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뛰어난 과학 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4대 발명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채륜이란는 사람이 발명한 종이는 훗날 유럽에 건너가 지식을 널리 알리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유럽의 사람들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이용하는가 하면 나무판을 얇게 잘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종이가 개발되면서 보관이나 운송이 쉬워져 지식이 널리 보급되게 되었는데 사실 이 종이는 우연한 계기로 탄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사용했던 종이 파피루스)
어느 날 채륜이 산책을 나갔는데 개울가를 지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개울가에서 한 아낙이 솜을 물에 담가 두들겨서 빨고 있었습니다. 채륜이 이상해서 그 아낙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솜을 물에 담가 그렇게 빨면 다 풀어져서 못쓰게 되지 않소?”
그러자 그 아낙은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솜을 햇볕에 말리면 원래대로 돌아오니 걱정 마시구랴!”
이 말을 듣자 채륜은 얼핏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요?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채륜은 옷감이며 나뭇가지 같은 것을 두들겨 물에 풀어놓았다가 그것을 다시 걸러 햇볕에 말려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채륜이 만든 종이의 기원입니다.
(종이를 만들고 있는 채륜)
채륜은 이 종이를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이름을 ‘채후지’라고 부르도록 했답니다.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종이를 ‘채후지’ 라고 불렀습니다.
이 기술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 학문을 발전시키고 역사를 기록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593년에 고구려에 전해졌으며, 우리는 또 일본에 이 기술을 전해줬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선조들의 지혜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대 중국의 종이 만드는 과정)
현대에 와서 컴퓨터가 발전하고 종이를 대신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여전히 종이는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위대한 발명품인 인쇄술은 최초의 활자를 1041~ 1048년경 중국의 필승이라는 사람이 점토와 아교를 섞은 뒤 구워 만든 것이 최초의 인쇄용 활자입니다. 그리고 1313년 역시 중국의 왕정이라는 사람이 나무로 된 활자 6만 자를 새겨 기술사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만든 것은 우리나라가 최초의 것으로 되어 있는 목판인쇄와는 다른, 활자인쇄라는 것입니다. 역사 시간에 배우게 될 세계최초의 목판인쇄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706~751년)인데, 이것은 넓은 판 위에 책 한페이지에 찍을 내용을 모두 새긴 것입니다.
(인쇄용 활자를 발명한 필승과 교니활자판)
(현재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이 인쇄술은 유럽으로 건너가 금속활자의 개발을 이끌게 됩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성경책 한 권의 값이 집 한 채 값과 맞먹었답니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필기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손으로 일일이 베껴 써서 책 한 권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은 신부들이나 부자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더 많은 책을 만들어 일반 사람들까지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때마침 시대의 분위기도 르네상스라는 큰 흐름이 있었고, 종교개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집에 두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지요.
이러한 흐름 속에 필사가 아닌 판을 만들어 성경을 찍어내고자 하는 시도가 독일의 라인 강변에 위치한 마인츠 마을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이 마을의 금은세공사였던 구텐베르크라는 사람이 『가난한 자의 성서』라는 40쪽짜리 책을 나무 목판에 새긴 다음 종이에 찍어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습니다.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 42행 성경)
이 40쪽짜리 책이 나오는 데만도 서너 달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이후 구텐베르크는 더욱 욕심을 내어 성경책 한 권을 통째로 목판으로 인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성경책 한 권의 분량은 천 쪽이 훨씬 넘는 분량이었고, 이것을 전부 목판으로 새기는 데 삼십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그만큼 비용도 엄청나게 들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작업을 하던 어느 날 구텐베르크는 목판 하나가 거의 완성되어 갈 즈음에 글자를 하나씩 옮기다가 실수로 틀린 글자를 새기고 말았습니다. 글자 하나 때문에 목판을 처음부터 다시 새겨야만 했습니다.
이때 상심해 있던 그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수십 개의 글자를 하나의 목판에 새기지 말고 글자 하나하나씩을 떼어서 조각한 다음 이것들을 조합해 책을 찍는다면 어떨까? 그럼 똑같은 글자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새길 필요도 없잖아!’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무로 된 활자는 책 몇 권을 인쇄하고 나면 다 닳아서 더 이상 인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살려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태동한 금속활자의 시작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사용하는 모습)
그 이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덕분에 책을 대량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책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학문의 발전이나 사상의 전파가 활발해져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답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구텐베르크는 시력을 잃게 되어 자신이 수십 년에 걸쳐 열정을 쏟아 부어 만든 금속활자로 인쇄된 성경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판)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200년이나 앞선 1377년, 『직지심경』이라는 책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금속활자는 당시 유럽의 금속활자처럼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구텐베르크의 활자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출처] 중국의 발명품-종이와 인쇄술|작성자 돈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