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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설화 69 정조대왕의 효심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번 못하다니...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선세자(장조=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늘 가슴이 아차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때 할아버지 영조는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뒤주속에 넣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어린 왕세손은 울며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영조는 뒤주에 못ㅁ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아무도 듣지 않자 발표했다 그로부터 6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잚은 나잉[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저승에서나마 왕생극락하시도록 볼봐드려야지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묻힌 부친의 묘를 절 가까이 모셔 조석으로 영가를 위로하기로 결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게 했다 그러던 언 날 임금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보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게 했다
불교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 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낳아주시는 은혜요 셋째는 참아 기르느냐고 고생하신 은혜요 넷째는 쓴 것은 부모가 먹고 단 것은 나에게 주시는 은혜요 다섯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뉘어 주시는 은혜요....... 설법을 다 들은 정조는 부친을 위해 절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먼저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념리 화산으로 부친의 묘를 옮겼다 그리고는 가까이 있는 절 야시터(신라 문성왕 16년에 세운 절)에 부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능사를 세우도록 했다 왕은 보경스님을 팔도도하주로 삼았다 백성들은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위해 절을 세운다니 너도 나도 시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보경스님은 8만량의 시주금으로 4년 만에 절을 완성했다 낙성식 전날 밤이었다 종조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낙성식에 친히 거동한 임금은 절 이름을 용주사라 명했다 이 절이 바로 지금의 화성군 태안면 송사리에 위치한 조계종 제 2교구 본사 용주사다 종조는 자신에게 부모의 은혜를 새삼 일깨워주고 용주사를 세우는데 크게 공을 세운 보경스님으로 하여금 용주사를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을 찾아 부모은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다시 경판으로 각을 하여 용주사에 모시게 했으니 이는 지금도 원형대로 잘 보존죄고 있다
또 임금은 궁에서 쓰던 명나라제 금동 향로와 야월락안도 우중어웅도 촌중행사도 산중별장도 구주귀범도 산사삼배도 강촌심방도 효천출범도와 용을 정교하게 양각한 8면 4각의 청동 향로를 하사했다
임금은 능이 있는 수원에 화성을 쌓아 수경으로 승격시키는 등 비명에 가신 부왕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은 다했다 정조는 기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용주사를 찾았다 어느 초여름 날이었다 능를 참배하던 정조는 능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잎을 갉아 먹는단 말이냐 비명에 가신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이렇듯 독백하며 송충이를 한 마리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 이후로 이 일데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다
지금도 용주사 주변과 용건릉 지역은 송림이 울창하여 장관을 이루며 특히 용주사 주변과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210호호 지정돼있다 어느 가을날 용주사로 향하던 임금의 행차가 수원 못 미쳐 군포를지나 고개 마루를 오르느라 속도가 좀 떨어졌다 가마 안에서 임금은 속이 타는 듯 호령를 내렸다 여봐라 어찌 이리 더디단 말이냐 언덕을 오르느라 좁 더디옵니다 부왕을 그리는 정이 몹시 사무쳐 빨리 절에 다다르고 깊었던 왕의 심정을 기려 주민들은 이 고개를 (지지대)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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