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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로 보는 한국사
이 책은 ‘한국사’에 대한 것이지만 한국역사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의 조상인 인류가 전 세계에 널리 퍼진 이유를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이론은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호모 에렉투스가 약 100만 년 전(혹은 150만 년 전)아프리카를 지나 세계 곳곳에서 진화했다는 것이다. 현생인류가 지닌 특징은 각 지역에서 오랜 세월 적응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 인류가 유럽과 아프리카는 물론 중동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으로, 황인종의 조상은 원래부터 황인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징원인에는 몽골로이드(Mongoloid)계 인종에서만 보이는 형태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베이징원인은 몽골로이드의 선조이며, 이것을 ‘다 지역 기원설’이라고 하는데 ‘다지역 기원설’을 한민족에게 적용하면 70만 년 전, 한반도에 원시인이 살았으며 이들은 유럽인, 즉 크로마뇽인과 조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인간 유전자 분석이 획기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아프리카 기원설’이 떠오르고 있는데 이것은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이브’라는 한 여성에서부터 현생인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유전자 분석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많은 과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등장한 크로마뇽인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지지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이 설대로라면 한국인도 크로마뇽인의 후예가 된다.
1868년 프랑스 남부 크로마뇽 지방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크로마뇽인은 오늘날 북부 유럽인과 외모와 두뇌 크기가 비슷하다. 1987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알란 윌슨 교수가 세계 각지에 사는 147명의 미토콘드리아를 조사한 결과 인류는 한 명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현대 인류는 20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서 돌연변이로 처음 발생했고 그 후손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이주해 인류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아프리카 기원설’또는 ‘이브 가설’이라고 한다. 논리 설정과 샘플 채택 등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선조가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한 여자였다는 가설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무엇보다 지금껏 구축해온 인류조상에 관한 지식을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인류가 이브라는 한 여성으로부터 두 개로 나뉘었다는 것인데 한쪽 가지는 아프리카인뿐이지만 다른 한쪽 가지는 아프리카인을 비롯한 모든 인종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선조가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뒤 세계 각지에 진출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류유전학자 브라이언 사이키스는 『이브의 일곱 딸들』이란 책에서 전 세계 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조사한 뒤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L형을 다시 33개로 분류하고 동양인은 여섯 개 집단으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유전자 분석법을 사용해 인간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유전되는 생물체의 특성이 기본적으로 DNA 염기서열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종(種)이 다르면 당연히 염기서열도 달라진다. 평균 1,300개 염기서열 중 한 개의 비율로 차이가 나는 것이 사람이다. 차이가 크면 클수록 염기 서열의 차이도 크다. 생명체들이 원시적인 것에서 점차 진화해왔기 때문인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화하려면 유전자의 복잡성도 커져야 하는 때문이다. 한 지역에서 인류의 조상이 나타난 뒤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면 발생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는 이주해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보다 훨씬 다양해진다. 가령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본 오사카, 만주 옌볜 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의 유전적 변이는 서울에 사는 이들의 유전적 다양성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성 면에서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서 한민족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윌슨이 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보니 미토콘드리아 DNA의 변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가장 다양하게 나타났다. 결과는 20만 년 전 인류가 한 어머니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티베트인, 몽골인, 에스키모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은 유전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한 묶음이고, 중국 남부인, 캄보디아인, 태국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은 따로 함께 묶인다. 즉 북부 중국인과 한국인은 남부 중국인과는 다른 갈래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이브의 후예가 동양으로 오면서 두 갈래로 나뉘는 이유는 동양으로 오는 경로가 두 갈래였기 때문이다. 1번 경로는 인류학에서 ‘버마경로’라 부르던 것으로, 아시아 해안을 따라 동으로 이동하는 길인데 아프리카기원설에 의하면 중국 땅에 현 인류가 정착한 것은 6만 년에서 7만 년 전이다. 중국에 도달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한반도와 일본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1만 2천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로 연결돼 있었으므로 중국에 온 사람들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는 게 무리한 추측만은 아니다. 물론 일본 홋카이도 토착민인 아이누족은 후기 빙하시대에 배를 타고 건너간 남부 아시아인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번 경로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실크로드와 시베리아를 거치는 경로로 한민족은 추위를 이겨내기 쉬운 실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동그스름한 콧날과 속 쌍꺼풀, 단두형머리* 등 체질적 특징이 있다. 대체로 바이칼호 근처에 사는 북부 아시아인들이 약 1만 3천 년 전 빙하가 녹으면서 몽골지방을 거쳐 남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두형 머리: 얼굴의 생김새를 뜻하며, 장두형(dolichocephalic) 두상과 단두형(brachycephalic) 두상으로 분류된다. 장두형과 단두형은 일반적으로 두장폭지수에 의해 구분된다. (측두골 폭 ÷ 전두골 ~ 후두골 길이)×100가 두장폭지수. 수치가 낮을수록 장두형, 높을수록 단두형이다. 두장폭지수가 남성의 경우 75.9 미만, 여성의 경우 75 미만인 것을 장두형이라고 하며, 남성의 경우 81.1 초과, 여성의 경우 83 초과인 것을 단두형이라고 한다.평균적으로 같은 머리 크기라도 장두형이 단두형보다 정면에서 얼굴이 더 입체적이고 작아 보인다. 동양인이 서구인이랑 머리 크기는 비슷해도 얼굴이 커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두형이 단두형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은 모두 단두형이다.
최근 일본 오사카 의과대학 마쓰모토 교수는 인간의 혈청에 있는 항체 유전자를 연구해 몽골인종의 기원과 이동경로를 추적했다. 그는 몽골인종을 특징짓는 네 가지 유전자 결합 중에서 몽골 인종의 혈청에 있는 Gmab3st 유전자에 주목했다. 바이칼호 북쪽에 사는 뷰리아트 족은 Gmab3st 유전자가 100명 중 52명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인은 41명, 일본 본토인은 45명인데 비해, 중국인은 화베이 지방이 26명, 화난지방은 9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반면에 북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인은 44명으로 몽골인종의 특징을 보여줬다. 이 연구 결과는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멀어질수록 Gmab3st 유전자가 있는 사람 수도 줄어든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몽골 인종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음을 증명한다는 설명했다. 태초의 세계에는 공간은 있었으나 생명체가 없었으니 시간이란 개념은 없었다. 물질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어느 순간 시간이 흘렀고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 세계로의 전환이후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46억년으로 추정하는 지구가 탄생하여 생명체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생명체가 생기면서 지구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인간의 탄생이었다. 인간의 탄생으로 우주는 비로소 존재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최초인간은 대략 300∼450만 년 전에 등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후 인류는 호모 하빌리스에서 호모 에릭투스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불을 사용하여 빙하기를 견딜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가졌던 호모 사피엔스는 현생인류와 가깝지만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현생인류는 약 4만 년 전에 출현한 후기 호모 사피엔스로 인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뇌가 크고 직립보행을 하며 힘으로 도구를 사용하며 창조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歷事와 歷史’는 말은 같지만 그 뜻이 다르다. 歷事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歷史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 가운데 역사가에 의해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어 조사되고 기록된 사실을 말한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후자를 말하는 것으로 엄밀히 말해 역사가에 의해 선택된 주관적인 것이다. 그 선택된 역사 가운데서 우리는 과거의 의미와 경험을 얻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역사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조상의 역사인 ‘한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인류가 탄생하고 구석기 시대를 거치면서부터 한국사가 시작된 것일까. 아니면 현재의 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신석기시대부터 한국사라 할 수 있을까? 그도 아니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성립으로부터 한국사라고 해야 할까? 또 어디까지를 한국사 공간으로 봐야 할까. 지금의 남북한 영역, 즉 한반도만이 한국사의 공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언제부터, 어디까지를 한국사의 시공간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인의 원형이 시작되는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역사의 시작’중에서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채집생활을 주로 했으나 신석기시대는 과히 혁명이라 할 수 있는 농경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이로 인해 정착생활이 이루어졌다. 돌을 다듬어 연장을 만들고 흙을 구워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뼈바늘로 옷을 기워 입었고 낚시를 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영혼을 인식하면서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홍산문화에 속하는 유하랑 유적지에서 출토된 거대한 여신의 묘와 사당, 돌을 쌓아 만든 대형 무덤, 성벽 등은 이 시기에 이미 종교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공동의 집단이 생겼음을 말해 준다.
동북아에서는 대략 1만년에서 8천 년 전 무렵부터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어 앙소문화, 대문구 문화, 마가빈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신석기 문화권이 형성되었으며 요서 북부지방에서 번성한 홍산문화는 ‘한국사’의 뿌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7∼8천 년 전인 이 때 이미 옥기와 다양한 토기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중원지역의 앙소문화보다 앞서 시작된 것이다.
바이칼호에서 시작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지대에는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몽골리안이 넓게 분포하는데 이는 동방문화권에 속하며 주변의 북방문화권, 화남문화권과 구분된다. 이런 지역적 차이가 문화의 차이를 만들면서 혈통의 계승에 따른 종족이 구분되고 이 때부터 겨레의 모태인 동방문화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쳤는데, 청동제품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권능을 가진 정치, 군사, 종교 지도자만이 소유될 수 있었다. 이로서 인간 사회는 본격적인 계급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의 개막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청동기의 범주와 개시 시점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으나 대체로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이전, 만주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 이전, 홍산문화권에서는 기원전 20세기 이전에 청동기시대가 개막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며, 농경의 발달로 잉여생산물이 증가하자 수렵과 어로의 비중은 줄어들고 소말돼지 등 가축 사육은 늘어났다. 이때청동제품과 토기 등을 전문으로 만드는 수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청동거울을 만들기도 하고 바위에 기하학적 무늬를 새기거나 호랑이, 사슴 등과 같은 동물의 모습을 새기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는 삶과 의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울주 반구대에는 거북, 사슴, 고래 등을 사냥하는 모습이 자세히 새겨져있으며, 고령 양전동 알터 바위에는 태양숭배와 풍요로움을 기원한 동심원, 십자형 등 기하학 무늬가 새겨져 있다. 청동기시대가 구석기나 신석기시대보다 주목받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도시, 문명, 국가 등 사회조직과 문화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등에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건국했다고 했다. 이후 단군들은 자식들에게 왕위를 세습하였고 왕 아래 상, 대부, 장군 등의 체계화된 관료조직을 갖추었다. 또한 강력한 군대와 왕검성을 비롯한 견고한 방어력을 갖춘 성을 쌓았으며 기원전 7세기에는 중국 제나라와 교역할 만큼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 기원전 4세기에는 전국7웅의 하나인 연나라를 침략할 정도로 국력이 강했다. 하지만 3세기 연나라의 침략을 받아 2천리나 되는 영토를 상실하고 동쪽으로 물러났고 이후 평양 중심의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세형동검은 고조선의 위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고조선의 붕괴와 철기생산과 보급은 한국사와 역사지도를 변모시켰다. 철제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집단은 주변의 작은 소국을 병합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는데 그 가운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성립과 멸망 시기는 달랐지만 가야가 성립한 42년부터 부여가 망한 494년까지 다섯 나라는 함께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자국이 천신의 의지와 연결된 신성한 것임을 강조하고 태생의 기이함을 내세우며 피지배층의 복종을 요구했다. 이들 가운데 백제 온조는 추모왕의 아들로 건국신화가 없으나 나머지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내세웠다.
세계 전쟁사에서 이보다 더한 전쟁이 있을까 싶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통쾌함을 형언할 수 없는 612년 고수전쟁, 삼국시대가 끝나고 5호 16국으로 난립했던 중국은 589년 문제라는 걸출한 인물이 통일을 이루고 나라 이름을 수(隨)라고 했다. 중국을 통일한 문제가 30만의 대군을 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요하도 건너지 못하고 패하여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왕이 된 2대 수양제는 612년 113만 8천이란 전대미문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는 요동성에서 수나라 주력군을 막아냈고 해군도 격퇴했는데 대군의 움직임이 더디자 별동대 30만으로 평양성으로 진군했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의 보급로를 끊어 적을 피곤하게 한 뒤에 살수에서 수공으로 적을 대파했다. 이때 수나라 군사 30만 중 겨우 2,700명만 살아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정복욕에 눈이 먼 수나라는 이듬해에도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요동성에서 대패했고 마침내 618년 흉흉해진 민심으로 당나라에 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잔존하는 것 같은 영남호남의 상관관계와 경상도 전라도의 악?감정은 고대로 올라가면 나제동맹이 그 뿌리인지 모른다. 백제와 신라는 오랫동안 전쟁을 해 왔지만 강력한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는 연합해야만 했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 오자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했던 신라는 백제를 돕기 위해 군사를 보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할 때 백제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는 1만 명의 지원군을 보낸다. 신라의 지원이 백제에게 직접 보탬은 되지 못했지만 이 일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후에도 양국은 485년, 493년, 494년 등 여럿차례 연합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492년에는 양국 간 혼인이 성사되기도 했고 이 과정에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커져서 가야연맹이 붕괴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51년에는 나제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 나누어 갖기도 하였으나 553년 신라가 돌연 고구려와 화친하고는 백제를 공격해 한강하류를 차지해 버렸다. 이에 화가 난 백제는 성왕이 신라에게 배신의 죄를 묻고자 하였지만 관산성(옥천)에서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죽고 이에 기세가 오른 신라는 백제군 3만 여명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여기서 백제는 신라에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되었고 이후 치열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600년 왕위에 오른 무왕은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혼인하며 화해의 분위기도 있었으나 641년 왕이 된 의자왕은 야심찬 인물로 642년 대야성을 공격하는 등 40개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왜와 동맹을 추진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오히려 백제는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이로인해 신라는 부득이 당나라에 구걸외교를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660년 6월 21일 당나라 13만 대군이 덕적도 앞바다로 상륙하고 신라군 5만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싸웠다. 5만대 5천, 이를 중과부적이라고 하던가. 결국 7월 11일 사비성이 함락되고 7월 18일에는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피신 갔던 의자왕마저 사로 잡혔다. 이후 3년간 부흥운동을 펼쳐 백제부흥을 기대할 수도 있었으나 지원하러 온 왜군이 백강전투에서 패하고 부흥의 거점이었던 주류성마저 663년 9월에 함락 당하자 백제는 다시는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외세를 끌어들인 통일로 사대주의라고 하기도하지만 신라의 후예인 나로서는 꼭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660년 백제에 이어, 667년 고구려마저 삼킨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평양에 안동도호부, 경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는 한반도 모두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이면서 675년 9월에 20만 대군을 임진강에 보냈다. 신라는 매소성에서 이를 맞아 격파한데 이어 이듬해 기벌포 해전에서도 당군을 격파했다. 당나라는 군사를 정비한 뒤에 재차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토번과의 전쟁으로 다시는 신라를 공격하지 못했다.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드디어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더 이상 북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후대의 지적도 받지만 당대 최강의 당나라와 싸워 이긴 역량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와 백제문화가 전통이 함께 융합되어 민족문화발전의 토대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큰 의의가 있다할 것이다.
과거에 고구려의 막강한 힘을 경험했던 당나라는 고구려 부활의 싹을 완전히 자르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세력을 키우던 대조영 무리를 추격했다. 이 과정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과 말갈의 지도자 걸사비우가 죽었고 대조영은 당나라 이해고의 군대를 천문령으로 끌어들여 대파하고 세력을 확산시켰다. 세력이 커진 발해는 당나라조차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때 발해는 수도를 평양에 두는 것을 고민하다가 평양은 이미 신라와의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또 신라와 인접한 지역이어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동부 만주지역인 동모산을 거점으로 건국했다. 발해는 이후 중경현덕부, 상경용천부, 동경용원부 다시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겨가면서 만주일대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이 지역은 원래 말갈족의 터전이었으니 발해 구성원은 말갈족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발해는 남쪽의 신라와 공존하면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 고려(고구려)국왕이라 칭하며 고구려의 후손임을 알렸고 일본 역시 발해왕을 고려왕이라 불렀다. 고구려 유민이 건국된 발해는 우리 역사임이 분명한데도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중국동부 역사라고 왜곡하고 있으니 안타까워해야만 할 일일까.
숯으로 밥을 짓고 금으로 덮은 고급주택들이 35채나 있었던 신라 수도 서라벌은 백제 땅과 고구려 땅을 흡수하면서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수도가 지역적으로 치우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단이었다. 5소경은 중앙에서 밀려난 귀족세력의 거주지가 되면서 지방정치, 문화, 군사적 부수도로 발전하여 지방 세력의 성장을 촉진하기도 했으나 금성에 편중되었던 힘이 지방으로 분산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9주는 고구려 지역에 한주, 삭주, 명주, 백제 지역에 웅주, 전주, 무주, 신라와 가야지역에는 상주, 양주, 강주를 말하는데 이전까지 군사적 기능이 강했던 군주에서 행정적 기능이 강화된 총관이나 도독으로 바뀌었다. 총관은 모두 진골로 임명되었으며 주 밑에는 태수가 통치하는 10개 이상의 군이 있었고 군 아래의 현은 현령이 다스렸고 현 아래에 촌, 향, 부곡 등은 토착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며 관리했다.
*5소경:금관경(김해),남원경(남원),중원경(충주),서원경(상주),북원경(원주)
임진왜란을 가리켜 조일전쟁으로 부르고 있는데 조금은 생소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이는 조선, 일본이 일으킨 전면전이란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삼포왜란처럼 왜란이란 이름을 붙여 상대적으로 작았던 사건들과, 본격적인 전쟁이었던 것을 구분할 필요도 있기 때문에 조일전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임진년에 한 번(임진왜란), 정유년에 또 한 번(정유재란)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둘을 합해서 조일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2천 년 들어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이라 부르는 역사책이나 소설의 빈도가 늘어나고 있는데 혹자는 이 전쟁에 명나라도 참전했기 때문에 조일전쟁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꼭 참전한 국가 모두를 전쟁 명에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하나인 독소전쟁은 독일, 소련 이외의 나라들도 상당수 참여한 전쟁이지만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두 나라의 이름을 따서 독소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의 나레이션은 극중 내내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이라 불렀다.
고려사 부분과 근현대사 부분도 분명히 우리역사이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생략되었다. 이 정도에서 〈지도로 보는 한국사〉읽기를 마칠까 한다. 책도 반납해야하지만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책 저자를 간략이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싶은데 김용만, 김준수 공저인 이 책은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김용만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한국고대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연구에 매진하고 있고, 김준수는 중앙대학교 역사교육과를 나와 우리역사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대중화 작업에 노력하는 작가라고 한다. 201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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