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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홍순언씨의 업적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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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2) 조선의 운명을 바꾼 역관 홍순언
문관인 정사(正使)는 공식적인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으면 그만이지만, 역관은 배후에서 절충하는 일을 맡았다. 절충하는 과정에는 유창한 외국어가 기본이었지만, 때로는 금품도 오가고, 여러 해 동안 오가며 맺어둔 인맥도 중요했다. 사신들은 일생에 한 두번 가기 때문에 인맥을 쌓을 기회가 없었지만, 역관들은 대여섯 번,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들은 열 번이 넘게 파견되었으므로 각계에 인맥이 형성되었고, 제자들에게 그 인맥을 소개했다. 인맥을 통해 조선과 중국 사이의 외교 현안을 해결한 역관으로는 홍순언(洪純彦)이 가장 유명하다.
▲ 광국공신 녹권. 홍순언의 이름이 2등 마지막 줄에 보인다.
●공금 털어 구한 여인이 明 예부시랑의 후처로
홍순언은 젊었을 때에 뜻이 컸고 의기가 있었다. 한번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통주에 이르러, 밤에 청루에서 놀았다. 자태가 특별히 아름다운 한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주인할미에게 부탁하여 한번 놀아보자고 청하였다. 순언이 그 여자의 옷이 흰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묻자,“첩의 부모는 본래 절강 사람인데, 서울에서 벼슬하다 불행히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나그네 길이라 관(棺)이 여관집에 있지만 첩 한몸뿐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낼 돈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제 몸을 팔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을 마치고는 목메어 울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사지낼 비용을 물으니,“삼백금이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곧 돈자루를 다 털어 주었지만, 끝내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여자가 순언의 이름을 물었는데도 이름을 말해주지 않자,“대인께서 성명을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첩도 또한 주시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홍씨라는) 성만 말해 주고 나왔다. 동행 가운데 물정 모르는 짓이라고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여자는 나중에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후처가 되었다. 석성은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여겨, 우리나라 사신을 볼 적마다 반드시 홍역관이 왔는지 물었다. 순언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공금의 빚을 갚지 못한 것 때문에 잡혀서, 여러 해 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때문에 전후 열댓 명의 사신이 중국에 다녀왔지만, 아무도 허락받지 못했다. 임금이 노하여 교지를 내렸다.
“이것은 역관의 죄이다. 이번에 가서도 또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수석 역관 한 사람을 반드시 목 베겠다.”
역관 가운데 감히 가기를 원하는 자가 없자, 역관들이 서로 의논했다.“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다. 그가 빚진 돈을 우리들이 갚아 주고 풀려나오게 하여 그를 중국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 그는 비록 죽는다 해도 한스러울 게 없겠지.” 모두들 가서 그 뜻을 알리자, 순언도 기꺼이 허락했다.
선조 갑신년(1584)에 순언이 황정욱을 따라서 북경에 이르러 바라보니, 조양문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었다.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판사가 누구시냐고 물었다.“예부의 석시랑이 공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
조금 뒤에 보니 계집종 열댓 명이 부인을 에워싸고 장막 안에서 나왔다. 순언이 몹시 놀라 물러서려고 하자, 석성이 말했다.“당신이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선비입니다.” 부인이 무릎을 꿇고 절하기에 순언이 굳이 사양하자, 석성이 “이것은 보은(報恩)의 절이니, 당신이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조선 사신이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하고 석성이 물었다. 순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당신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객관에 머문 지 한 달 남짓한 동안에 과연 조선 정부가 청한 대로 허락되었다. 석성이 주선한 것이다.
순언이 돌아올 때에 부인이 자개상자 열 개에 각각 비단 열 필을 담아 주며,“이것을 첩의 손으로 짜 가지고 공께서 오시길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순언이 사양하며 받지 않고 돌아왔지만, 깃대를 든 자가 압록강까지 와서 그 비단을 놓고 갔다.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순언이 돌아오자 나라에서는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기록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리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다. 그의 손자 효손(孝孫)은 숙천부사가 되었다.
●조선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다
정명기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홍순언의 이야기는 39가지 책에 조금씩 다르게 전한다. 그 가운데 서사구조가 분명한 ‘국당배어’‘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위에 소개했다. 홍순언의 이야기 가운데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종계변무를 해결했다는 점이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이인임이 나이 어린 우왕을 세웠는데, 명나라 사신 채빈이 본국에 돌아가 공민왕 피살사건을 보고하면 재상인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염려하여 중도에 살해하였다. 정도전·권근·이첨 등의 친명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누렸지만,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유배보냈다. 이성계의 정적인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로 망명해 ‘이성계가 친원파 권신 이인임의 후사(後嗣)’라고 모함했다. 명나라는 이 말을 그대로 믿고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했다.
이성계가 정적 이인임의 후사라고 기록된 것은 조선 왕실의 가장 큰 모욕이었으므로, 태조뿐만 아니라 대대로 사신을 보내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수정해 주지 않았으므로 가장 큰 외교 현안으로 남아 있었다.1584년에 황정욱이 ‘대명회전’ 수정판의 조선관계 기록 등본을 가져오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종계변무’라는 용어는 ‘왕실의 계보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 홍순언이 살았던 곤담골이 청계천 바로 옆에 있었는데, 한자로는 미동(美洞)이라고 표시했다.
홍순언은 조선 왕실이 종계변무를 본격적으로 해결할 준비를 하면서 역사에 정면으로 등장했다. 선조실록 5년(1572) 9월11일 기사에 “주상이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종계(宗系)의 악명(惡名)을 바로잡는 일에 관해 먼저 대략 말하고, 이어 단자(單子)로써 자세히 기록해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통사 홍순언 등을 시켜 한어(漢語)로 번역해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주어 아뢰도록 했다.”고 했다. 국서는 한문으로 된 문어체라서 친근감이 없었지만, 단자는 구어체였으므로 간절한 마음이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계변무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12년 뒤인 선조 17년 11월1일 실록에서야 “종계 및 악명 변무주청사 황정욱과 서장관 한응인 등이 칙서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고 했다. 선조는 그 사실을 종묘에 고한 뒤 죄수들을 사면했으며,“정욱과 응인 및 상통사 홍순언 등에게 가자(加資)하고, 노비와 전택(田宅), 잡물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종계변무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봉했는데, 홍순언에게 2등 당릉부원군을 봉했다.19명 가운데 실무자급인 역관은 홍순언 한 사람만 포함되었다.
●39가지 야담과 소설로 전하는 홍순언 이야기
당릉군에 봉군된 홍순언은 왕궁을 지키는 종2품 우림위장(羽林衛將)까지 승진했는데, 사간원에서 두어 차례 탄핵하였다.“출신이 한미한 서얼이라서 남에게 천대받는다.”는게 이유였는데, 선조는 그가 공신으로 가선대부까지 받았으니 결격사유가 없다고 옹호했다. 역관 홍순언의 능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발휘되었다.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사신이 가며 그도 따라갔고, 선조와 고관들은 그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조선 정세를 파악했으며,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
▲ KBS 1TV는 ‘한국사 전’ 제1회에 ‘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라는 제목으로 홍순언의 생애를 방영하였다.
석성이 과연 홍순언이 구해준 여자와 혼인한 덕분에 조선에 원군을 보냈는지, 역사 자료만 가지고 확인할 수는 없다. 야담이나 야사에서는 여인이 몸을 팔게 된 이유도 달리 나오고, 석성의 벼슬도 달라지며, 그가 해결해 준 현안도 달라진다.
‘청구야담’에는 홍순언이 병술·정해년(1586∼1587) 사이에 북경에 갔다가 청루 문 위에 “은 천 냥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쓴 것을 보고는 중국 탕아들도 값이 비싸서 들어갈 생각을 못하는데, 그는 “부르는 값이 그만큼 비싸다면 반드시 뛰어난 미인인 것”이라 생각하고 수천냥을 털어 그 여자를 샀다고 한다. 이미 종계변무가 해결된 뒤이니,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원군 요청의 임무를 띠고 홍순언이 파견되었으며, 병부상서 석성이 해결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종계변무는 외교적 사안이니 예부에서 담당하고, 원군 파견은 군사적 사안이나 병부에서 담당한다. 석성의 벼슬은 그에 따라 달라진다. 홍순언은 공금을 횡령해 청루의 여자를 산 협객인데, 결과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에 살이 덧붙어 야담과 소설이 39종이나 되고, 박치복이라는 시인은 5언 264구의 장편서사시 ‘보은금(報恩錦)’을 지었다.
●곤담골에 천인 백정교회가 들어서다
▲ 을지로 1가 180 롯데호텔 앞에 홍순언의 동네를 가리키는 ‘고운담골’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가 살던 동네에는 지금 롯데호텔이 서 있고, 그 앞에 ‘고운담골’ 표지석이 있다.‘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인 비단을 기념해 동네 이름이 보은단골인데, 고운담골, 곤담골로 바뀌었다. 고운담골을 한자로 쓰면 미장동(美牆洞)이다.
임진왜란이 300년 지난 1892년에 무어 선교사가 조선에 왔다가 조선어를 익히기도 전에 곤담골에 이사하여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조선인을 야만시하던 권위적 선교사와 달라 인목(仁牧)으로 불렸는데, 백정까지도 교회에 나오게 하여 곤담골 ‘백정교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얼 출신 역관이라 천대받던 홍순언의 동네에 백정교회가 세워진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기사일자 : 2007-08-06 1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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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언의 역할은 단 하납니다...종계변무를 해결한 공이...임란의 성웅 이순신 보다 더한 업적으로 선조에게 평가받은 거입니다. 그럼 종계변무가 뭔 대단한 사건이기에 임란보다 중요했을 까 잠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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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 (조선 역사) [宗系辨誣]출처: 브리태니커 인쇄하기관련태그 조선 역사, 역사적 사건
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 간 명(明)나라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잘못 기록된 세계(世系)를 시정해달라고 주청(奏請)했던 사건. 고려시대인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제거할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왕실의 후계가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으로서 그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모함하고 이성계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했다. 명나라에서는 이 내용을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기록했다. 조선은 1394년 명나라 사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종계(宗系)문제는 조선왕조의 합법성과 왕권확립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의 귀국편에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반응이 없자, 1402년(태종 2)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하여 주청문(奏請文)을 보냈으나, 명나라에서는 〈만력회전 萬曆會典〉 중수본에 변명사실을 부기하는 데 그쳤다. 이후 이것은 200여 년에 걸친 양국간의 외교문제가 되었고, 중종반정의 합법성 강조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주청사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 〈조선국조 朝鮮國條〉의 주에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丹 : 이성계)이 홍무 6년에서 28년까지 4명의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자 중종은 남곤(南袞)·이자(李耔)를 보내 개정을 요구했다. 그후 〈대명회전〉 중찬이 있으리라는 소식을 듣고 1529년 유보(柳溥), 1539년 권벌(權), 1557년(명종 12) 조사수(趙士秀), 1563년 김주(金澍), 1573년(선조 6) 이후백(李後白)·윤근수(尹根壽), 1575년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내 거듭 개정을 주장했다.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등본을 가지고 돌아와서 종계변무의 목적이 일단락되었다. 1587년 유홍(兪泓)이 중수된 〈대명회전〉 중 조선관계 부분 1질을 받아와 선조가 종묘사직에 친고(親告)했으며, 1589년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옴으로써 종계변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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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족보가 잘 못(?) 기재되었단 내용입니다. 먼 나라 명나라의 역사서에여...^. .^
* 글 쓰는 도중...검색도중...엄청난 버그들이 떠서...글 날라 갈까봐...먼저 글을 잽사게 등록하고...추가분을 다시 올립니다. ...........................................................................................................................................................................
여기서 저의 이의 제기입니다.
조선은...현제의 역사서만 보면...개국 초부터 명나라에 엄청 충성을 합니다. 조선이란 국명도 거기서 받아 왔을 정도라니여...^. .^
그런 조선의 정통성에 명나라가 꾸준히 딴지를 겁니다...이건,공정거래위반입니다.
조선 황조 내내...명나라에게...위의 족보조작을 고쳐달라 구걸하다시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 까여...? 신성한 황조의 역사를 외국에서 조작했다 했기로서니...나라가 거의 망해가던 임란중에도...거기에 올인한 흔적입니다.
임란의 영웅들은...오히려 내란 음모죄등으로 제거 되거나...홀대 받기도 했는데...
서출인 홍순언을... 국법에 없다는 대신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군(君)에 봉합니다...황자들이나...엄청난 공신등에게만 하사하는 작위입니다.
마치...
현제...이뤄지고 있는 동북공정을... 제가 중국가서 바로잡겠단 약속을 받아 오고선...잡배인 제가 국무총리에 오른 격입니다.
사실, 우리만 당당하다면... 만일,일본이 우릴 처 들어온 마당에...중국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면서...동북공정을 중단해 주시여...그리고 군대 좀 보내 주시여... 이건..이건... 거래를 하지 말잔 주장이겠져...?
그러나 홍순언은 그 거래를 성사시켰습니다.
저는 이 모순들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조선의 태조 리성계 가계는...고려 천자를 계승할 가계가 아니다. 티무르(태무진)이란 이름이 있지만...그도 이름 뿐...징기스칸의 황통을 이을 가계도 아니였다.
이걸...명은 알고 있다...명은 만주족이요...그 때의 만주는 중앙아시아다. 명의 정확한 영토는...티벳과 아랍남부같다.
명은 왜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이용해...거래를 한 것이다. 즉,당신들의 족보에 딴지를 않 거는 대신...앤드...오합지졸의 멍군을 보내주는 대신... 우릴 독립국으로 인정해 주고...따스헌 땅을 달라...그 땅은...아마도 동남아 같습니다.
여기서 또 의문이... 군대를 보내 주는 대신...땅을 거래하면 그뿐이지...왜 민감했던 외교사안을 구태여 아쉬울 때 고쳐 줄 걸 요구했냐는 거지여... 전쟁 다 끝나고 디리 패 버리던지...힘을 이용해 회유하던지 하면 될 것을여... 타협의 아무런 요령도 없는...외교술의 바보들이 할 짓이지여...
이걸로 보아...임진란의 개요가 정리가 됩니다.
임진란도 결국은... 조선 황가의 정통성을 약점으로 들고 나온...동남아와 중원 동쪽의 백성들을 왜가 부추긴 전쟁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실,유목식 조선문화가...농경의 동이나 왜의 문화에 반발을 불러 일으킨데다...가혹한 조세정책까지 겹쳤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이 상황을 이용한...양키들의 대륙조선 붕괴 시나리오가 절묘하게 발휘됐던 것이고여...ㅡ. .ㅡ
전주 이씨 분들껜 죄송하오나... 사실 제가 잠깐 듣기론...확실친 않으나...리성계씨의 족보는...모순이 많답니다.
시조는 다른데... 중시조가...경주이씨와 똑 같습니다...^. .^
리성계씨 윗대의 상왕들...즉,명예 왕들의 가계도의 벼슬들은...그 당시엔 존재치도 않던 벼슬이랍니다. 리성계씨 의동생인 여진족 누구(이지란?)는...사실,친동생이나...황가족보를 위해...여진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의형제로 만들었단 설도 있습니다.
원 만주족(트란속사니아 주변 멍골족)인 명나라는...같은 동리의 추장...리성계씨 집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약점잡아...내내 조선왕가의 전통성 없음을 겁박해 이권을 누렸을 것이며...
또 다른 멍골족인...러시아쪽 깊착크 한국...옛 금장한국의 누루하치도...이 숫법으로 중앙아와 현 몽골의 패자가 됩니다...^. .^
글이 또 늘어지니...멍나라와 텅나라,여진에 대해...위에 하나 더 쓸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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