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소피아에서 1944년 외무 공무원의 딸로서 태어났으며, 얼마 못 가 불가리아가 공산주의에 억압받고 군주제가 폐지됨으로써 가족과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1960년 가수로 첫 데뷔하였고 그 여자가 1968년에 발표한 《La Maritza》의 가사에서 정치에 관계된 이유로 조국을 등져야 했던 어린 시절의 회한이 드러나 있다. 그 외에도 튀지니에서 출생한 프랑스의 피아노연주자 겸 작곡가 미셸 로랑(Michel Laurent, 1944년 12월 24일 ~ )에게서 《La Reine de Saba(시바의 여왕)》이라는 곡을 받아 불러 히트하였다.
프랑스의 1세대 록 가수 중 하나이며 프랑스 내에서 음반이 가장 많이 팔린 가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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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힛트곡>
1.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 (춤추러 갈때는 예쁘게)
1963년 영화 '우상을 찾아라'에 출연을 하면서 영화의 주제곡 춤추러 간다면 가장 아름답게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를 부르게 되었는데 이 노래는 당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가수며 작사, 작곡가인 '샤를 아즈나부르'가 작사를 하였고,작곡은 그의 매형 '조르주 가르 바렌츠'가 했는데 이 노래가 크게 히트를 하면서 그녀는 스타의 자리로 급상승하게 된다.
Ce soir, je serai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 Danser
Pour mieux evincer toutes celles Que tu as aimees Aimees
Ce soir je serai la plus tendre Quand tu me diras Diras
Tous les mots que je veux entendre Murmurer par toi Par toi
오늘 밤, 난 가장 아름다울 거예요 춤추러... 춤추러 간다면 말이에요
당신이 사랑한...사랑한 모든 여자들을 갈라놓기 위해 오늘 밤
난 가장 사랑스러울 거에요 당신이... 당신이 속삭이는
내가 듣고 싶은 그 모든 말들을 당신이 내게 속삭인다면... 속삭인다면 말이에요
Point par point Sera chiffonnee Et les cheveux que j'ai coiffes Decoiffes Par tes mains
Quand la nuit refermait ses ailes J'ai souvent reve Reve Que dans la soie et la dentelle
Un soir je serai la plus belle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
내가 원했고 내가 바느질한 원피스가 당신의 손길에 의해 완전히 흐트러지고
내가 빗은 머릿결 또한 헝클어지리라 난 바란답니다. 밤이 다시금 찾아오면 난 자주 꿈을 꾸지요
어느 날 밤 레이스로 장식된 비단옷을 입은 내가 춤추러 간다면 한껏 아름다울 거라고
가장 아름다우리라는 꿈을 말이에요 내 삶에 있어 부족한 숨결을 당신은 내게 줄지도 몰라요
Tu peux me donner le souffle qui manque a ma vie Dans un premier cri
De bonheur Si tu veux ce soir cueillir le printemps de mes jours
Et l'amour en mon cœur Pour connaitre la joie nouvelle
Du premier baiser Je sais Qu'au seuil des amours eternelles
Il faut que je sois la plus belle La plus belle pour aller danser
행복감으로 처음으로 외치는 탄성 가운데 비록 당신이 나의 청춘과 내 마음 속
사랑을 오늘밤 갖고 싶다 하더라도 첫 키스로 새로운 기쁨을 알기 위해
영원한 사랑의 시작에서 내가 가장 아름다워야 된다는걸 난 알고 있답니다
춤추러 간다면 가장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말이에요
2. La Maritza
1968년에 그녀의 조국 불가리아를 그리워하면서 부른 노래 '마리짜 강변의 추억'La Maritza을 전 세계적인 히트곡으로 만들어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까지 그녀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일본과 우리나라 팬들은 그 어떤 나라보다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1970 ~ 1980년대 가장 핫한 세계적인 스타로, 샹송 가수로 '프렌치 팝'의 선구자의 위치를 확실히 구축하게 되며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 끊임없이 연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3. Holidays
4. La Reine De Saba(The Queen of Sheba)
5. Ballade Pour Un Sourire (미소를 짓기 위한 발라드)
6. En écoutant la pluie (빗속을 둘이서)
<참고 문헌>
현대 불가리아의 최초의 독립국가는 부여족 출신 아스파루흐(Asparukh) 칸이 AD 681년에 건국한 ‘불가리아 제1제국’(First Bulgarian Empire, 681~1018)이다.
일찍이 고조선 연방 서변 국경을 지키는 병력에 ‘불리지’(不離支)라는 고조선 후국 부여 기마민족 군단이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불리지’와 ‘불령지’(不令支, 고중국 발음은 ‘부리ᅌ지’)는 동일한 나라의 다른 한자 차음 표기이며 고조선 후국 부여족 무장이 거느린 기마부대족으로, 정복하는 지방마다 자기 부족의 ‘불’(弗, 不)을 넣어 이름을 짓는 특징을 가졌다고 기록했다(『조선상고사』).
BC 664년 고중국 동주(東周) 제(齊)의 환공(桓公)이 조(曹), 허(許), 연(燕), 진(晋), 노(魯) 등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조선을 공격해서 고조선-동주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불리지(=불령지)는 고죽·산융(훈족)·불도하 등과 함께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해서 제환공의 고중국 연합국과 싸워 물리쳤다. 불리지가 고조선 문명 후예임의 명백한 증거이다.
이 불리지가 그 후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불가르족’(Bulgars)으로 호칭되고, 그 일부가 발칸반도에 들어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했다.
불리지의 뜻은 고조선어의 음차로서 ‘부르+지(치)’인데 ‘부르’는 부여족을 의미하고, ‘지(치)’는 장관·장군·가(加)의 뜻이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직책이 莫離支(막리지)인데, 신채호 선생에 따르면 마리치[마리(首, 머리+치(相)]로서 ‘머리 장관’(=首相)의 뜻이다. 즉 불리지는 ‘불가’(부여족 加)와 동일한 뜻이다.
BC 108년 고조선 멸망 후 ‘불리지(=불가족)’는 반농반목(半農半牧)의 후국으로 존재했다. 농경에 묶여 떠날 수 없는 소수만 남고 유목민들은 모두 북방으로 후퇴했다. 이후 ‘오호(五胡) 16국’ 시대에 반격하여 ‘한’(漢, 전한)을 멸망시켰지만, 다시 후퇴하여 서방으로 이동해 카프카스 지방으로 들어가 정착했다. 이때부터는 한자문화권을 벗어나서 ‘불가(르)’족으로 불리었다.
원래 고조선 후국에서는 ‘가’(加, 伽, ga, gar)가 독립해 ‘왕’이 되면 ‘가한’(khahan) 혹은 ‘칸’(kan)이라 불렀다. 불리지 역시 서방으로 이동해 불가족으로 불리었어도 그 족장은 고조선 후국의 명칭인 ‘칸’으로 호칭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룬시맨(Steven Runciman)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원불가리아족은 동방에서 왔지만 기원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유럽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북카프카스 지방 ‘온오구르 불가르’(Onogur Bulgar)족 족장이 조카 쿠브라트(Kubrat)와 함께 5세기 비잔틴 로마 황제 헤라크레이오스(Herakleios) 1세를 방문한 때부터이다. 동로마황제는 크리미아와 카프카스 방위를 위해 아발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동맹자를 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환대하여 ‘파트리키우스’(특권 시민계급)의 칭호를 주었고, 조카 쿠부라트는 인질로 콘스탄티노플에 남게 했다.
쿠부라트는 그 후 카프카스에 돌아와 족장이 되자 630~635년경 비잔틴 로마제국의 지지 아래 4갈래의 불가르족을 연합해, 아발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고(古)대불가리아’(Old Great Bulgaria)를 건국했다.
‘古 대불가리아’는 30년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쿠부라트 왕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왕의 다섯 아들이 권력 승계 투쟁을 시작했다. 이 무렵 ‘하잘’(khazar)족의 침공으로 ‘古 대불가리아’ 부족연합은 붕괴했다. 쿠브라트의 큰아들 바트바얀(Batbayan)의 ‘쿠비 불가리아’(Kubi Bulgaria)는 하잘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상하여 볼가강 중류에 독립국 ‘고추 불가리아’(Kocho Bulgaria)를 세웠다. 유럽인들은 이를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라고 불렀다. 셋째 아들 아스파루흐(Asparukh)는 새 독립국을 세우려고 발칸반도로 들어갔다. 넷째 아들 쿠베르(Kuber)는 판노니아에 들어가 아발제국에 편입됐다. 다섯째 아들 알체크(Altsek)는 다뉴브강을 건너 비잔틴 동로마제국에 복속해 ‘알체코 공작’(Duke Alzeco)의 칭호를 받았다. 여기서 룬시맨이 ‘아들’로 기록한 것은 실제로는 ‘부족집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중에서 ‘볼가 불가리아’는 자기 영토의 큰 강을 불가강(후에 ‘볼가·Volga강’으로 변음)이라 했고, 그 동쪽 상류에 ‘곰강’(熊川, 후에 ‘가마·Kama강’으로 변음)이라는 부여족 명칭을 붙였다. 그들은 농경·목축·제철 및 피혁 수공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루흐가 인솔한 3만~5만 명의 불가르족은 발칸반도의 동북부 다뉴브강 하류 삼각지대에 진출해 정착하려다가 동로마제국이 거절하자, 결전을 감행했다. 아스파루흐의 기병대는 5만 명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681년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웠다. 오늘날 불가리아의 시작이다. 불가리아는 ‘불가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아스파루흐 칸은 수도를 플리스카로 정했다. 최근 불가리아 고고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수도 플리스카의 성벽은 2중으로 되어있다. 외성은 21㎞의 긴 장방형 토성(土城)을 쌓고 주위엔 환호(環濠)를 파서 사람과 말이 건널 수 없게 했다. 내성은 돌로 석성(石城)을 쌓아 그 안에 궁전과 ‘보야’(boyar·부여의 변음인 듯)라고 하는 귀족층의 거주지와 주요 시설을 두었다. 전형적 부여식 성곽이었다. 석성(내성) 안의 ‘아사달’(Asar-dere)이라 호칭된 구역에서는 고급 도자기·철기·유리 제조 유적이 발굴됐다. 수공업이 크게 발전한 증거이다. 외성 밖의 농촌에는 동로마 통치하의 속주로 살던 소수 원주민 트라키아족과 다수의 슬라브족이 거주했다. 주목할 것은 내성 왕궁과 귀족층 지역을 ‘아사달’로 호칭한 사실이다. 이것은 건국기의 불가리아 제1제국이 자기의 뿌리를 고조선·부여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국가종교는 최고 유일신으로 조상신이며 유일신인 단군(Tangra)을 숭배하는 단군 신앙이었다. 태양과 단군 신앙의 상징 조각들이 현재도 도처에 남아 있다. 출산과 양육에는 단군의 배필 ‘어마이’(Umay, Omay)의 점지와 가호를 신앙하였다. 고조선의 삼신 할머니 신앙과 동일한 유형이다.
나라 안의 명산에는 ‘발칸산’(밝산, 白山)의 이름을 붙이고, 제천행사를 하였다. ‘발칸산맥’, ‘발칸반도’의 명칭은 불가리아 제1제국이 붙인 이름이다. 서양인들은 그 뜻을 모르지만, 고조선어로 ‘밝산’(白山), ‘밝은 반도’의 뜻이다.
귀족의 무덤은 주로 고조선식 고인돌 무덤이다. 토닌(Dimitar Tonin)씨가 현재의 불가리아에서 지표조사 보고한 것만도 무려 1140여개나 된다. 이 고인돌은 철기시대의 것이어서, 입구에 돌을 잘 다듬어 사각형의 상징적 출입문을 만든 발전된 특징이 보인다. 기본구조는 그들 조상의 고조선문명 고인돌 양식을 계승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을 동방의 불가르(불리지)족이 민족 이동해 들어가 세웠음은 명백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