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물이 솟아나는 곳에 가고 싶다. 그곳에서 함성을 듣고 싶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산물
김진숙
맨 처음 물은 작은 심장을 가졌을 거야
첫아이의 박동 소리 들었던 그날처럼
바람도 들었나 몰라 그 먹먹한 물소리
검은 돌에 입 맞추며 살아낸 길이었지
흐르다 멈추고 다시 흐르다 스며든 땅
더 깊게 파고들수록 솟구치는 함성이었지
그 내력 알 수 없지만 당신 몸에 닿으면
두 눈 맑게 하고 막힌 혈도 뚫었다는
할머니 넋들임까지 받아낸 생이었지
물허벅 물항아리 제주 여자 발자국 따라
세미물 두말치물에 나도 정성껏 손을 씻고
조반물 한 바가지로 아침상 차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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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물’이 “살아있는 물”이라는 걸 알게 된 게 차마 얼마 되지 않았다. 유년 시절 용천수를 물허벅에 길어오기도 하고 여름엔 바당에서 아이들과 헤엄치고 갯바위에서 몸을 씻던 그 물을 ‘산물’이라 불렀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해서 그렇게 부르는 줄만 알았다.
시인이 말하는 ‘맨 처음 물은 작은 심장을 가졌을 거’라는 추측은 신빙성이나 설득력의 문제가 아닌 ‘물’이라는 물질이 갖는 화학적, 물리적 관점을 넘어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심지어 정치적 이슈로 다뤄지고 있는 이 시대에 “시적 관점”으로 다가간 시적 상상의 문제다. 그것은 ‘첫아이의 박동 소리’로 치환시켜 ‘먹먹한 물소리’로 수렴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제주도는 전 세계 섬 중에 가장 화산이 많은 지역이라 소화산체인 오름과 그 주변에는 화산 쇄설물인 화산송이가 쌓여 있고 ‘검은 돌’ 현무암이 제주섬 일대를 덮고 있다. 시인이 ‘흐르다 멈추고 다시 흐르다 스며든 땅’으로 묘사한 것처럼 아직도 제주섬은 하나의 거대한 물탱크다. 비가 내리면 그 비는 화산송이, 화산암반을 20년 가까이 지나며 천연적으로 필터링된다. 그 물이 제주의 저항이자 항쟁이자 생명력이며 그것은 ‘솟구치는 함성’으로 ‘남도南島’의 성聲이다. 거기다가 시인은 ‘산물’의 삶을 제주 사람의 눈과 피와 넋의 영역에서 서사적敍事的 윤회輪迴를 노래한다.
산물을 길러오는 일은 힘든 노동이었다. ‘제주 여자의 발자국’은 반듯하거나 예쁘장하지 않았다. ‘물항아리’ 속 물이 출렁이면 어깨도 흔들렸고 무거우면 다리도 꺾였다. 사계리에서도 조천에서도 제주의 어디인들 용천수가 없던 곳은 없었다. 유의미한 수량水量의 첫 지하수 관정개발이 1961년 애월읍 수산리에서 시작되면서 서서히 상수도가 보급되고 세월이 물처럼 흘러 ‘조반물’을 마시던 제주의 아침도 변했다.
산물이 솟아나는 곳에 가고 싶다. 그곳에서 함성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