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휴일
전날 고향 선후배님과 걷던 낙엽길이 눈에 밟혀 남편과 드라이브에 나섰다.
이윽고 접어든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변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고운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팔각정에는 뜻밖의 풍경들이 늦가을의 정취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흐린 날씨 덕에 조망의 깊이는 알지 못해도 앞산 자락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산등성이가 마치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묵직하면서도 운치 있게 허연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예전에 보지 못한 풍경을 담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바람이 한꺼번에 덤비는 바람에 다음을 기약하며 광화문을 향해 내달렸다.
어느덧 경복궁에 있는 고궁박물관을 느긋하게 관람하는 동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주변을 돌아다녀도 마음 편히 주차하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지 못하자 얼마 전 딸애가 수소문 끝에 알아낸 여의도 IFC 몰에 있는 베트남 식당이 생각났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런치타임이 지나서 지금은 재료 준비 중이라 베트남 쌀국수밖에 되질 않는단다. 남편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는 베트남시절 남편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껌승의 맛을 볼 수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식당 중 유일한 곳이었던 것이다.
아쉬운데로 베트남 쌀국수의 특유 향을 맡으며 이제 막 젓가락을 들 찰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오빠였다. 직원이 강원도에서 절인 배추를 가져왔는데 너무 많으니 나눠서 하잔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시장에서 김장에 필요한 재료와 보쌈을 만들 고기도 샀다. 아침부터 김장을 계획했더라면 오늘의 드라이브는 가당치도 않은 일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때로는 예측불허의 시간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윽고 찹쌀 풀에 준비한 재료를 섞어 배춧속을 넣다 보니 배추가 다시 강원도 밭으로 돌아갈 듯 기세등등하였다. 그것을 따로 모아 놓고 소금 간을 좀 더할까 하다가 처음 버무렸을 때 넣던 액젓이 생각나 적당히 넣고는 다시 맛을 보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싱겁긴 마찬가지인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맛을 보는 순간 눈앞이 아득했다.
그건 얼마 전 당구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손님 접대용으로 헤이즐넛을 적절하게 섞어 끓여둔 커피였다. 그날 친구가 내준 커피 맛을 본 내가 아주 맛있어하자 이제 갓 끓였다며 한사코 2리터 한통을 건네주었던 것인데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없어 말문을 닫은 남편을 보고도 나는 한참 동안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누가 아는가? 겨우내 헤이즐넛이 가미된 김장의 참맛을 느낀 내가 천기누설을 하는 순간
김치의 역사는 새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