 수백 개 점 가운데 무심했던 점은 한 개도 없다. 하나하나 제각기 리듬과 강도와 농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로 멀리서는 마치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도 보인다. 벽에 붙은 그림이 파르르 떨린다면 그것은 작품과 관객 사이를 가로지르는 진동이요, 교감이다.
<선으로부터>1976년 이우환作 캔버스에 광물안료와 유채 161.9×130.2cm
2014년 뉴욕 소더비에서 한화 23억7000만원에 거래
<동풍 東風>1984년 이우환作 캔버스에 석채 116.5×91cm
70년대의 점, 선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차분한 붓질 대신 가로, 세로의 대담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붓질이 인상적인 80년대에 그려진 바람시리즈의 그림들이다. 이전의 점과 선에 의존하여 기본 요소에 집중하던 틀을 깨고 무정형의, 보다 생기 넘치는 회화가 되면서 붓자국은 거침없이 자유로워지고 바탕 면과의 호흡을 느끼게 한다.
☆ 최예태(1937~ )
전북 김제 출생.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졸업. 이후 조선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 1988년 캐나다 몬트리올 알공퀸 칼리지에서 서양 수채화를 전공하고 1991년 퀘벡 대학교에서 조형미술을 전공하였다. 화백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대비 즉 한난(寒暖)에 의한 보색대비 효과를 잘 보여주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오윤(1946~1986)
부산 동래구 출생.
소설가인 오영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경남여고 미술 교사를 지내던 아버지를 따라 경남여고 관사에서 살았다. 1955년 서울로 이사오고, 고등학교 시절 누나 오숙희와 친분이 있던 김지하와 알게되고, 이후 많은 영향을 받는다.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 1970년에 대학을 졸업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 전까지 10년간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다. 우리은행 동대문 지점(광장시장 옆) 테라코타 벽화를 제작하기도 하고, 전돌 공장도 차려보고, 선화예고, 서대문 미술학원에서 미술 선생으로 지냈지만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80년대 전반기 5년 동안이었다. 그 작가적 잠복기의 예술적 고뇌를 오윤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 따라서 미술사에서, 수많은 미술운동들 속에서 이런 해답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나는 말없는 벙어리가 되었다.” 젊은 작가들이 모인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동인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인한 간경화로 고생하다 1986년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애비> 1981년 오윤作 목판화 35.3×34.1cm 유족소장
당시 시대 상황에서 어머니와 아이, 아버지와 아들 같은 도상은 일상의 파편을 반영하면서도 관람자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제이기도 했다.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드러내었다.
<피로> 1982년 오윤作 목판화 24.5×34cm
그는 현실에 찌들린 이들의 고통을 직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사람의 공허한 뒷모습을 통해 직접적인 호소가 아니라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화면에 불필요한 회화적 설명을 배제하고 상징적인 선이나 부호를 자주 사용했다. 심지어 배경까지도 추상적인 면 처리로 대신하고 있는데, 이는 主 이미지를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탁월한 조형감각을 보여주는 점이다.
<춤> 1984년 오윤作 목판화 33×27cm
그는 ‘한’의 맺힘을 ‘신명’으로 풀고자 했다. 처음부터 전통의 소재 선택과 해석방식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판화 고유의 칼맛으로 전통적 미의 형식을 획득하고 자연스러운 역동성을 충족시켰다. 흩어진 머리를 통해 ‘한’의 풀어헤쳐짐을 형상화 하였다.
<형님> 1985년 오윤作 목판화 23.5×32.5cm
< 형님 > - 김지하
희고 고운 실빗살
청포잎에 보시거릴 땐 오시구려
마누라 몰래 한바탕
비받이 양푼갓에 한바탕 벌려놓고
도도리 장단 좋아 헛맹세랑 우라질 것
보릿대 춤이나 춥시다요
시름지친 잔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있는 놈만 논답디까
사람은 매 한가지
도동동당동
우라질 것 놉시다요
지지리도 못생긴 가난뱅이 끼리끼리
<춘무인 추무의 春無仁 秋無義> 1986년 오윤作 고무판화 75×50cm
마당극을 보는 듯한 전체 화면과 그 안의 인물 동세를 통해 운동감과 가락을 느낄 수 있다. 웃고 있는 표정의 얼굴과 춤사위 동작을 통해 ‘신명’의 정서를, 무표정하거나 얼굴을 가린 모습, 뒷모습의 자태를 통해 ‘한’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작품의 제목에서, 오윤은 결국 인과 의가 하나가 되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 같다.
春無仁 秋無義 (봄에 씨앗仁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義이 없다.) -증산교주 강일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