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30강
맛차리숫땅
Maccharisuttaṃ
인색 경(S1:32)
2.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티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삔디깟사 아라메.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아타 코 삼바훌라 사뚤라빠가이까 데와따요 아빅깐따야 랏띠야
Atha kho sambahulā satullapakāyikā devatāyo abhikkantāya rattiyā
이빅깐따완나 께와라깝빵 제따와낭 오바세뜨와 예나 바가와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yena bhagavā
떼누빠상까밍수 우빠상까미뜨와 바가완땅 아비와데뚜와 에까망땅 앗탕수.
tenupasaṅkamiṃsu,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aṭṭhaṃsu.
에까만땅 티따 코 에까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ek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2. 그때 많은 사뚤라빠 무리의 천신들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매우 멋진 모습을 하고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어떤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아빅깐따완나(abhikkantavaṇṇā)는 아름다운 색깔, 아름다운 모습, 멋진 모습입니다. 여기서 완나(vaṇṇā)는 색깔, 빛.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천신들은 반짝반짝 빛납니다. 천신들의 빛은 강아지나 다른 동물은 보는데 우리가 못 보는 빛도 있습니다. 인간이 본적이 없는 빛도 있어서 볼 수 없는 빛도 있습니다. 선정의 집중력이 있는 스님들은 이런 빛을 많이 보셨다고 합니다. 부처님 옆에 아라한들이 계셨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빛을 보셨습니다. 천신들은 한 밤 중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고 밤이 아주 깊지 않을 때라고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밤에 천신들이 부처님께 온 것입니다. 여기서는 제따 숲 전체를 환하게 밝히면서 왔다고 했습니다. 어떤 천신들은 몸을 빌려서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천신들은 빛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왔다고 봐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아래 천상에서 위 천상으로 갈 수는 없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천신들은 인간 세계에 내려올 수 있습니다.
맛체라 짜 빠마다 짜 에왕 다낭 나 디야띠,
Maccherā ca pamādā ca evaṃ dānaṃ na dīyati,
뿐냥 아깡카마네나 데이양 호띠 위자나따띠.
Puññaṃ ākaṅkhamānena deyyaṃ hoti vijānatāti.
인색하고 게으르면 보시를 하지 않습니다.
공덕을 바라고 아는 자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이 경은 보시의 중요함을 이야기 하는 경입니다.
맛차리(Macchari)는 이기적인, 샘내는, 탐욕스런, 인색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일 때 남에 대해서 시샘을 하고 탐욕으로 보며 모든 것에서 인색합니다. 그러므로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색함은 자신의 번영을 숨기려고 하는 인색함입니다. 내가 돈이 있는데 돈이 없다고 말하고 시간이 있는데 없다고 말하는 등의 뜻입니다. 사실 인색하다는 말은 아귀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귀의 형성조건은 인색하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이 인색하면 현재 아귀로 살고 있으며 죽어서는 아귀가 됩니다.
게송 본문에 ‘인색하고 게으르며 보시를 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은 자신이 성공한 일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숨기려는 특징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는 알아차리지 못해서 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명예를 가져다주고, 번영을 가져다주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보시를 함으로써 명예와 번영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보시를 하지 않음으로써 놓치는 것입니다.
다음 문장에 ‘공덕을 바라고 아는 자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에서 ‘공덕을 바라고’라는 것은 뿐냥 아깡카마네나Puññaṃ ākaṅkhamānena)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공덕에 대한 의미를 알아서 공덕을 지으려는 의도를 말합니다. 공덕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어서 공덕을 지으려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덕을 바라고’ 다음에 있는 ‘아는 자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에서 ‘아는 자’란 보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며 인과응보입니다. 이러한 공덕의 결과를 아는 자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보시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공덕을 의미하는 뿐냐(Puñña)는 주석서에 의하면 선(禪)을 의미하는 쟈나(jhāna)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정의 공덕을 뜻합니다. 쟈나(jhāna)는 색계, 무색계 선정수행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禪)은 선정수행으로 사마타수행입니다. 위빠사나는 통찰지혜수행으로 두 가지 수행은 다릅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선정의 공덕은 세 가지 의도로 분류합니다. 이전의 의도라는 뜻의 뿝바 쩨따나(pubba cetanā)가 있고, 나중에 의도라는 뜻의 아빠라 쩨따나(apara cetanā)가 있고, 해탈하는 의도라는 뜻의 문짜 쩨따나(muñca cetanā)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이 의도란 선정수행을 할 때 근접삼매의 의도를 말합니다. 나중에 의도란 나중에 선정에 들어서 생겨난 삼매의 증득이라는 의도를 말합니다. 삼매의 증득이란 사마빳띠(samāpatti)를 말하는데 이는 선정에 도달해서 입정을 즐기는 상태입니다. 해탈의 의도란 오염원들을 억압한 뒤에 일어나는 첫 번째 근본삼매의 의도를 말합니다. 이때 근본삼매가 빠탐 압빠나(paṭham appanā)입니다.
보시의 3가지 마음인 보시를 하는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뿝빠 쩨따나(puppa cetanā)는 이전의 의도입니다. 보시를 실천하기 전에 보시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대중공양을 올려야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둘째, 문짜라 쩨따나(Muñcarā cetanā)는 해탈의 의도입니다. 또는 해방의 의도라고도 합니다. 보시하는 과정의 마음입니다. 보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아빠라 쩨따나(Apara cetanā)는 나중에 의도입니다. 보시하고 나서의 마음입니다. 보시한 것을 후회하거나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보시하고 나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보시가 공덕을 더 커지게 합니다.
이상 세 가지의 의도를 내야 보시가 공덕이 됩니다.
빠마다(Pamāda)는 게으름, 태만, 방일(放逸), 알아차리지 못한 등의 뜻입니다. 방일(放逸)은 게으름이라는 뜻도 있지만 자기 멋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게으름은 보시를 거절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돈을 내가 보시하면 내 돈이 없어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알아차림이 없는 방일함입니다. 이 보시를 하면 내가 번영해지고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보시에 대한 생각을 안 한다고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운동을 해서 베풂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주석서에 왜 하필이면 운동선수를 예로 들었을까 생각해 보니 경쟁심 때문에 보시를 안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보시 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자들은 가족들이 운동선수가 안됐다고 후회할 필요 없습니다. 빠마다(Pamāda)의 반대가 되는 말이 압빠마다(appamāda)입니다. 압빠마다(appamāda)는 게으르지 않음, 주의 깊음, 열심, 진지함, 불방일(不放逸)이라는 뜻인데 부처님께서 많이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다나(dāna)는 보시, 베풂, 자선, 증여, 관대함입니다. 보시(報施)는 선한 일을 하는 선행입니다. 10가지 바라밀 공덕의 첫 번째가 보시입니다. 이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을 보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보시에는 재물보시와 법보시가 있습니다. 법보시는 법을 펴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보시는 관용이 있는 마음일 때 가능하며 관용은 탐욕이 없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탐욕과 보시는 상반된 마음입니다. 보시를 하면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마음이 억제되고 남을 돕는 이타적인 마음을 내게 되어 두 가지의 기쁨이 따릅니다.
보시를 할 때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가 있고, 아예 보시를 하지 않는 마음이 있고,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가 있는데 여기에 따라 나타나는 과보가 다릅니다.
보시를 할 때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를 ‘공덕을 바라는 행’이라고 합니다. 공덕을 바라는 행에는 ‘욕계 공덕행’이 있습니다. 욕계 공덕행에는 인간과 여섯 개의 욕계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포함됩니다. 다음에 ‘색계 공덕행’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부동행(不動行)’이 있습니다. 이때의 부동행은 너무 오래 동안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 공덕행’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예 ‘공덕이 없는 행’을 하면 사악도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로 태어납니다. 이상은 모두 윤회하는 세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보시를 하면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하여 출세간의 과보를 받아 열반을 성취하여 윤회하는 세계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지고의 행복이고 깨달음이며 해탈의 자유입니다. 이런 모든 결과들이 선한 공덕인 보시로 시작합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위에서 아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마술과 같이 칼을 먹고 있었습니다. 왕이 그 사람 참으로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보살일 때 그보다 더 대단한 것 있다고 했습니다. 보살은 왕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보시를 한다는 생각 자체만으로 칼을 먹는 마술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하겠다는 의도를 갖기가 힘들고 다서 이것을 실천하기 힘들고, 보시를 하고 나서 만족하는 것이 힘듭니다. 1, 2, 3단계에서 보시 마음을 내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이 실천함이고 실천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보시하고 만족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보시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의 생각이 의도입니다. 다시 중간에 마음이 변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마음이 같아야 공덕이 됩니다. 자녀들이 말 안 들으면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고 속상해 합니다. 부모들은 속상해 할 필요 없습니다. 보시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애를 행하는 첫 번째 조건이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면 사람이 자애가 생기고 자애가 생기면 보시를 합니다.
본문 게송의 두 번째 문장은 ‘뿐냥 아깡카마네나 데이양 호띠 위자나따띠(Puññaṃ ākaṅkhamānena deyyaṃ hoti vijānatāti)는 ‘공덕을 바라고 아는 자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뿐냥(Puññaṃ)은 복, 공덕, 공적, 선행을 뜻합니다. 다음 단어인 아깡카(ākaṅkha)는 희망하다, 원하다, 바라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뿐냥 아깡카(Puññaṃ ākaṅkha)는 ‘공덕을 바라는’입니다. 다음에 데이양(deyyaṃ)은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띠(hoti)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간다고 하는 것을 ‘가는 것이다’로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위자나따(Vijānatā)는 아는 마음, 앎을 말합니다.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3.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마 가타요 아바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ā gāthāyo abhāsi.
3.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앞에서 게송으로 여쭈었다.
얏세와 비또 나 다다띠 맛차리 따데와다다또 바양,
Yasseva bhīto na dadāti maccharī tadevādadato bhayaṃ,
지갓차 짜 삐빠사 짜 얏사 바야띠 맛차리,
Jighacchā ca pipāsā ca yassa bhāyati maccharī,
따메와 바랑 푸사띠 아스밍 로께 빠라미 짜.
Tameva bālaṃ phusati asmiṃ loke paramhi ca.
인색한 자는 두려워서 베풀지 않으니
그 두려움은 베풀지 않은 자의 것입니다.
인색한 자가 두려워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은
어리석은 그를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만납니다.
따스마 위네이야 맛체랑 닷자 다낭 마라비부,
Tasmā vineyya maccheraṃ dajjā dānaṃ malābhibhū,
뿐냐니 빠라로까스밍 빠띳타 혼띠 빠니난띠.
Puññāni paralokasmiṃ patiṭṭhā honti pāṇinanti.
인색함을 길들이는 것과 더러움을 극복하여 베풀어야 합니다.
공덕은 저 세상에서도 생명을 가진 자들의 지주가 됩니다.
우리가 보시하지 않는 이유는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보시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지면 나는 굶어 죽는다는 마음에 두려워서 보시를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태어날 때마다 그 두려움에서 못 벗어난다고 합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보시도 못하고 다음에 태어나 또 보시 못하고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라비후(malābhibhū)라는 뜻의 인색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색함은 꽃과 같이 지고 피고 합니다. 그러나 보시를 하게 되면 인색함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므로 인색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베풀어야 합니다.
바라(Bāla)는 어리석은, 무지, 어리석은 자, 바보를 뜻합니다. 뿌사띠(Phusati)는 대다, 스치다, 접촉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시 만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색함에 길들여져서 이 세상에서도 만나고 다음 세상에서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행복하지 않고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스밍 로께(asmiṃ loke)는 이 세상입니다. 다음 빠라미(Paramhi)는 다음 세상입니다.
다음 문장에 위네이야(Vineyya)는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네이야 맛체랑(vineyya maccheraṃ)은 인색함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인색함을 길들여서 키운다는 뜻이 아니고 인색함을 길들이는 것과 더러움을 극복하여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닷자(dajjā)는 주다, 제공하다, 허용하다는 뜻입니다. 마라비부(malābhibhū)는 더러움을 정복하다는 뜻입니다. 마라반다(malabandha)를 변비라고 하는데 그래서 대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라비부(malābhibhū)는 더러움을 정복한다는 뜻에서 인색한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라서 인색의 꽃입니다. 누구나 보시를 하면 인색한 것이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마라비부(malābhibhū)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색함은 꽃과 같이 지고 피고 합니다. 보시를 하게 되면 인색한 더러움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므로 인색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합니다.
뿐냐니 빠라로까스밍 빠띳타 혼띠 빠니난띠(Puññāni paralokasmiṃ patiṭṭhā honti pāṇinanti)에서 빠니나(pāṇina)는 생명을 가진, 입니다. 빠라로까스밍(paralokasmiṃ)은 다음 세상입니다. 빠띳타(patiṭṭhā)는 확립된, 지지받는, 지지된, 정립, 확립, 지주(止住)입니다. 지주(止住)는 멈추어서 머문다는 뜻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면 나의 지주가 됩니다. 그래서 ‘공덕은 저 세상에서도 생명을 가진 자의 지주가 된다.’입니다. 그러므로 공덕을 쌓으면 이번 생에서도 의지처가 되고 다음 생에서도 의지처가 되어 선한과보를 받습니다.
4.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마 가타요 아바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ā gāthāyo abhāsi.
4.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떼 마떼수 나 미얀띠 빤타낭와 사합바장,
Te matesu na mīyanti panthānaṃva sahabbajaṃ,
압빠스밍 예 빠웻찬띠 에사 담모 사난따노.
Appasmiṃ ye pavecchanti esa dhammo sanantano.
먼 길을 함께 떠난 동료들처럼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갖는 자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죽지 않으니
이것은 오래된 법칙입니다.
압빠스메께 빠웻찬띠 바후네께 나 딧차레
Appasmeke pavecchanti, bahuneke na dicchare,
아빠스마 닥키나 딘나 사핫세나 사망 미따띠.
Appasmā dakkhiṇā dinnā sahassena samaṃ mitāti.
적게 가져도 어떤 자들은 나누어 갖고
많이 가져도 어떤 자들은 베풀지 않으니
적게 가져도 베푸는 보시는 가치가 천 배는 됩니다.
마떼수(matesu)는 죽은 자들 가운데, 라는 뜻입니다. 이는 베풀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죽는 자들 가운데, 라는 말입니다. 베풀지 않는 습성을 가진 자들의 재물은 죽은 자들의 재물과 같습니다. 죽은 자들의 재물은 이미 그의 재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하는 습성을 가진 자들은 이러한 죽음 가운데서도 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는 이미 죽기 전에 보시를 해서 그 공덕을 다음 생으로 가지고 가기 때문에 재물도 살고 공덕도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떼 마떼수 나 미얀띠(Te matesu na mīyanti)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죽으면 재산은 가지고 가지 못해서 끝나지만 공덕을 쌓은 자는 다음 생에 공덕의 과보를 받아 죽어도 끝이 아닙니다. 또 공덕을 쌓은 과보로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면 윤회가 끝나서 죽어도 다시 죽지 않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서 재산을 이 사람에게 주세요, 저 사람에게 주세요, 라도 말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보시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 길을 같이 가는 사람들은 같이 가지고 온 것을 나누어 먹습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나누어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 인과응보는 ‘오래된 법칙(esa dhammo sanantano)’입니다. 빠웻찬띠(pavecchanti)는 베푼다, 주다, 수여하다는 뜻입니다. 베풀지 않은 습성을 가진 죽은 자들의 재물은 죽은 자들의 재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보시하는 습성을 가진 자들은 이러한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죽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5.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마 가타요 아바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ā gāthāyo abhāsi.
5.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둣다당 다다마나낭 둑카랑 깜마 꿉바땅
Duddadaṃ dadamānānaṃ dukkaraṃ kamma kubbataṃ,
아산또 나누꿉반띠 사땅 담모 두란와요.
Asanto nānukubbanti sataṃ dhammo duranvayo.
베풀기 어려운 것을 베풀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는 자는
참되지 않은 자들은 따라 하지 못하니
참된 자들의 법은 실로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따스마 사딴짜 아사땅 나나 호띠 이또 가띠,
Tasmā satañca asataṃ nānā hoti ito gati,
아산도 니라양 얀띠 산또 삭가빠라얀띠.
Asanto nirayaṃ yanti santo saggaparāyanāti.
참된 자들과 참되지 않은 자들의
태어날 곳은 서로 다릅니다.
참되지 않은 자들은 지옥에 태어나고
참된 자들은 바르게 천상을 향합니다.
그래서 이 게송은 참된 자들과 참되지 않은 자들의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에따다오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etadavoca.
깟사 누 코 바가와 수바시딴띠.
kassa nu kho bhagavā subhāsitanti.
6. 그때 어떤 천신이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누구의 말이 잘 말한 것입니까?
바가와(Bhagavā)
세존
7. 삽바상 워 수바시땅 빠리야에나. 아삐 짜 마마삐 수나타.
Sabbāsaṃ vo subhāsitaṃ pariyāyena. Api ca mamapi suṇātha.
담망 짜레 요삐 사문자깡 짜레 다란짜 뽀상 다다맙빠까스밍,
Dhammaṃ care yopi samuñjakaṃ care Dārañca posaṃ dadamappakasmiṃ,
사땅 사핫사낭 사핫사야기낭 까람삐 낙간띠 따타위닷사 떼띠.
Sataṃ sahassānaṃ sahassayāginaṃ Kalampi nāgghanti tathāvidhassa teti.
7. 그대들 모두 방편적으로 좋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말도 들어보라.
이삭을 주워서 연명을 하더라도 항상 법을 실천하고
아내를 부양하며 가진 것이 적더라도 보시를 실천하면
천의 보시물로 베푸는 보시자의 백 천 배의 보시도
이 사람의 오직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한다.
담마 짜레(Dhammaṃ care)는 법을 실천하고, 라는 뜻입니다. 이때의 법은 열 가지 유익한 법을 말합니다. 이것이 십선업도(十善業道)입니다. 살생을 하지 않는 것,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이간질을 하지 않는 것, 거친 말을 하지 않는 것, 경솔한 말을 하지 않는 것, 탐욕을 갖지 않는 것, 성냄을 일으키지 않는 것, 삿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사땅 사핫사나(Sataṃ sahassāna)는 백 천배를 말합니다. 이 말은 천의 천 배에 다시 백을 곱한 숫자입니다. ‘천의 보시물로 베푸는 보시자’는 천 명의 비구에게 보시하거나 천 냥의 돈으로 구입한 보시물로 보시하는 자를 말합니다. 다음에 ‘백 천 배’라는 것은 앞서 밝힌 것처럼 천의 천 배에 다시 백을 곱한 숫자로 이 돈으로 음식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시는 앞서 말한 가난한 사람이 하는 보시의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한 조각이라는 것은 16분의 1도 되고, 백분의 1도 되고, 천분의 1도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백분의 1을 말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이런 보시는 가난한 사람이 하는 보시의 천분의 1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진 자의 보시도 훌륭하지만 갖지 못한 자의 보시는 그만큼 더 큰 공덕을 쌓은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단위가 천이 많았습니다. 소 천 마리, 사슴 천 마리를 죽이는 것과 같이 천 단위로 무엇인가를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살생 때문에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붓다보이라는 사람은 천 마리씩 십만 마리를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도록 했습니다.
8. 아타 코 아빠라 데와다 바가완땅 가타야 앗자바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ntaṃ gāthāya ajjhabhāsi.
께네사 얀노 위뿌로 마학가또
Kenesa yañño vipulo mahaggato
세메나 딘낫사 나 악가메띠,
Samena dinnassa na agghameti,
까탕 사땅 사핫사낭 사핫사야기낭
Kathaṃ sataṃ sahassānaṃ sahassayāginaṃ
까람삐 낙간띠 따타위닷사 떼띠.
Kalampi nāgghanti tathāvidhassa teti.
8.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께 게송으로 여쭈었다.
그의 크고 고귀한 보시가
참된 사람 보시보다 가치 없는 것입니까?
천의 보시물 베푸는 자의 백 천 배의 보시도
참된 자의 한 조각에 왜 미치지 못합니까?
게송에 있는 얀노(yañño)는 제사, 자선, 희사, 보시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로도 쓸 수 있고 보시로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시로 쓰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천신들에게 행하는 제사는 보시의 개념으로 합니다. 제사 자체가 천신들에게 공물을 보시하는 것이며 또 제사에 동참하는 사제나 여러 사람들에게도 보시하기 때문에 제사와 보시를 동일하게 여깁니다.
옛날에 인도에서 천 개를 단위로 보시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천도처럼 큰 제사에 소 천 마리, 사슴 천 마리, 돼지 천 마리 등을 죽여서 제사를 지냅니다. 이런 보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도에 운동장에 모여서 천 마리씩 목을 자르는 종교문화가 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붓다보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20년 전에 살생축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새를 포함하여 전체 십만 마리를 죽이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지금도 어마어마하게 크게 이런 축제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살생을 강요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신이 기뻐하려면 피를 보여 줘야 한다는 형식으로 살생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생명을 죽이는 제사를 부정한 것입니다.
9. 아타 코 바가와 땅 데와땅 가타야 앗자바시.
Atha kho bhagavā taṃ devataṃ gāthāya ajjhabhāsi.
다단띠 헤께 위사메 니윗타
Dadanti heke visame niviṭṭhā
체뜨와 와디뜨와 아타 소짜예뜨와,
Chetvā vadhitvā atha socayitvā,
사 닥키나 앗수무카 사단다
Sā dakkhiṇā assumukhā sadaṇḍā
사메나 딘낫사 나 악가메띠.
Samena dinnassa na agghameti.
에왕 사땅 사핫사낭 사핫사야기낭
Evaṃ sataṃ sahassānaṃ sahassayāginaṃ
까람삐 낙간띠 따타위닷사 떼띠.
Kalampi nāgghanti tathāvidhassa teti.
9.그러자 세존께서 그 천신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어떤 자들은 바르지 못하게 살면서 보시를 하니
자르고 죽이고 고통 주는 것으로
그 보시는 눈물과 폭력으로 얼룩진 그러한 것이며
참된 사람이 베푼 것에 비하면 가치가 없다
.
천의 보시물 베푸는 이런 자의 백 천 배의 보시도
참된 자의 한 조각에 미치지 못한다.
이상이 인색 경의 내용입니다.
스리랑카도 옛날에 마약을 한 사람이 사원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대놓고 마약 판 것은 아니기에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떤 큰 스님이 이 분이 절을 지었다고 해서 이만큼의 공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공덕은 없는 것입니다. 보시를 할 때는 스스로 하는 보시가 중요합니다. 보시하기 전과 보시할 때와 보시한 후의 마음이 똑 같도록 해야 합니다. 보시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