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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사건
백수린
죽은 고양이를 처음 본 것은 내가 열여덟 살에서 열아홉 살로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눈 소식이 유난히 없었던 그해 겨울. 잣눈. 싸라기눈. 포슬눈. 국어사전에서 눈(雪)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이름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눈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노트에 베껴 적으며 지루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서울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지 삼 년 가까이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어쩌다 눈이 오면 하얗게 지붕을 갈던 낡은 집들과 골목 어귀에 죽어 있던 그 고양이는 더 이상 이 세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행정구역상 정식 명칭은 따로 있었지만 우리가 서울에 처음 올라와 살았던 동네를 그곳 주민들은 소금고개라고 불렀다. 옛날에 소금장수들이 고개 아래 나루터에서부터 소금을 지고 넘어 다녀서 소금고개라고 불렸다는 말도 있었지만 가파른 고개를 넘다보면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옷자락에 소금이 생길 지경이라 그렇다는 말을 동네 아이들은 더 믿었다. 동네 아이들이 더 믿었다고, 나는 지금 쓰고 있지만, 사실 동네 아이들이 더 믿었는지 아닌지 나로서 알 길은 없다. 나에게 그 동네의 친구라고는 해지와 무호가 거의 전부였는데, 그들이 내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지금까지 믿고 있을 뿐이다.
소금고개에 살던 시절에 대해서라면 사실 해지와 무호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은 갑자기 이사 간 나와 달리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동네에서 줄곧 자랐다. 같은 골목을 기저귀 차림으로 뛰어다녔고,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성별이 달라 중학교를 따로 다니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소꿉친구들만 공유하는 친밀감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이 만드는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 공고해서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가끔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외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소외했다거나, 내게 거리를 두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나를 적극적으로 맞이해주었던 소수의 사람들에 속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의 마지막 한 해를 해지와 같이 등하교하면서 보냈다. 해지 어머니는 처음엔 내게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전학 간 그 학기에 치른 중간고사에서 전교 3등을 하자 우호적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돌이켜보면 그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가족을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외지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를 경계하던 사람들의 태도는 차츰 우리가족에 대해 알아갈수록 우호적으로, 그렇지만 조금은 거리를 둔 예의바름으로 바뀌어갔다.
“그건 너희 가족이 좀 있어 보여서 그래.”
해지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있어 보인다는 말이 무얼 가리키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어렴풋이는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아침마다 동네 골목을 마당비로 쓰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꼼꼼히 분리수거를 했으며, 주말에는 고향에서부터 가져온 낡은 전축으로 팝송을 들었다. 그 동네에서 아버지는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 동네의 아주머니들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시장에 다녀올 때마다 기미가 생길까봐 양산을 단정하게 받쳐 들었다. 어머니가 가진 양산은 총 세 개였는데, 그것은 많은 개수가 아니었지만 적지도 않은 개수였다. 어머니는 그날의 옷차림에 따라서, 기분에 따라서, 하늘의 빛깔에 따라서 양산을 골라 들고 다녔다. 그 동네에 그러는 여자는 우리 어머니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이질적이라고 느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우리 가족 역시 우리가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금고개는 내가 그때까지 살아왔던 곳과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이사하던 날,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떴을 때 우리의 구형 엘란트라는 굽이굽이 이어진 좁다란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단층의 낡고 허름한 집들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 보였다. “엄마, 여기가 서울이야?” 내가 상상했던 서울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으므로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차는 한참을 더 올라간 끝에 멈춰 섰다. 청록색 대문의 집이 우리가 앞으로 살게 될 곳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때는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3월 중순이었고,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칠이 벗어진 담벼락과 동그란 엉덩이를 내놓고 아무데나 주저앉는 아이들의 오줌 자국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말라가던 골목은 서글프리만큼 초라했다. 나는 안에 든 것이 깨질까봐 이삿짐 트럭에 싣는 대신 서울까지 직접 들고 온 종이 상자를 끌어안은 채 부모님을 따라 조심조심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기분 탓인지 집안에 들어서자 하수구 냄새가 훅 끼쳤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우리를 뒤따라 용달차가 집 앞에 도착하고, 인부들이 우리의 세간을 좁고 허름한 집안에 조금씩 들여놓았는데도, 나는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곳보다 턱없이 작은 크기의 단독주택으로, 두 개의 방과 하나의 거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거실 벽을 이루는 네 면의 너비가 균일하지 않아 바닥은 사다리꼴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나마 상당 부분은 안방에 들어갈 공간이 없어 거실에 덩그마니 놓은, 어머니의 오동나무 장으로 가려졌다. 소파는 들어갈 자리가 없어 결국 버리기로 했다. 누렇게 변색된 화장실 세면대, 물때가 낀 바닥 타일을 보는 순간 나는 고향에 두고 온 우리의 집이 그리워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재개발 때문이다.”
그날 밤, 이삿짐을 대충 부려놓아 아직 어수선하던 안방에 들어가 정말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우리가 왜 이런 집에서 살아야하느냐고 묻는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간 아버지는 그렇게 설명했다.
“저기에 뭐가 보이냐?”
아버지가 손끝으로 서쪽 언덕 위를 가리켰다.
“아파트요.” 나는 고향에 두고 온, 우리가 살던 아파트를 떠올리면서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그렇지. 저게 다 아파트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보다 몇 배나 비싼 아파트야. 이 동네에도 저런 아파트가 머지않아 들어설 거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날 밤, 그 일대가 모두 소금고개와 같은 달동네 밀집 지구였는데 몇 년 사이 불량 주택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고, 소금고개가 그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달동네라는 이야기를 내게 전했다. 서울의 아파트는 너무 비싸서 어차피 네가 가진 돈으로는 전세밖에 구할 수 없을 거다. 그럴 바에는 재개발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친구 조씨 아저씨의 말이 아버지의 귀에 일리 있게 들렸다. 그래서 부모님은 부동산에 밝은 조씨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허물어져가는 동네의 허물어져가는 집을 한 채 산 거였다.
“길어야 일 년 아니면 이 년일 거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까지, 불편하겠지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잘 살아보자.”
언덕 저쪽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고층 아파트의 가지런한 창들마다 불빛이 투명하게 빛났다. 언젠가 나도 본 적 있는 조씨 아저씨는 이런 집들을 매입해 그즈음 서울에 아파트를 세 채나 가진 부자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일 년 혹은 이 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옳았으니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를 따라 터덜터덜 옥상에서 내려오는 길, 계단을 밝히기 위해 전 주인이 달아놓은 백열전구 위로 하루살이들이 덧없이 부딪치고,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어쨌거나 너는 공부만 지금처럼 열심히 해라. 나머지는 아빠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서울에 온 것도 다 널 위해서잖냐.”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려는 내 등에 대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고향에서 쓰던 이불의 익숙한 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날 늦게까지 집안 곳곳을 정리하며 만들어내는 작은 소음을 나는 이불 속에서 들었다.
내가 전학을 간 학교는 지리적으로 우리 동네와 아파트 단지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이루는 구성원도 절반가량의 우리 동네 아이들과 절반가량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로 나뉘어 있었다. 부모님은 새 학교로 등교하기 전에 몇 차례나 내게 이왕이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런 당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한 번도 전학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임을 나는 이내 알게 되었다. 전학생에게는 친구를 선택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부모님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전학생으로 처음 교탁 앞에 서는 순간, 내게 쏟아지던 여든 개의 눈동자, 가늠하고 평가하여 어느 부류로 분류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재빨리 나를 훑던 눈길을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새 학교에서의 첫날 나는, 교실 바닥에 침 뱉는 절반의 아이들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다른 절반의 아이들과 나 자신이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로고의 백팩을 메고 다니고 공부에 목숨을 거는 것은 시시한 일이라는 듯 수업시간에는 엎드려 자지만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과외수업을 받던 그 아이들은 내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간파했다. 반 아이들은 언뜻 평화롭게 공존하는 듯 보였지만, 물리적 성질이 달라 합류 지점을 지난 뒤에도 각자의 흰빛과 검은빛을 유지하며 나란히 흐른다는 남아메리카의 두 강줄기처럼, 서로 섞이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내게 공부를 잘하는 재능이 있었고, 그것이 전학 간 뒤 처음 본 중간고사에서 증명되었기 때문에 나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는 그룹 과외에 속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들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이 달랐다.
만약 내가 전학 간 학교에 해지가 없었다면, 나의 새로운 삶은 더욱더 암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지에서 온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만 바라보던 아이들 틈에 해지가 있었고, 덕분에 나는 조금씩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갈 수 있었다. 내가 해지와 친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해지만이 이쪽과 저쪽,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있던 나를 배척하지 않은 유일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해지는 학교에 있을 때 그렇게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조용한 편이었지만, 학교만 벗어나면 말수가 늘고 활달해졌다. 서울의 지리를 하나도 모르던 나를 인근 대학 앞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영화관 같은 곳에 데리고 간 것도 해지였다. 우리 중학교에 붙어 있는 남자 중학교에 다니던 무호가 우리와 함께하는 날도 많았다. 처음 봤을 때 무호는 키가 겨우 나만 했고, 마른 체구에 귀여운 얼굴이어서 또래의 남자라기보다는 남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세 명이나 되는 누나들의 생리대 심부름을 하며 자란 탓인지 무호는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무호는 동네의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리 나에게 짓궂은 농담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 앞에서 욕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점점 더 자주 어울렸다. 해지나 무호와 달리 나는 학교 앞 보습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그들이 놀고 있을 때 뒤늦게 내가 합류하는 식이긴 했지만.
해지와 둘이, 혹은 무호까지 셋이서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파른 비탈을 올라 쇠락한 골목으로 접어들면 우리는 어딘가 숨어 있던 길고양이들과 어김없이 마주쳤다. 그곳엔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길고양이들이 살았다. 주차되어 있는 차 아래에 자리 잡고 누워 있다가 무단 투기된 검은 봉투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소스라치게 놀라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던 길고양이들.
아마 해지와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저녁의 일이었을 거다. 해지에게 그즈음 내가 보았던 기괴한 풍경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것은 동네 어귀의 공터에서 한 아저씨가 수많은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장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아저씨는 왜소했고 수염을 제대로 깍지 않은 탓인지 인상이 퍽 무서웠는데,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지는 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무호의 집에 있는 골목에 사는 사람으로 오래전 큰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후 동네의 고양이들을 찾아다니며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동네에 사는 동안 나는 그 후로도 종종 고양이 아저씨―우리는 그를 줄곧 고양이 아저씨라고 불렀다―를 맞닥뜨렸다. 나는 다섯 마리, 여섯 마리, 열 마리의 더러운 고양이들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한데 모여 있는 풍경과 술에라도 취한 것처럼 항상 눈에 핏발이 서 있던 아저씨가 무서웠다. 그렇지만 해지는 전혀 두렵지 않은지 나와 같이 있다가도 고양이 아저씨를 만나면 동네의 여느 아이들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심부름으로 아저씨에게 전이나 밑반찬을 가져다드리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노란색 줄무늬 고양이나 배와 입 주위가 하얗고 등이 검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다른 고양이들이 아저씨가 덜어주는 사료를 먹는 모습을 쭈그리고 앉아 구경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나는 그들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해지나 아저씨 다리에 털을 묻히며 느릿느릿 지나다니는 고양이들을 멀찍이 서서 지켜봤다. 사료를 다 먹은 고양이들이 흩어지면 해지도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저씨도 늘 그래왔던 듯이 그냥 그렇게 빈 사료 주머니를 들고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졌고.
소금고개에서의 생활은 차츰 적응이 되어갔지만, 고양이 아저씨의 존재처럼 끝내 적응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수시로 들려오는 발정 난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그랬고, 얇은 벽을 타고 넘어오는 이웃 노인의 가래 뱉는 소리나 커다랗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그랬다. 도대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하고 소리 지르곤 하던 드라마의 주인공들. 그 시절의 드라마에서는 가난한 남자가 고시에 합격한 뒤 부잣집 여자를 만나기 위해 옛 애인을 버리는 일이 정말이지 빈번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해지와 어울리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지만 상위권 성적을 변함없이 유지했으므로 대놓고 나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좋은 사립 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왔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넌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말들은 끈끈하게 내 발바닥에 들러붙어 어디든 걸을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부모님이 내게 입단속을 시켰으므로 나는 재개발될 예정이기 때문에 소금고개로 이사 왔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우리가 기다리던 재개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나 아버지는 모두 쉽게 동요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변함없이 아침마다 골목을 마당비로 쓸고 또 쓸었다. 고양이들이 매일 밤 쓰레기봉투를 헤집어놓고 가는 탓에 새벽의 골목에는 쓰레기들이 나뒹굴었다. 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 같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어머니는 정말 불길한 동물이야, 하고 말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정말 몸서리를 쳤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으므로, 나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떨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소음보다 참기 힘든 것이 악취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소음은 창문을 닫으면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지만 악취는 창을 닫아도 창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 동네에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단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온갖 냄새가 풍겼다. 정화조 트럭이 지나갈 때면 진동하던 악취나 고양이들의 배설물 냄새, 무엇보다도 아무렇게나 거리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 썩는 냄새가 항상 공기 중에 가득했다. 우리는 더워죽겠는데도 창문을 열지 못한 채 선풍기를 틀고 살았다. 어머니는 집안 구석구석에 방향제를 갖다 놨다. 나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내 몸에서 동네 특유의 냄새를 맡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여름 내내 악취는 점점 더 심해졌다. 무더위와 폭우가 반복되면서 부패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어느 주말인가, 연일 비가 쏟아지던 날, 찜통 같은 거실에 상을 펴놓고 앉아 온 가족이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사를 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재개발 이야기가 도통 들리지 않는데, 이 집을 전세 놓고 무리해서라도 대출을 받아서 다른 동네에 전셋집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였다.
“애한테는 아무래도 교육 환경이 중요하잖아.”
어머니가 땀을 닦으면서, 내 쪽을 흘깃 보았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흐음.”
제대로 말리지 않은 운동화 깔창 냄새가 나던 우리집의 거실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신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즈음 어머니가 내 교육 환경을 걱정하기 시작한 데는 원인이 있었다. 나와 성적이 비슷한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애쓰는 일이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해지와 붙어 다니고 있었다. 해지가 우리집으로 올 때도 있었고 내가 해지의 집으로 갈 때도 있었지만, 맥주로 머리를 탈색해보려다가 어머니에게 들켜 혼난 이후 우리는 해지의 집에서 놀 때가 더 많았다. 그 집을 떠올리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현관문을 열 때까지 집안에 고여 있던 어둠과 코를 찌르던 쾨쾨한 자릿내였다. 해지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지금껏 모르지만,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가 모로 누워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해지의 어머니는 주말에만 집에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어머니와 달리 목소리가 걸걸하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야한 농담을 아무 때나 하는 해지 어머니가 사실 좀 무서웠다. 그렇지만 덩치 큰 몸에 꼭 끼는 꽃무늬 티셔츠를 즐겨 입고, 무엇보다 해지와 닮은 얼굴의 그녀를 나는 좋아했다. 아무튼 해지 네 집은 취향을 짐작할 수 없는 가구와 집기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집보다 훨씬 좁았기 때문에 해지의 방이 따로 없는 그 집에서 우리가 있을 장소라고는 옥상뿐이었다.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옥상에 올라가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빠람빠람빠람. 시그널이 울리고 DJ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텐트 바닥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해지 네 집 옥상에는 커다란 LPG 통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옆에 세워둔 장대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해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수치를 모르고 바람에 나부끼는 속옷들을 보면 민망해져 시선을 돌렸다. 염료가 다 빠진 것처럼 후줄근하던 브래지어와 팬티들.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동안 텐트 위로는 빨래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한번은 그 좁은 텐트 안에서 해지가 내 눈썹을 정리해준 적도 있었다. “눈을 감아야지.” 해지의 말에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해지는 내 눈썹을 물로 적시고 비누를 칠했다. 눈을 감은 탓인지 비누의 인공 살구 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시작한다.” 해지가 말하고 나는 눈을 더 질끈 감았다. 그 시절, 해지에게는 나 말고도 오래된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내게는 해지가 바깥세상의 전부였다. 내 얼굴 위로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칼날. 그 순간 나는 아주 짧은 찰나라도 눈썹 모양이 망가지거나 상처가 나면 어떻게 하나, 따위의 걱정을 하지 않았다. 사랑에 굶주린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으로, 나는 해지를 믿었다. 해지의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내 이마 위에서 곡선을 그으며 움직이는 것을 느끼면서. “다 되었어.” 해지가 거울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 해지의 눈썹과 똑같은 눈썹을 지닌 내가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사다리를 타고 다시 옥상에서 내려와, 고양이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때까지 열지 않았던 마지막 이삿짐 상자의 테이프를 뜯었다. 고향의 친구들이 선물해준 도기 인형들과 작은 꽃병, 플라스틱 사진틀 따위의 아무짝에 쓸모없지만 당시 내 눈에는 아름다워 보였던 것들을 꺼내어 나는 내 방을 꾸몄다.
해지에게는 내가 그저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당시 나를 때때로 슬프게 했다. 해지는 동네 친구들이 많았는데 특히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해지와 같이 동네를 걷다보면 우리보다 두세 살쯤 나이가 더 많은 고등학생들이 해지에게 다가와 시답지 않은 장난을 걸거나 색소가 많이 든 아이스크림 같은 걸 사주고 가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해지를 쫓아다니는 남자애들과 어울리지는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은 그 시절의 어린 나도 알았다. 나는 그들의 안중에 전혀 없었으니까. 남자들 앞에만 서면 쭈뼛대고 경계하던 나와 달리 그들을 대하는 해지의 태도는 스스럼이 없었다. 다른 남자들과 있을 때와 달리 무호 앞에서는 낯을 전혀 가리지 않는 나를 보며 해지가 “너 무호 좋아하지?” 하고 쿡쿡 찌르곤 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다른 남자애들을 데리고 올 때도 있었지만 무호는 대개 혼자 우리에게 왔다. 해지 네 집으로 무호가 찾아오면 돈 없이 마땅히 갈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비탈길을 내려가 신작로를 건너 굴다리까지 걸어갔다. 장미, 백조 따위의 간판만 걸려 있을 뿐 창문도 하나 없는 허름한 방석집 앞을 시시덕거리며 지나면 굴다리가 나왔다. 굴다리까지 가봤자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별게 없었다. 굴다리 너머에는 마을버스 차고지로 쓰이다가 버려진 부지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풀이 무성하던 그곳에는 커다란 아카시아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허리춤까지 자란 개망초와 키 큰 해바라기가 차례로 꽃을 피우던 얕은 구릉이 있었다. 우리는 이미 무용해진 그곳에 다다르면 아무데나 주저앉아 건전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대개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랄지, 장래에 대한 이야기랄지 뭐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이미 무너져버린 담벼락을 평균대 삼아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 높지 않은 담이었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 양팔을 벌리고 걸으며 나는 정주민이 없는 나라에만 정차하는 기차를 상상하곤 했다. 좁은 담 위를 휘청휘청 오가면서 주로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어쩌다 아이들이 우리 가족에 대해 물으면 간혹 내 얘기를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오 남매 중에 장남이기 때문에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해왔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즐겨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했고, 그래서 기타 연주자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기꺼이 꿈을 포기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는 늘 신이 나서 평소와는 달리 제법 큰 목소리로 떠들었을 것이자. 아버지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소리 나는 대로 아버지가 적어준 가사를 보면서 짐 리브스나 존 덴버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던 기억이나, 음악 실기시험을 볼 때면 솔-솔-미-파-솔, 리코더 부는 법을 아버지에게 배웠던 기억 같은 것에 대해서. 나는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돼지갈비라도 사드릴 때면 드시기 좋게 살코기만 가위로 잘라드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떨어질 거 같으니까 이제 좀 내려와.”
아이들이 위태롭게 걷는 내게 소리 지르면 나는 마지못한 척 풀밭에 앉아 있는 그들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풀밭에 앉으면 엉덩이가 이내 축축해졌다. 아이들은 졸업하면 각기 기술을 배우는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해지는 미용을 배울 거라고 했고 무호는 정비공이 될 거라고 말했다. 언젠가는 해외 패션쇼에 오르는 모델들만 담당하는 헤어디자이너가 될 거라는 둥, 유명한 독일 회사의 자동차를 설계하고 말겠다는 둥, 석양이 비쳐들어 홍조를 띤 얼굴로 아이들이 그려 보이는 미래는 하나같이 터무니없었다. 그들이 그리는 미래가 비눗방울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오를수록 나는 이상하게도 점점 불쾌해졌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그것도 명문대 합격률이 높은 사립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것은 나 하나였고, 나는 아이들이 떠드는 동안 말 없이 내 주위의 강아지풀을 손으로 뜯었다. 내가 담배를 처음 배운 것은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훅, 들이쉴 때 같이 마셔.” 아이들이 나를 재촉하고 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훅, 숨을 빨아들였다. 담배 연기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내 기도가, 내 폐가 뜨거워졌다. 내가 캑캑거리며 기침을 하는 모습에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만약 성적이 떨어졌다면 부모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사를 가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고 다행히 성적도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해지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동안 나는 착실히 공부를 했고 교칙을 어기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나를 대놓고 무시하지 않던 까닭은 성적 때문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이 우리 동네 아이들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그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행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배신자가 된 것 같은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해지가 공부를 조금만 했다면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 아버지는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라고 언제나 내게 말했다.
재개발을 할 거라는 소문이 동네에 돌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봄쯤이었다. 소문이 구체화될수록 동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져갔다. 부모님은 우리가 살던 동네가 하루빨리 허물어져버리길 바랐고,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은 골목을 쓸었고, 골목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면 묵례를 했다. 나는 우리 중학교 졸업생 중 소수만 진학할 수 있었던, 강 건너의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말수가 조금 더 줄었다. 우리 동네까지는 스쿨버스가 오지 않아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스쿨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일반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는데, 그래서 나는 몇 배나 더 피곤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뒤 버스를 갈아타고 밤늦게 집에 오는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해지와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간혹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해지가 집에 없기 일쑤였다. 그렇게 집에 일찍 돌아와 봤자 혼자 있게되는 날들에는 처음 이사 왔던 날 아버지가 내게 아파트 단지를 보여주었던 옥상에 쭈그려 앉아, 사라져가는 태양의 빛줄기가 쇠락한 골목과 남루한 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그러면 그 손길을 따라, 동네는 쪽잠을 청하는 고단한 노인처럼 주름이 깊게 팬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해가 지고 나면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몸에 한기가 깃들어 더 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어지면 그제야 나는 쭈그렸던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라한 골목이 어째서 해가 지기 직전의 그 잠시 동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지는지, 그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풍경을 말 없이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 깃드는 적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달콤하고 또 괴로워 울고 싶었을 뿐. 재개발추진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재개발하는 것이 이익인지 손해인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동네는 재개발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비상대책회의장으로 정해진 무호 네 집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 대책회의를 열었다. 턱없이 높은 추가 분담금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재개발에 반대했다. “동의율이 낮으면 조합 설립이 무산될 수도 있대.” 오랜만에 만난 무호가 말했다. “응.” 컴컴한 골목 한쪽에서, 고양이 아저씨가 두고 간 사료를 허겁지겁 먹는 고양이들을 보면서 나와 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지 네 가족은 세입자였으므로 동의하지 않을 권리가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무호는 이제 키가 나보다 훨씬 컸고 어깨도 예전보다 두 배가량 넓어졌다. 그렇지만 무호에게는 여전히 웃을 때 아기 같은 구석이 있었다. 무호가 동네의 버려진 폐가에서 어떤 여자아이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로 나왔다는 소문을 누군가가 내게 전하기도 했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무호는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예전처럼 순진한 얼굴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우리 셋에게는 공통점이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끔 버려진 차고지에 앉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웠다.
언젠가 한번은 해지였는지 무호였는지 둘 중 하나가 넌 좋은 대학에 가서 부자가 되겠지, 같은 말을 내게 했다. 그런 말을 내 앞에서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해지는 만날 때마다 학교에서 배우는 미용 기술에 대해서, 마네킹의 가발을 자를 때의 고충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무호는 우리 사이에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가 더 많았다.
해가 한 번 더 바뀌고 내가 열여덟 살이 되자 이사를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해지 네 식구는 그 동네를 가장 먼저 떠난 무리에 속했다. “갑자기 집주인 네가 들어와 살겠다고 연장을 안 해 준대.” 해지는 덤덤한 척 입술에 립글로스를 바르며 전했다. “재개발한다는데 우리가 안 나가고 버틸까 겁나 그런 거겠지, 뭐.” 무호가 밤늦은 시간 하교하던 나를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 나오겠다고 한 것은 해지 네 이사가 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월이었다. 무호가 나를 마중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인적이 드문 버스 정류장에 홀로 서 있는 무호를 봤을 때 나는 이상하게 조금 설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단둘이 비탈을 올랐다. “가방에 뭐가 이렇게 많이 들었냐. 키 안 크게.” 무호가 내 가방을 번쩍 들어 대신 둘러멨다. 무호가 이제는 나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갑자기 실감났다. 헬스장에서 벤치프레스를 열심히 한다더니 무호의 팔뚝은 예전보다 훨씬 굵어져 있었다. 나는 무호가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문 속에서 무호와 옷이 헝클어진 채 폐가에서 나왔다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우리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그 무렵 화제가 되고 있던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공통의 화젯거리가 별로 없었다. 나도 무호도 골목 곳곳에 걸려 있는 붉은 깃발을 보았지만 둘 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즈음 재개발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가파른 언덕을 말 없이 오르자 밤이 내린 공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 아저씨를 못 본 지 좀 되었네.” 무호는 아저씨를 며칠 전에 보았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고양이들을 두고 갈 수가 없어 재개발에 반대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아저씨한테 고양이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대.” 무호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가 제일 만만하니까 괜히 화풀이하는 거지.” 재개발을 찬성하는 이들이 반대하는 주민들의 가게나 집을 찾아가 위협하고 행패를 부린다는 소문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우리는 다시 말 없이 걸었다. 무호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여기까지면 됐어. 이제 가.” “아니야,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 우리집 쪽으로 꺾어지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놀란 듯 안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집 앞에 도착했을 때, 외등 아래서 무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해지가 떠나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데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주 토요일 밤에 나는 무호의 부탁대로 해지를 옛 마을버스 차고지로 데리고 갔다. 해지는 그날 오렌지색 스웨터를 입고 나왔다. 털이 날리는 오렌지색 앙고라 스웨터에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을 입고 무슨 일이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 내게 이끌려 비탈을 내려가던 해지. 헐벗어가는 아카시아나무 뒤에서 무호가 초 대신 폭죽을 꽂은 케이크를 들고 나오자 해지는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무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닌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 셋의 관계의 축이 한축으로 기울어버렸음을 깨닫는 순간 느낀 허전함이 나를 착각하게 만든 것뿐이었을까. 하지만, 아무튼, 그 순간에는, 크림 범벅의 케이크 위로 반짝이는 불꽃과 그 너머 어른거리는 무호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사실은 내가 무호를 얼마간 좋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렇더라도, 나와 무호의 삶이 교차할 수 있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고, 우리는 이제 몇 년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은 겹쳐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생각도. “나랑 사귈래?” 이제는 남자의 몸을 가진 무호가 수줍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 해지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관객의 역할에 익숙해진 배우처럼 박수를 쳤다. 내 박수 소리에 쑥스러운 듯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는 같이 웃었다. 폭죽의 불꽃이 짙푸른 어둠 속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탔고, 땅에 떨어지자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가끔, 그곳을 지날 때가 있다. 예전에 굴다리가 있었고 창 없는 방석집들이 즐비하던 거리는 이제 흔적도 없이 고층건물로 뒤덮여 있다. 우리 가족은 포클레인이 폐가들을 부수기 전에 이사를 했고, 그 후 한동안 나는 그 지역에 다시 가지 않았다. 고양이 아저씨처럼 종국엔 쫓기듯 떠나간 그 동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쩌다 버스를 환승하기 위해, 이제는 공항철도가 놓인 그 거리를 걷다보면 그 시절의 어떤 장면들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이를테면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 그날의 기억 같은 것.
해지는 그렇게 떠났다. 우리는 자주 통화했고 어쩌다가 만났지만 점차 거의 만나지 않게 될 거였다. 무호와 단둘이 만난 적은 그 후로 없었다. 눈이 귀한 지방에서 나고 자란 나는 눈을 매일 기다렸지만 그해 겨울은 정말 눈이 오지 않았다.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한랭기단의 영향으로 얼굴이 에일 정도의 강추위만 계속되었다. 겨울이 되자 동일한 체크무늬 명품 목도리를 일제히 꺼내 두르고, 방학에는 싱가포르로,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무엇보다 야간 자율학습은 의미 없다는 듯이 담을 넘어 도망가는데도 언제나 성적이 나보다 잘 나오던 아이들 틈에 있다 보니 나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외국소설이든 잡지든, 심지어 국어사전까지, 활자에 굶주린 사람처럼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읽어대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뭔가를 읽고 있는 동안만큼은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었고 시간이 한 움큼씩 없어졌는데,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날도 일요일이었지만 학교 도서실에 앉아 제임스 조이스나 외젠 이오네스코의 책 같은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읽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을 거다. 매서운 추위에 잔뜩 웅크린 채 비탈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싸움이 났어요.”
누군가가 외쳤다. 나는 두렵지만 궁금한 마음에 이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곳, 석유가게 앞에는 이미 몇몇의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이따금씩 나는 후회했다.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는 아주머니들의 어깨와 어깨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어맞고 있는 고양이 아저씨를 보았다.
“저 사람들이 고양이한테 약을 먹였다나봐.”
구경꾼 중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내들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고양이 아저씨는 꺾어진 허리를 자꾸만 곧추세우며 일어섰다. 나는 두려웠다. 아저씨가 죽을까봐. 언제나 핏발이 붉게 선 눈 때문에 무서워 보이던 아저씨의 얼굴은 더욱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아저씨를 때리던 이들은 싸움을 그만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아저씨는 돌아서는 그들을 향해 자꾸만 달려들었고 또 얻어맞았다. 왜 아무도 말리지를 않지? 나는 다급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머니나 할머니였고 남자라고는 꼬마들밖에 없었다. 고양이 아저씨가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비명소리는 아니었고 무슨 말을 한 것이 분명했지만 발음이 부정확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라면,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였다. 나는 뒤로 돌아서 달렸다. 평소에 가던 길을 우회해서 집까지 뛰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빨리 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까지 알지 못했었다. 집으로 꺾어지는 골목에 들어서자 거기엔 정말 죽은 고양이가 있었다. 우리집 앞을 자주 지니던 고양이, 입 주위로만 별 모양으로 흰 털이 나 해지가 별이라고 부르던 그 고양이였다 죽은 고양이는 네 다리를 위로 쳐든 채 배를 보이며 시멘트 바닥에 죽어 있었다. 눈을 뜬 상태로 차갑고 꼿꼿하게 굳어 있던 고양이. 나는 가방에서 열쇠를 찾았다. 열쇠가 열쇠구멍에 잘 들어가지 않아서 그제야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 아빠.”
집에 들어가자 훅, 따뜻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내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던 게 틀림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무슨 일인가 놀라서 방에서 뛰어나왔으니까.
“아빠, 아빠. 고양이 아저씨가 맞고 있어요.”
그 뒤로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 울면서 아버지에게 내가 목격한 것을 설명한 것 같다. 아저씨의 얼굴이 어떻게 부어 있었는지, 그의 몸이 발길질에 어떻게 둥그렇게 말렸다가 다시 가까스로 펴졌는지. 그리고 피가, 피가 어떻게 흘러내렸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다 들으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을 부르고, 사람들은 불러서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줄 거라고. 그러나 놀랍게도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어머니에게, “얘 물 좀 떠다줘. 숨넘어가겠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쪽을 바라보면서는 이렇게 천천히 덧붙였을 뿐이다.
“얼굴이 꽁꽁 얼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가서 몸 좀 녹여라.”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재개발 추진이 지연되는 데 대한 분풀이로 독극물을 주입한 닭고기를 동네 여기저기에 뿌려둔 것은 찬성파 중 누군가였다.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그것을 먹고 골목 곳곳에서 죽어나갔다. 아버지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아버지는 성정상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았던 것뿐일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그저 우리 가족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왔을 뿐이고, 그런 갈등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어머니가 건네준 물을 받아 마시고도, 시키는 대로 방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앉아 있으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울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퉁퉁 부은 눈을 가까스로 떴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잠들었는지 집안이 조용했다. 그렇게, 어두운 방안에 무거운 눈을 끔벅이며 잠시 앉아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집 앞에 죽어 있던 고양이를 묻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생각이었다. 나는 한 번도 고양이를 만져본 적이 없었고, 무엇인가의 사체를 묻어본 적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어디에 어떻게 묻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입고 있던 옷 위에 파카를 걸쳤다. 고양이는 차가운 바닥에 아직 그대로 있을 거였고,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저 구경만 하고 있던 고양이 아저씨를 떠올렸고, 안방으로 들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내 얼굴을 자꾸만 쓸어내리면서 한숨 자라고, 나를 토닥이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파카의 지퍼를 올렸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깰까봐 전등을 켜지 않고 주변을 손으로 더듬으며 거실로 나가면서, 고양이를 수건 따위로 감싸서 공터 옆 화단에 묻어주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현관 앞에 서자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밤이 되었으니 바깥은 낮보다 기온이 더 떨어져 있을 것이었다. 며칠째 영하 십오 도 안팎의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기 위해 현관으로 발을 내디뎠다. 현관 바닥에 맨발이 닿자 생각보다 너무 차가워 몸서리가 쳐졌다. 고양이가 아직 그대로 있긴 한 건가. 옷을 너무 얇게 입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누군가가 벌써 치워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살던 집의 현관문 윗부분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동그랗게 유리창이 나 있었다. 실내와의 온도차 때문에 유리창에 김이 서려 바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동화를 구겨 신은 채 창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고양이 사체가 아직 골목에 버려져 있는지만 일단 살짝 확인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내 손자국을 따라 투명해진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가만히 대었다.
“세상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눈. 자락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 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집마다 매달려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 사이로 새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풍경을, 그저 황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