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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송천리 서변마을 ❏배향인물: 이경광(李絅光) 이성구(李聖求) 유심춘(柳尋春) ❏창건연도: 1815년(순조 15) ❏향 사 일: (음) 3월 5일 |
1815년(순조 15)에 유림의 발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왕실의 후예로 영화를 버리고 산속에 숨어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즐겼고 임진왜란 때 늙고 병든 아버지를 등에 업고 6백리 길을 걸어 장수 땅에 들어온 도암 이경광(陶岩 李絅光)을 위시하여 같은 가문의 증손이 되는 영의정 정숙공(貞肅公) 분사 이성구(汾沙 李聖求)는 장수현감으로 부임하여 치적을 남겼으며, 3대에 걸쳐 세자의 강연관이 되어 삼세계방(三世桂坊)으로 이름 높은 강고 유심춘(江皐 柳尋春) 등 3분을 모셨다. 창설한 63년후 인 1868년(고종 5)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그 뒤 1983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이경광(李絅光, 1563∼161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일장(日章), 호는 도암(陶庵). 태종의 아들 경녕군 비(敬寧君 裶)의 5대손으로, 음성현감을 지낸 희양(希讓)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로 현감 상(翔)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2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하였으며, 그 뒤 성리서(性理書)에 관해서도 탐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여 전라도 장수에 살면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은둔생활에 자오(自娛)하였다. 백화산(白華山) 남쪽 벽계수(碧溪水) 근처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산수에 소요하며 풍송(風松)·설죽(雪竹)·월매(月梅)·상국(霜菊)을 벗삼아 초매한 시취(詩趣)로 음영(吟詠)함을 낙으로 삼았다. 1597년(선조 30) 학행(學行)으로 군자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사퇴하였다. 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유, 학문을 강마하였으며, 선배학자인 장현광(張顯光)과도 접촉, 은일적인 생활에 의기 (意氣)가 서로 상합하였다. 저서로 ≪도암문집≫ 2권이 있다.
2)이성구(李聖求, 1584∼164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汾沙)·동사(東沙). 태종의 아들인 경녕군 비(敬寧君 裶)의 후손이며, 신당부령(神堂副令) 유(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희검(希儉)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수광(晬光)이며, 어머니는 도사(都事)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에 오르고, 1608년(광해군 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원(翰苑 : 예문관)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전적·감찰을 거친 후 예조·병조·형조의 좌랑, 부교리·헌납·병조정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민구(敏求)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내 삼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있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했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해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1614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거쳐 1616년 영평판관(永平判官)이 되어 포천도 함께 다스렸다.
이 때 이항복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무고 당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해가 심한 정치를 일신시키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부승지·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이조참의로서 왕세자를 전주로 호종하고,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이듬 해 전라감사에 부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좌승지·도승지·병조참판·대사헌·형조참판·경기감사 등을 지냈으며, 1636년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와 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했으며,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고 1640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명나라를 칠 원군을 보낼 수 없음을 전하고 왔다.
164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승지 홍무적 (洪茂績)의 모함으로 사직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지어 소요하며 지냈고, 향인(鄕人)을 권장해 <서호향약기 西湖鄕約記>라는 향약을 만들기도 하였다.
다시 영중추부사에 서용되었으나 나오지 않고 강호에 살다 죽으니, 인조가 조회를 폐하고 조제(弔祭)했다 한다. 이시백(李時白)은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이성구의 인물됨이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분사집≫이 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3)유심춘(柳尋春, 1762∼18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상원(象遠), 호는 강고(江皐). 유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광수(光洙)이다. 큰아버지 발(潑)에게 입양되었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거쳐 익위(翊衛)가 되었다. 1800년(정조 24) 경연을 열어야 된다고 상소하였다.
1830년(순조 30) 왕의 하교로 3대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치하하고 돈녕부(敦寧府)의 도정에 임명하였고, 1854년(철종 4) 아들 후조(厚祚)가 급제하였으므로 다시 통정대부에 올랐다. 평소에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탐독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와 4칸의 강당이 있으며, 사우에는 이경광·이성구·유심춘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의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참고-장수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